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슬픈 원주민 학살의 현장 ‘운디드니’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
2025.06.02

1973년 운디드니 점거투쟁에서 원주민들이 사용한 구호가 워싱턴 인디언 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손호철 제공

1973년 운디드니 점거투쟁에서 원주민들이 사용한 구호가 워싱턴 인디언 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손호철 제공

“우리는 오늘부로 역사적인 운디드니(Wounded Knee) 마을이 자랑스러운 오글랄라 수족의 전통을 이어받은 독립국인 ‘오글랄라국’임을 선언한다. 우리는 원주민들과 원하는 사람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할 것이며 국제연합(UN)에 대표단을 파견해 회원국으로 가입할 것이다.”

1973년 3월 8일 무장한 원주민들이 호위하는 미국인디언운동(AIM) 지도부는 주요 TV에 방송된 기자회견에서 충격적인 발표를 했다. 흔히 ‘제2차 운디드니’라고 부르는 역사적인 ‘운디드니 점거투쟁’이 시작된 것이다.

크레이지 호스 기념관으로부터 동남쪽으로 160㎞를 달려가면 운디드니가 나타난다. 미국 역사의 중요한 현장인 운디드니에 도착하자 나는 충격에 빠졌다. 언덕 위에 있는 운디드니 기념 현장에는 진입로도 포장조차 되지 않았고, 제대로 된 기념관이나 기념시설도 전혀 설치돼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주민들이 설치한 것으로 보이는 조야한 붉은 대형 안내판만이 이곳이 역사의 현장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아무리 ‘역사란 승자의 기록’이라고 하지만, 바로 전에 보고 온 리틀 빅혼 기념물의 잘 정리된 주요 시설과 비교해 너무도 대조적이라 나도 모르게 입에서 욕이 터져 나왔다.

운디드니 햑살 현장에서 방문객들을 상대로 공예품을 파는 학살 피해자의 후예 / 손호철 제공

운디드니 햑살 현장에서 방문객들을 상대로 공예품을 파는 학살 피해자의 후예 / 손호철 제공

‘학살범들’의 명예훈장에 광주 5·18 떠올라

AIM이 1973년 투쟁을 위해 운디드니를 택한 데는 이유가 있다. 운디드니는 미국의 원주민 학살을 상징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19세기 말 대평원의 라코타족은 백인들에 영토를 거의 빼앗긴 데다 주식인 들소를 백인들이 몰살하며 식량 부족 등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그러자 한 원주민 지도자가 백인들의 메시아인 예수가 원주민 모습으로 돌아온 환상을 봤다며 ‘유령춤(고스트댄스)’을 추면 백인 침략자들이 사라지고 들소들이 돌아온다고 주장했다. 이 구원론은 들불처럼 번져갔다. 백인들은 이 춤을 보고 놀랐고, 이것이 무장봉기의 전조라고 생각해 라코타족을 무장해제시켜 달라고 기병대에 요구했다.

1890년 12월, 남자 120명, 여자와 어린이 230명 등 라코타족 350명은 기병대의 호위 아래 운디드니 계곡으로 이동했다. 기관총과 포로 무장한 기병대는 이들을 포위한 뒤 무장해제하고 준비된 기차를 타고 새 거주지로 이동하라고 지시했다. 기병대가 라코타족을 무장해제시키는 도중 청각 장애인이었던 블랙 코오테는 기병대의 지시를 못 알아듣고 총을 내놓기를 거부했고, 이를 뺏으려는 기병대와 몸싸움 중 총이 발사됐다.

운디드니 학살 추모비에서 가져간 소주 등으로 간단한 제사를 지냈다. 손호철 제공

운디드니 학살 추모비에서 가져간 소주 등으로 간단한 제사를 지냈다. 손호철 제공

놀란 기병대는 일제히 사격을 시작했다. 총을 내려놓았던 일부 원주민들은 다시 총을 들어 응사했지만, 상대가 되지 않았다. 남자 4명, 여자와 어린이 47명 등 생존자 51명을 뺀 300명의 원주민이 집단학살당했다. 그중 3분의 2는 여자와 어린이였다. 이들은 도망치는 여자와 어린이들을 말을 타고 추적해 죽였다. 충격적인 것은 이 같은 비인도적 학살에도 이들 학살범 19명이 명예훈장을 받았다는 것이다. 광주 5·18 학살범들이 진압의 공으로 훈장을 받은 것과 빼닮았다.

이로부터 83년이 지난 1973년 2월 27일 라코타족의 의식 있는 젊은이들과 AIM 관계자 200여명은 부패한 부족대표를 탄핵하려다 실패하자 이 문제와 미 정부의 원주민정책을 비판하기 위해 무장하고 역사적 장소인 운디드니를 점거했다. 총격전이 벌어져 보안관 한 명이 부상당해 반신불수가 됐고, 원주민 활동가 1명도 사망했다. 정부는 무장한 연방보안관들과 군, 15대의 장갑차 등을 동원해 마을을 봉쇄했다. AIM은 3월 8일 미국이 원주민과 체결한 조약을 이행하지 않는다고 비판하고, 새로운 독립국가 설립을 선언하는 한편 원주민에 대한 공정한 대우를 하는 새로운 조약을 체결하자고 요구했다.

운디드니 학살 추모비 / 손호철 제공

운디드니 학살 추모비 / 손호철 제공

점거가 장기화하자 미국 정부는 전기, 물, 식량 공급을 차단하고 언론인 출입도 금지했다. 하지만 소식을 접한 지지자들이 식량을 보내줬다. 미 국무성 고위관료, 지역 상원의원 등이 방문해 협상을 벌였지만, 합의에 실패했다. 4월 26일 다시 총격전이 벌어져 주민이 연방요원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 부족원로들은 점거를 끝내라고 요구했고, 점령세력과 정부는 1868년 미국 정부와 원주민이 체결한 라마리요새조약을 재논의하는 것을 조건으로 5월 3일 무장해제에 합의했다. 점거투쟁이 71일 만에 끝이 났다.

이 점거투쟁은 원주민 운동에 전환점이 됐다. 1975년 인디언 자기결정과 교육지원법, 1978년 인디언 아동복지법과 인디언 종교자유법 등 원주민의 권리를 강화하는 법이 연이어 제정됐다. 1988년에는 원주민보호구역에 카지노를 허용하는 법이 통과됐다. 1979년 연방대법원은 “미국과 인디언 부족과의 조약은 두 나라 간의 계약으로 미국이 이를 준수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이 문제는 지금도 논쟁이 되고 있다. 2016년 미국은 다코타에 발견된 대규모 유전에서 채취한 기름을 운반하는 파이프라인을 건설하기로 했다. 문제는 이 파이프라인이 원주민보호구역을 통과하게 설계된 것이다. 이는 보호구역의 상수원과 성지를 훼손한다고 원주민들은 강력히 반대하고 있다.

운디드니 학살 추모 묘지 전경 / 손호철 제공

운디드니 학살 추모 묘지 전경 / 손호철 제공

학살 표지판 아래 ‘땅 돌려달라’ 구호의 먹먹함

포장도 되지 않은 언덕 위에 초라한 원주민 공원묘지가 나타났다. 제2차 세계대전에 미군으로 참전했다가 전사해 작은 성조기를 꽂아놓은 원주민들의 무덤 사이로 작은 탑이 보였다. 운디드니 학살 추모탑 앞에 서자 문득 광주 국립5·18민주묘지로 이전하기 전에 5·18 민중항쟁 희생자들이 묻혔던 초라한 망월동 묘역이 생각났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졌다. 가져간 소주와 육포, 햇반을 놓고 백인들의 탐욕과 오만에 의해 억울하게 죽어간 라코타족들을 위해 긴 묵념을 드렸다. 묵념 속에서도 학살 희생자들이 자신의 후예들이 자신들을 학살한 미군에 입대해 목숨을 잃고 자신들의 추모탑 옆에 누워 있고, 추모탑이 자신들을 학살한 기병대가 자랑스럽게 들고 있던 성조기에 둘러싸여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생각할지 마음이 불편했다.

운디드니 학살 추모 묘지 전경 / 손호철 제공

운디드니 학살 추모 묘지 전경 / 손호철 제공

눈물을 말리기 위해 언덕 아래를 내려다보자, ‘운디드니 학살’이라는 표시판 앞에서 조금 전 만난 라코타족 후손 다렐 블랙페더(61)가 한 관광객에서 자판에 전시해 놓은 기념품을 열심히 팔고 있었다. “이제 라코타족은 7만명 정도가 살아남아 100㎢ 정도 되는 보호구역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의 눈에는 슬픔이 가득했다. 운디드니를 떠나려니 학살 표시판 아래쪽에 누군가 써 놓은 구호가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땅을 돌려달라(Land Back)!’

원주민 학살 현장에 설치돼 있는 초라한 안내판 / 손호철 제공

원주민 학살 현장에 설치돼 있는 초라한 안내판 / 손호철 제공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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