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소로 공룡을 살리다
박근혜 한나라랑 대표는 항상 방긋방긋 웃는다. 집에서 연습을 하는지, 혹은 `'웃자 웃자'라고 속으로 주문을 외는지 마치 브로치처럼 미소가 얼굴에 붙어 있다. 작위적이 아니라 자연스럽다. 손목 인대가 늘어나 붕대를 감고서도, 때론 엄청난 비난에 시달리면서도 그는 웃는다. 그 잔잔한 미소로 `'거대 공룡' `침몰해가는 '난파선'인 한나라당을 구해냈다. 그는 총알 대신 미소를 날린 구원투수였다.
5월 29일 오전, 전쟁터의 막사 같은 한나라당 당사. 17대 국회개원과 6-5 보궐선거를 앞두고 10분 단위로 쪼개진 초살인적인 스케줄에 시달리면서, 지난 총선 때 다친 다리가 아파 걸음걸이조차 불편한데도 그는 여전히 웃고 있다. 제주도 유세를 떠나기 직전, 15분 정도 미국을 다녀온 박진 의원의 보고를 받을 예정이란다. 그 옆에서 산전수전 공중전 시가전까지 다 겪은 노회한 정치인들, 큰 목소리와 몸싸움으로 승부하던 남자 정치인들이 공손하게 따라 웃고 있다.
과거 박근혜 대표를 `'영남 공주'라고 비난했던 전여옥 대변인은 이렇게 말했다. 정치인이 된 후 몰라보게 살이 빠진 전 대변인이나, 요즘 더욱 살이 빠진다는 박 대표를 보면 정치가 바로 다이어트의 지름길인 것 같다. 허리가 24인치 정도라는 박 대표는 밥이나 제대로 먹을까?
"워낙 일정이 빡빡해서 도시락, 김밥 등으로 때우거나 굶을 때도 있지만 제대로 드실 땐 잘 드시더라. 또 인터넷에도 공개되었지만 단전호흡이나 요가도 하신다니까 그런 힘으로 버티시는 것 같다. 진짜 강단이 있다. 타고나기도 했고 어릴 때부터의 훈련인 것 같다."
송태영 부대변인이 말을 거들었다. 하긴 지난 총선 때는 2~3시간만 자면서 하루에 28군데를 돌며 유세를 하는 강행군을 했다는데 잘 먹어야 할 게다. 그런 외적인 가냘픔이 때론 동정표도 얻어내고 부성애나 모성애도 자극한다. 어떻게 52세의 나이에 어떻게 그런 허리 사이즈와 고운 피부를 유지할 수 있을까, 또 그렇게 바쁜데 그런 헤어스타일은 언제 다듬고 옷은 어디에서 사는지 그게 그의 정치력보다 더 궁금하기도 했다(머리손질은 직접 하고 옷은 몇몇 디자이너 브랜드의 옷을 입는단다).
공주냐 유령이냐
박근혜 대표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어머니처럼 머리를 다듬고 아버지 땅에 나타난 유령"이라는 비난이 있는가 하면 "뛰어난 영도자 아버지로부터 직접 지도자 가정교습을 받은 차기 대통령 후보이자 이 시대의 진정한 공주"라는 찬사도 있다. 아버지의 후광을 이어받아 복고 정서를 자극한다는 비판도 있지만 그 어떤 남성들도 하지 못한 일들을 의연하게 해내는 담대함과 판단력이 있는 정치인이란 칭송도 만만치 않다. 너무 드라이하고 여성적인 면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있지만 다소곳하고 우아한 품이 천상 여자라는 평가도 있다.
`'공주'나 `'유령'이란 평가를 받는 근원은 그의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그는 아홉 살 때 대통령이 된 아버지를 따라 청와대에 들어갔다. 스물두 살 때 어머니를 잃고 퍼스트레이디가 되었고 20여 년은 거의 은둔생활을 했다. 그리고 이제 쉰두 살. 어머니 육영수 여사가 마흔아홉 살에 총탄에 쓰러졌으니 이제 어머니보다 나이가 더 많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박 전 대통령의 딸이고 육영수 여사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아버지는 자산이기도 하고 부채이기도 하다. 아버지 곁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국가관, 사심 없는 정치, 철두철미한 자세, 세계를 보는 눈과 안보관 등이다. 선친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도 이젠 받아들이고 내가 해결할 부채라고 생각한다. 더 잘 하고 기대에 부응해 바른 정치를 하면 부채 청산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란 노래를 직접 작곡한 아버지 밑에서 성장기를 보내고 20대에 이미 외교사절을 영접하는 등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한 그에게는 '공주'나 `'정치인'이란 환경유전자가 깊숙이 침투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래서 그가 작은 목소리로, 정치인들이 흔히 구사하는 사자성어나 비유를 들지 않고 단순한 어법으로 이야기를 해도 유약하거나 아줌마의 중얼거림으로는 들리지 않는다. 묘한 신비감까지 감도는 것이 그의 매력이기도 하다.
그 어떤 평가에도 불구하고 그의 대중적 인기는 확실히 폭발적이다. 박정희-육영수에 대한 향수와 추억과 가난을 구제한 고마움을 기억하고 있는 노년층은 마치 몰락한 왕족의 공주가 되살아온 듯 안쓰러움과 혈육 같은 사랑을 느낀다. 또 정치에 관심이 없거나 유신시대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는 이들에게는 그저 "텔레비전에 자주 나오는 예쁜 여자"라는, 유명스타와 같은 대접을 받는다. 또 기존 남성정치인들에게 혐오를 느끼는 이들은 깨끗하고 바른 정치를 이끌 차세대 대권주자로까지 그를 밀어주고 싶어한다.
실제로 그가 거리유세 등에 나서면 "와!"하는 함성과 함께 악수를 청하고 포옹을 하며 사인공세가 쏟아진다. 10대는 이효리나 송혜교를 본 듯 사진을 찍자고 디지털 카메라를 들이대고 카메라폰을 마구 터뜨린다. 그때도 그는 방긋방긋 웃으며 일일이 사인도 하고 사진도 찍는다.
그는 네티즌들에게도 `인기 '짱'이다. 싸이월드의 그의 홈페이지에는 팬들이 보낸 사이버 액세서리인 도토리 선물이 가득하다. 같은 곳에서 운영하는 유명연예인들의 홈페이지에도 그렇게 많은 선물은 찾기 힘들다.
1회용인가 진짜 대안인가
이제 박근혜 대표는 다시 시험대에 올랐다.
지난 총선에서는 차떼기 정당이라는 오명을 쓴 거대 공룡 한나라당을 미소와 눈물로 구하는 해결사였지만 6-5 보궐선거에서도 '박풍(朴風)'을 다시 일으킬 수 있을까.
"대화를 해보면 상당히 똑똑하고 지혜로운 사람임을 확인할 수 있다. 독서량도 엄청나다. 친화력도 있다. 무엇보다 정치경력은 97년부터 시작이지만 20여 년을 대통령 딸로, 퍼스트레이디로 지내면서 위에서 내려다보는 능력을 갖춘 것은 그 누구도 갖지 못한 그만의 특장점이다. 남자들이 어질러놓은 더러운 정치판을 씻어내고, 홀연히 천막 당사로 옮기고, 대국민 사죄도 하고 상생의 정치를 주장하는 것은 순발력과 판단력이 대단함을 보여준다. 정치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니기에 항해가 순탄치만은 않겠지만 한나라당 역시 박근혜 효과를 버리진 못할 게다."
1회용 구원투수로 끝날지 아니면 뉴 한나라당의 진정한 리더로 거듭날지 그것 역시 온전히 박근혜 대표의 능력에 달려 있다. 지난 총선에서 그는 "저는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어 더 이상 잃을 것도 얻을 것도 없다"며 사심없는 마음을 전했다. 또 `'국민이 어머니입니다'란 캐치프레이즈로 모성정치도 강조했다. 아이를 절대 굶기지않으려고 헌신하는 어머니 마음으로 생활정치, 살림의 정치를 하겠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이미 방북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났던 그는 당 대표 자격으로 북한을 방문할 예정이라는 등 민감한 대북 문제도 놓치지 않는다. 전여옥 대변인의 전언처럼 '한번 한 말은 절대 번복하지 않는다'면 그에게 기대를 걸어도 좋을 듯하다.
정치적 행보만큼이나 그에겐 인간적인 궁금증도 많다. 평소 의자에 앉을 때조차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기대지 않는 그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일 때가 있을까? 어머니처럼 말아올린 머리를 풀고, 화장을 지우고 방에 혼자 있을 때는 무얼 할까? 가끔 혼자 술도 먹고 울기도 할까? 대학 보낼 자식도 없고, 무능한 남편이나 얌체 같은 시댁 때문에 속 썩을 일 없어 부럽다가도 은근히 안쓰럽기도 했다. 낯 모르는 이들이 실컷 만져 퉁퉁 부은 손이나 아프다는 발은 누가 주물러줄지....
글[유인경 편집장 alice@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