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아폴로 11호에 그녀는 없다

이선옥 숙명여자대학교 기초교양학부 부교수
2025.05.26

은희경 장편소설 <새의 선물>

1995년 출간된 은희경 작가의 <새의 선물>은 가부장제하에서 성장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여성 주체의 곤경을 다루고 있다. 우철훈 선임기자

1995년 출간된 은희경 작가의 <새의 선물>은 가부장제하에서 성장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여성 주체의 곤경을 다루고 있다. 우철훈 선임기자

1990년대 등장한 은희경, 전경린, 신경숙 등 여성 작가들의 글쓰기는 사적 개인의 발견, 일상과 여성성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한다.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시작된 1980년대는 광장에서의 시민권을 위한 투쟁의 과정이었고, 여성 작가들의 글쓰기 역시 운동으로서의 글쓰기가 중심이 됐다. 1987년 체제 이후 우리 사회는 급속한 민주화를 경험했고, 일상과 개인적 자아를 발견하는 새로운 시기에 돌입하게 된다. 그 대표적인 작가가 은희경이다.

199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이중주’가 당선해 등단한 이후 은희경이 발표한 첫 번째 장편이 <새의 선물>(문학동네, 1995)이다. “열두 살 이후 나는 성장할 필요가 없었다”는 주인공 강진희의 도발적인 진술로 시작하는 이 작품은 여성성장소설로 잘 알려져 있다. 오정희의 주인공 소녀(‘중국인 거리’, 1979)가 비체(주변화된 집단)가 돼야 하는 여성의 운명을 직감하고 성장을 거부하는 반성장을 보여주었다면, 페미니즘 논의가 본격화된 이후 여성성장서사는 다양하게 전개된다. 은희경의 주인공 진희는 스스로 조숙함을 선언하고 조기 성장을 해버리고, 전경린의 인물들은 미나리 같은 남성적 기대를 담은 소녀의 이름에서 탈주한다. 신경숙은 자신의 여공 생활을 기억하며 지금은 부재하는 희재 언니 이야기를 통해 글쓰기 주체로 성장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조금씩 다른 경험을 하고 있지만 이들의 공통점은 가부장제하에서 성장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여성 주체의 곤경을 다룬다는 점이다. 1980년대 민족민중문학에서 비가시화된 여성적 경험과 목소리가 서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냉소적 주체로 여성의 성장 불가능성

그중에서도 은희경의 <새의 선물>은 세상이 자신에게 결코 호의적이지 않음을 깨닫고 열두 살에 조기 성장을 선언하는 냉소적 주체로 여성의 성장 불가능성을 말하고 있다. 이렇게 읽어내면 이 작품이 아주 차갑고 어두운 작품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이 작품의 미덕은 외할머니의 집에서 주인공이 훔쳐보는 세상의 디테일함에 있다. 어린아이라는 비껴선 위치 덕에 진희는 어른의 세계를 자세히 관찰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린다. 그 때문에 이 소설은 1960년대의 풍속을 재현하는 세태소설적인 특성을 보여준다. 자신은 스스로를 이지적인 어른아이라고 자부하지만 아이의 시선이 주는 미숙함이 웃음을 짓게 하고, 지나간 시대의 풍경이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이 작품은 읽는 내내 따뜻함과 행복의 냄새를 풍긴다. 물론 그 잠시의 따뜻함도 1970년대와 함께 사라지지만 말이다.

주인공 강진희는 지방 소읍에서 할머니와 삼촌, 이모와 함께 살고 있다. 엄마는 우울증으로 자살하고 아버지는 떠나버렸다. 외갓집에서 성장한 진희는 열두 살, 5학년이 됐다. 태생적인 결핍과 불길함이 그의 운명에 주어졌지만 할머니의 세계는 안전하고 풍요롭다. 할머니의 집은 살림집 두 채와 가겟집 한 채까지 다 합쳐서 세 채의 집으로 돼 있다. 우물을 중심으로 살림집은 장군이네가 세 들어 살고 있고, 한 방에는 최 선생님과 이 선생님이 하숙을 한다. 가겟집은 네 칸 모두 세를 주었는데 뉴스타일양장점과 광진테라양복점, 우리미장원과 문화사진관이 들어 있다. 이 집 구성원들의 비밀을 알고 있는 나는 그로 인해 어른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존재다. 광진테라 아저씨가 바람피우는 현장을 목격했고, 차부에서 우두커니 버스를 떠나보내는 광진테라 아줌마의 슬픔도 알게 된다. 이모를 바라보는 최 선생님의 응큼한 시선도, 삼촌을 유혹하려는 양장점 미스 리의 은밀한 교태도 모두 진희의 시선에 포착된다. 언제나 실험대상으로 만만히 여기는 장군이를 변소에 빠뜨려 똥장군이라는 별명을 듣게 하는 악동 같은 면모도 있다. 그런 나의 최대 관찰대상은 이모다. 나는 이모와 군인 이형렬의 펜팔 연애의 배달부이며 데이트의 증인이다. 나의 첫사랑 허석을 둘러싸고 이모를 마음속으로 질투하기도 한다. 어른들의 연애를 훔쳐보며 나는 이모와 양장점 미스 리가 벌이는 신분 상승 전략을 꿰뚫어보는 혜안을 가지고 있다. 삼촌의 다락방에서 무협지와 통속소설을 읽고 성을 배웠으며, 미용실의 ‘선데이서울’로 섹슈얼리티에 대한 지식을 완성한다. 짝사랑, 첫 키스, 장군이 엄마와 최 선생님의 정사 장면 목격, 이모의 낙태 수술과 마을 유지공장의 화재, 그리고 이모 친구인 경자 이모의 죽음을 경험한다. 그야말로 나의 열두 살은 파란만장하다. 그리고 나는 초경을 시작한다. 어른의 세계로 들어선 것이다.

문학동네 제공

문학동네 제공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은 세상에서 내가 냉정을 유지하는 방법은 나를 두 개의 나로 분리하는 것이다. “내가 내 삶과의 거리를 유지하는 것은 나 자신을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로 분리시키는 데서 시작된다.”(12쪽) 바라보는 나는 나를 관찰의 대상으로 바라보면서 어떤 감정에도 흔들리지 않도록 감시한다. 그렇게 나의 성장은 완성된다.

우주선의 세계에 여성은 없다는 냉정한 자각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돌아온 아버지와 함께 새엄마와 태어날 이복동생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 1970년대의 시작과 함께 나에게도 가정환경조사서에 기재할 수 있는 번듯한 가족이 생긴 것이다. 그러나 나는 “맙소사, 아버지라니, 70년대엔 내게 아버지가 있다니, 이건 대단한 농담이다.”(380쪽)라고 말한다. 60년대엔 나에게 아버지가 없었으니 이건 70년대식 농담이라고 ‘바라보는 나’는 생각한다. 할머니의 자궁가족에서 부계가족으로의 이전은 나에게는 농담일 뿐이다.

왜 농담인가. 정상가족으로의 이전은 버젓한 보통의 아이가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세상의 비밀을 알아버린 나는 정상성의 세계가 결코 나에게 우호적이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부계적 정상성은 나에게 농담일 뿐이다. 여기서 스토리타임인 1969년 1년의 시간과 액자 구성으로 이야기를 감싸고 있는 현재의 디스코스타임이 1995년이라는 사실을 따져봐야 한다. 나는 현재 38세 지방 전문대 교수가 됐다. 잠자리를 함께하는 남자가 있고, 나의 동창생인 그는 이복동생의 첫사랑이자 멘토였다. 열두 살 때의 예견대로 정상성은 그의 삶에서 농담일 뿐이다. 1969년의 아폴로 11호와 수챗구멍과 변소 구덩이를 오가는 회색의 쥐는 현재 내가 바라보고 있는 1995년의 무궁화호와 레스토랑 너머 보이는 회색의 쥐와 동일한 세계를 구성하고 있다. 세상은 변하지 않았고, 나는 우호적이지 않은 세상과 여전히 냉정함을 가장한 채 삶을 유지하고 있다. 우주선으로 상징되는 부계적 허세의 세계가 계속되는 동안 나는 회색의 쥐꼬리 같은 회색의 일과들을 수행하고 있다.

“지금 나는 무궁화호를 보고 있다. 90년대가 되었어도 세상은 내가 열두 살이었던 60년대와 똑같이 흘러간다. 열두 살 이후 나는 성장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무궁화호를 보고 있다. 나는 아폴로 11호를 보고 있다. 나는 쥐를 보고 있다. 수챗구멍과 변소 구덩이를 오가는 쥐의 태연하고 번들번들하고 작은 눈, 긴 꼬리의 유영, 그리고 그 심각하지도 비루하지도 않은 회색의 일과들을.(387쪽)” 이 작품의 마지막 단락은 자신이 회색의 쥐꼬리라는 자각을 보여준다. 우주선의 세계에 여성은 없다는 냉정한 자각이다.

지지부진하고 반복적인 삶이 일상이며, 따라서 진기하고 특별한 ‘사건’들은 일상의 개념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어떠한 ‘사건’들도 일상의 바탕 없이는 일어나지 않는다. 일상은 반복적이며 잘 변하지도 않고, 사소하지만 이처럼 심오한 문제도 없다. 마페졸리의 분석처럼 일상은 사람들의 적나라한 삶이 진행되는 생존과 존속의 메커니즘이기 때문이다. 구질구질하고 지지부진한 일상의 견고함은 이념적 치열함과는 거리가 멀다. 먹고살기와 성과 사랑, 가족과 결혼의 현실은 여성의 삶을 구성하고 있고, 그러한 여성의 운명이 변하지 않을 것임을 예감한 어린 소녀는 스스로 조기 성숙을 선언하게 되는 것이다. 낭만적 사랑의 신화를 벗겨내고 여성성이라 믿었던 순정함을 뒤집어놓음으로써 은희경은 가부장적 여성성의 운명을 거부한다. <새의 선물>의 진희는 가부장제가 덧씌운 여성의 운명을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 냉소와 위악을 장착한 순정한 인물이다.

“이곳은 얼마나 추악한가…… 그림자가 드리워진 빈은 온통 잿빛이고, 일상은 기계적으로 반복될 뿐이다.” 에곤 실레의 ‘안톤 페슈카에게 보내는 편지’(1910)로 이 글을 마무리하며, 그의 ‘초록색 스타킹을 신고 누워 있는 여인’을 떠올린다. 1900년대 초 빈의 모더니스트 실레가 사창가의 흘러넘치는 성과 상류계층의 위선과 개인들의 욕망을 도시의 일상으로 그려냈다면, 은희경은 ‘익명의 성기’와 섹스를 하거나, 늘 향상심에 시달리지만 마이너리그일 수밖에 없는 우리 시대의 일상을 그려내고 있다.

<이선옥 숙명여자대학교 기초교양학부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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