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달에 주목할 만한 두 개의 국제 행사가 있었다. 5월 12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미국·중국 양국은 관세부과에 90일의 유예기간을 두기로 합의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이번 회합을 어느 나라가 관세전쟁에서 기선을 제압하는가를 놓고 벌이는 일종의 기싸움이라고 보도했다. 미국 대표단은 중국이 굴복해 들어온 듯이 회합의 배경을 설명했지만, 서방 언론은 대체로 미국이 수세에 있다는 어조의 기사를 내보냈다. 중국 측 언론은 미국을 직접적으로 자극하는 대신 중국이 결코 굴복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보도했다.
5월 9일 모스크바 크렘린 광장에서는 전승절 열병식이 열렸다. 제2차 세계대전 승리 8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였다. 이번 모스크바 전승절에는 구소련 9개국을 비롯해 중국, 브라질, 에티오피아 등 29개국 정상이 참석했다. 열병식에서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나란히 앉아 양국의 우호를 과시했다. 열병식 연설에서 푸틴 대통령은 “나치 독일, 군국주의 일본, 위성국들의 완전한 격멸은 연합국 국가의 공동 노력으로 이루어졌다. 연합군 병사들, 레지스탕스, 용감한 중국 인민의 기여를 높이 평가한다”라고 하면서 중국의 역할을 부각했다. 전승절 행사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참석하지 않았지만, 푸틴 대통령은 열병식 후에 북한대표단과 일일이 악수하면서 각별히 환대했다. 같은 날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주북한 러시아 대사관을 방문해 북·러 동맹 관계를 확인했다.
두 행사는 현재 국제정치 무대에서 진행되고 있는 패권 경쟁의 단면을 보여준다. 잘 알려져 있듯이,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즉시 세계 많은 국가를 대상으로 관세전쟁을 선포했다. 중국에 대해서는 다른 나라의 두 배 이상을 부과했고, 여기에 중국은 맞불을 놓았다. 한편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러시아는 전쟁의 정당성을 어떻게든 확보해야 하는데, 그런 맥락에서 이번 전승절 행사를 대대적으로 치렀다. 행사 전날 중국과 러시아 정상은 ‘포괄적 파트너십과 전략적 상호 관계 심화에 대한 공동성명’에 서명했다. 이 자리에서 시진핑 주석은 “국제정세의 격동에도 불구하고 중국과 러시아는 그 어떤 난관도 극복하고 글로벌 평화와 안보에 더 큰 안정을, 글로벌 발전과 번영에 더 강력한 추진력을 부여할 것이다”라고 언급했다. 다분히 미국을 염두에 둔 발언이었다.
세계 경제 새로운 국면 접어들어
미국과 중국 그리고 러시아가 끼어드는 패권 경쟁은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을 높이고 있다. “제2의 냉전”, “탈세계화의 시작” 등의 말이 언론뿐 아니라 학계에서도 논의의 중심으로 들어오고 있다. 세계화는 정말 종말을 맞고 있는 것인가? 세계화 이후의 세계 경제는 어떤 모습일까? 최근 경제학계의 연구를 보면 세계화의 종말이라기보다는 공급망 무기화, 경제 안보 강화, 관세전쟁 등으로 세계 경제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는 해석이 타당해 보인다.
우선 세계화의 의미를 점검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금융과 상품 교역의 괄목할 만한 확대를 세계화로 지칭한다. 그런데 경제 현상으로서 세계화의 저변에는 국제관계에서 힘의 관계가 작용한다. 패권국은 세계 정치경제 지형을 자국의 이익에 맞춰 재조정하려 한다. 그 방법의 하나가 시장의 확보이고 이는 세계화로 나타났다. 이 사실은 세계화의 흐름과 패권국의 역할을 함께 다룬 최근의 연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소재한 국제경제연구센터(CREI)는 1800년부터 2020년까지 두 세기가 넘는 기간 동안 체결된 세계조약 데이터베이스(Global Treaties Database)를 만들었다. 이 데이터베이스는 약 7만5000건의 국가 간 조약을 수록하고 있다. 두 세기는 영국이 세계 질서를 지배한 19세기부터 제1차 세계대전 이전 시기(팍스 브리타니카)와 미국이 지배한 제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2020년까지 시기(팍스 아메리카나)로 구분된다.
두 시기 모두 패권국이 주도한 금융과 상품교역의 세계화가 대대적으로 추진됐다. 금융 세계화의 정점은 각각 제1차 세계대전 직전인 1914년, 그리고 세계금융위기가 터진 2008년이다. 그 이후에 금융 세계화는 크게 후퇴했다. 상품 세계화도 같은 패턴을 보인다. 특히 주목할 점은 패권국이 교체되는 시기에 세계화는 크게 후퇴했다는 점이다. 두 번의 세계대전이라는 너무나도 비싼 대가를 치렀다.
CREI의 세계조약 데이터베이스는 최근의 놀라운 변화를 보여준다. 미국은 1990년대에 세계 조약 체결에서 확실한 주도권을 쥐었고, 대부분의 국가는 체결된 조약의 수를 기준으로 볼 때 미국과 더욱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불과 20년 만에 이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다. 2010~2020년 기간에 미국은 조약 체결에서 뒤로 물러났고 대신 중국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중국은 특히 현재 ‘글로벌 사우스’라고 불리는 남반구 지역에서 대단히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중국이 역점을 두는 국가들은 대개 중립지대에 있다.
한국, 중립지대와의 결속 다질 필요성
현재 세계 경제는 경제적 결속이라는 측면에서 대략 세 그룹으로 나눌 수 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서방 진영에는 나토 회원국인 유럽, 캐나다, 호주, 일본, 한국, 대만 등이 포함된다. 중국과 러시아를 중심축으로 하는 동방 진영에는 구소련연방이었던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포함되는데 이번 모스크바 전승절에 국가수반이 참석한 다수 국가가 해당한다. 상당히 많은 국가가 중립지대에 있다. 미국과 국경을 함께하는 멕시코를 포함한 대부분의 중남미 국가는 중립지대다.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튀르키예도 그렇다. 대부분의 아세안 회원국도 중립지대로 분류된다.
현재 세계 경제 블록에서 중립지대의 존재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공산권 붕괴까지 지속한 자본주의 대 공산주의 사이의 대립 구도와 다른 점이 바로 중립지대의 존재다. 냉전 시기에 중립지대는 미미했다. 그러나 현재 미·중 패권 경쟁 구도에서 이들의 존재는 극한 대립의 완충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들의 존재감은 결코 작지 않다. 중립지대는 미국 진영과 중국 진영 사이의 갈등·경쟁을 활용해 이익을 차지할 수 있는 전략적 위치에 있다.
최근 이탈리아 중앙은행은 ‘글로벌 가치 사슬의 미래’라는 조사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도 중립지대의 존재에 큰 의미를 뒀다. 미·중 패권 경쟁으로 글로벌 가치 사슬이 더욱 지역적으로 분절되고 있으며, 국제무역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중립국들은 경쟁 진영 사이의 연결자로서 점점 더 큰 역할을 하게 될 것으로 전망했다. 한국은 미·중 두 강대국 사이에서 외교적으로 쉽지 않은 상황에 있다. 중립지대와의 결속을 다지는 것이 이 상황에 대응하는 길의 하나라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