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리나 옷 색깔 따질 시간에

2025.06.16

가수 카리나가 빨간색 ‘2’가 쓰인 옷을 입었다는 이유로 구설에 올랐다. / 카리나 인스타그램 캡처

가수 카리나가 빨간색 ‘2’가 쓰인 옷을 입었다는 이유로 구설에 올랐다. / 카리나 인스타그램 캡처

코미디 유튜버 ‘킥서비스’의 콘텐츠 ‘망한영화리뷰’를 즐겨 본다. 감독의 헛발질 때문에 황당한 설정을 갖게 된 가상의 영화를 소개하는 액자식 구성의 코너다. ‘모태솔로 감독이 만든 멜로 영화’, ‘유사과학을 믿는 문과 감독이 만든 재난 영화’ 등이 소재다. 각본에 더없이 충실한 등장인물들은 비상식적인 언행을 반복하고, 영화는 흥행에 참패한다.

대선을 앞두고 올라온 영상의 제목은 <좌, 우 말고 가운데로 뛰어!>다. 좀비 영화 촬영을 마치고 개봉일까지 확정한 제작진은 갑작스러운 조기 대선을 맞는다. 제작진은 ‘정치적 논란’을 피하기 위해 영화 내용을 급히 수정한다. 원래 제목인 <이번이 기회다>는 <요번이 기회다>로 바뀐다. 파란색 옷을 입은 좀비가 등장했다는 이유로 추가 촬영을 통해 빨간색·주황색 옷차림의 좀비를 억지로 끼워넣는다. 하필 ‘준석’인 주인공 이름을 후시녹음을 통해 ‘승원’으로 어색하게 덮어버리는 장면이 백미다.

킥서비스가 풍자한 현실은 우리에게 조금도 낯설지 않다. 한국에서 대중문화 종사자, 특히 연예인들은 선거철마다 ‘정치적 중립’을 강요당한다. 미디어는 연예인들이 SNS에 어떤 단어를 쓰는지, 어떤 색깔 옷을 입는지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한다. 작은 껀덕지도 대서특필되고 대중의 ‘들불 같은 분노’가 온라인을 뒤덮는다. 당장이라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날 기세다. 목을 쳐라! 끌어내려!

이번에도 역시다. 가수 카리나가 빨간색 ‘2’가 쓰인 옷을 입었다는 이유로 구설에 올랐다. 방송인 홍진경은 빨간 옷을 입은 게 논란이 되자 “이유를 막론하고 무조건 제가 잘못했습니다”라고 자필 사과문을 올렸다. 가수 이채연은 손목을 다쳤는지 파란색 아대를 착용했는데, 그는 토마토를 들고 투표 인증숏을 찍으면서 “중화시킵니다”라고 썼다. 많은 온라인 기사가 이채연의 인증숏을 두고 “센스 있다”고 평가했는데 웃기는 소리다. 그건 센스 있다고 추켜세울 일이 아니라 한국사회가 연예인에게 가해온 집착적인 폭력의 슬픈 결과물이다. 연예인의 옷차림으로 정치색 운운하는 것도 어이없지만, 그가 특정 정당을 지지하면 뭐가 어떤가? 타인의 헌법상 기본권을 마구 짓밟으면서 기쁨의 탭 댄스를 추는 광경이 기괴하다.

연예인에게 ‘정치 표백’을 강요할수록 드러나는 건 우리의 지나친 정치 과몰입뿐이다. 그것도 진지한 의미의 정치가 아니라 스포츠화된 진영 정치에 대한 과몰입이다. 편을 나누고 상대를 한없이 악마화하는 정치 풍토 속에서, ‘내가 싫어하는 정당의 색깔 옷을 입은’ 연예인에게도 분노의 유탄이 튄다. ‘쓸데없는 정치’는 터질 듯 과잉돼 있고, 시민의 삶과 밀접한 ‘중요한 정치’는 부재하거나 너무 멀리 있다.

가장 큰 책임은 적대적 양당제를 고착화한 정치인들에게 있다. 그러나 그것을 개선할지 더 강화할지는 우리의 선택이다. 연예인을 탄압할수록 우리는 스스로를 점점 더 깊은 늪으로 몰아넣게 될 것이다. 저 왕궁 대신 연예인 옷에만 분개하는 건 뭐랄까, 우리를 너무 모래처럼 작게 만드는 일 아닌가. 선거철마다 연예인 SNS를 ‘궁예’(터무니없는 추측이란 뜻의 신조어)할 에너지로 다른 일을 하면 이 사회를 훨씬 아름답게 만들 수 있으리라고 확신한다. 뭘 해야 하냐고? 뭐가 됐든 궁예보다는 나을 것 같다.

<조해람 기자 lenno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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