지난 12월 22일 현대경제연구원은 '한류현상과 문화산업화 전략보고서'에서 최근 일본에서 불고 있는 '겨울연가'의 주인공 '욘사마(배용준)' 붐의 경제효과가 무려 3조원에 달한다고 발표했다. 국내 1조원, 일본은 2조원 이상의 매출을 상정할 수 있다는 것. 뿐만 아니라 자동차 1만3100여대를 판매하는 경제효과에 버금가는 것이며, 그동안 상당한 침체기였던 제조산업에 동반성장을 꾀하고 있다고, 다소 파격적인 진단을 내리기도 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는 일본에서 불고 있는 겨울연가 붐과 '욘사마' 광풍(狂風)에 대한 경제적 효과를 분석하는 '계산서'가 유난히도 많이 발표된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1천억원의 경제적 효과가 있다고 발표하더니, 시간이 흐를수록 산술적인 계산이 점점 높아져 마침내 국내 매출 1조원을 예상하는 발표도 나오고 있다. 아마도 이 런 경제 보고서는 앞으로 또다시 예상 수치가 달라질 것이다.
이렇듯 '겨울연가'라는 한편의 드라마로 인해 파생되는 '영양가'는, 이제 앞으로 어떤 모양, 어느 형태로 한일 양국에 나타날지 아직도 그 여백이 많이 남아 있다.
한일 자유무역(FTA)협상 윤활유
아직도 국내의 많은 사람들은 일본열도를 휘몰아치고 있는 '욘사마' 광풍을 완전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한마디로 한국드라마를 좋아하는 것까지는 이해하겠는데, 일본여성들의 인생을 뒤흔들어 놓을 만큼 '겨울연가' 혹은 '배용준'의 어디가 그렇게 좋으냐는 것이다. 실제로 이렇게 묻는 한국인이 적지 않다. 심지어 막말로 '미쳤군' 하며 고개를 흔드는 이도 있다.
하지만 일본에 오래 산 한국인들은 결코 그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일본 여성들처럼 '욘사마'에 올인하는 그런 광적인 반응까지는 안 가지만, 심정적으로 일본여성들을 충분히 이해한다. 왜냐하면 일본에 근거지를 두고 있는 한국인들은 '일본인'을 어느 정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인(사람)'의 감정이 이입될 여지가 아예 없다. 설령 개성이 강한 돌연변이 일본인이 있어 시스템을 파괴하려 해도 웬만해서는 성공하기 힘들다. 오히려 아웃사이더가 되기 십상이다. 그만큼 일본의 시스템 사회는 대단히 견고하고, 그 힘이 일본의 역사가 되고 국제적인 경쟁력을 길러주는 힘이 되고 있다. 바로 이런 사회에서 일본여성들은 '나사' 같은 존재다. 특히 '욘사마' 광풍의 한가운데 서 있는 중년여성들은, 일본이란 시스템사회를 완벽하게 묶어주는 나사다.
나사 하나로만 본다면 그저 평범하기 짝이 없는 부속품에 불과하지만, 시스템사회의 적재적소를 매듭으로 이어주는 존재가치는, '일본'이란 거대 함대를 선진국 대열에 올려놓는데 아주 중요한 기능을 발휘하고 있다. 일본 남성들이 시스템사회의 한 구성원이라면 그 파트너가 되는 여성들 또한 시스템의 프로그램대로 인생을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내 인생의 주(主)가 내가 아닌 회사, 혹은 조직이 되다 보니 자연 '인간'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자연 일본인들의 이미지가 차가울 수밖에 없다. 혹자는 일본인들이 너무 이성적이고 냉정해서 '인간미'가 없다는 혹평도 한다. 하지만 일본인에 대한 이런 평가는 어디까지나 외면에 편중된 사고(思考)일 뿐이다. 왜냐하면 실제로는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의 성향은 정(情), 즉 '사람'에게 대단히 약하다. 어느 유럽 신문에서는 일본인들을 가리켜 '경제적 동물'이라고 평가했다지만 일본인들처럼 정에 약하고 눈물이 많은 국민도 드물다. 그렇기 때문에 '겨울연가'가 한국보다 일본에서 더 폭발적인 인기를 끌 수 있었다.
일본인들은 정에 무지 약하다?
아름드리 나무가 길 양편에 드리워진 남이섬의 산책로, 그리고 인간의 마음을 순백의 동산으로 이끄는 하얀 눈밭이 펼쳐지는 그림 같은 로케 현장, 거기에다 뭇여성의 심금을 울려주는 슬픈 멜로디의 배경음악과 꽈배기 목도리, 바람머리 등 한껏 멋을 부린 배용준의 살인미소를 한없이 슬프게 하는 겨울연가의 러브 스토리....
바로 이런 드라마를 보고 또 보고, 나중에는 그것만으로는 도저히 가슴깊은 곳에서 일어난 파도를 가라앉힐 수 없어 겨울연가의 흔적을 찾아 한국여행을 떠나는 일본 여성들. 아마도 감정이 없는 일본인이었다면 이런 반응은 절대로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NHK-TV 위성방송에서 처음으로 겨울연가가 방영될 때만 해도, 솔직히 그 어느 일본 매스컴도 현재와 같은 반응을 예측하지 못했다. 또한 위성방송에서 두번째로 방송을 할 때도 그저 할 일 없는 중년여인의 공허한 마음을 잠시나마 메워주는 카타르시스 같은 일시적인 바람이려니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겨울연가의 재방송 횟수가 거듭되면 될 수록, 그저 평범한 아낙네에 불과했던 일본여성들의 반응이 온도를 측정할 수 없을 만큼 점점 뜨거워졌다.
바로 이런 열기를 가장 먼저 감지한 것은 겨울연가를 방영하고 있는 당사자인 NHK. 일본인들이 '거대한 공룡'이라고 일컫는 NHK는 일본 여성들의 감정이 결코 일시적이 아님을 재빨리 눈치채고는 곧바로 행동에 들어갔다. 그동안 만성적자에 허덕이던 NHK의 이익산출을 '겨울연가'에 올인한 것.
이렇듯 겨울연가와 '욘사마'는 요즘 일본에서 지존의 위치에 있다. 뿐만 아니라 이 드라마에 출연한 최지우, 박용하, 배경음악을 부른 류 등도 인기스타 반열에 올랐다.
그런가 하면 겨울연가 붐을 계기로 권상우, 최지우가 주인공인 '천국의 계단'이 후지TV에서 매주 토요일 방영되고, 류시원, 최지우가 출연한 '진실'은 이미 인기리에 방영을 마쳤다. 현재 지상파 방송이나 케이블 TV에서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만 해도 '파파' '발리에서 생긴 일'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 등 무려 7~8편이다. 극장에서는 전지현이 주연인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 '올드 보이' '클래식'등 5~6편의 한국영화가 상영되고 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우리 한국인에게 '겨울연가'와 '욘사마' 붐이 가져다 준 것은 한국과 한국인의 위상과 한류 열풍. 불과 몇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인이라면 무조건 시끄럽고, 말 많고, 김치와 마늘 냄새가 난다고 무시하고 싫어하던 일본인들이, 겨울연가 붐 이후부터는 눈에 보이게 호의적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동네 슈퍼에서나 거리에서 마주치면 얼굴을 돌리던 일본인들이, 먼저 말을 걸어오고 이것저것 한국에 관한 질문들을 해오는 것은 이제 다반사. 특히 한국에 관한 정보라면 뉴스 정도에서나 들은 것이 전부이던 일본 전업주부들이 자진해서 한국에 대한 자료를 찾고, 공부를 하고, 나아가서는 일부러 한국여행을 떠나기도 해 한일관계의 미래가 점점 밝아지고 있다.
한국인에 먼저 말 걸어오는 일본인
그동안 재일동포나 한국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의식이 누구보다도 강하던 일본의 전업주부들이, 한국의 드라마로 인해 고부간의 갈등이 해소되고 소원했던 가족간의 우애가 두터워지는 등 한국드라마가 일본주부들의 일상생활에서 엔돌핀이 되고 있다.
한국 드라마에는 이미 일본 가정에서는 해체되어버린 가족간의 우애, 부모에 대한 효, 친구간의 우정, 주변 사람들의 희비애락에 자상하게 배려하는 눈물겨운 인정 등이 고스란히 배어 있어 일본주부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움직였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일본에서 태어나 성장했는데도 주변의 일본인들로부터 온갖 차별과 멸시를 받아온 재일동포들 마음이 많이 편해졌다고 한다. 바로 옆집에 살면서도 전혀 왕래가 없던 일본인 이웃이, 겨울연가 붐이 일면서 길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치면 아주 반갑게 말을 걸어오고 때로는 티타임도 갖게 되었을 정도다.
엊그제 만난 한 재일동포는 일본인과 이웃해 산 지 거의 20여년 만에, 새해 첫날 그 일본인에게 정식으로 초대를 받았다고 한다. 또한 차별 때문에 그동안 재일한국인임을 숨기고 살던 재일동포들 가운데 한류 붐을 계기로 당당하게 커밍아웃하는 경우도 부쩍 늘고 있다.
이렇듯 겨울연가에서 시작된 한류 붐은 한일간의 경제적 효과 외에도 자신의 정체성, 이데올로기 등 이런저런 갈등 해소에도 한몫을 단단히 하고 있다.
상황이 이러니 비즈니스 상담도 한류 이야기로 시작할 수밖에. 덕분에 딱딱하고 매끄럽지 못한 비즈니스 상담을 할 때는 한류 스타들에 대한 덕담이 아주 긴요한 윤활유가 되고 있다고 한다. 일본에서 살고 있는 재일동포와 한국인들의 어깨가 그 어느 때보다 당당한 것은 바로 한류 붐 때문일 것이다.
유재순[르포라이터] yjaesoon@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