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재집권 후 이스라엘 강경파에 힘 실려…재점령 작전 승인
인종 청소 밝히기도…가디언 “트럼프가 이스라엘 최악 방향 충동”
이스라엘이 자국의 불법적인 영토 확장을 묵인해온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재집권을 틈타 팔레스타인 점령을 확대하며 영토 야욕을 노골화하고 있다. 트럼프 정부의 지원 속에 요르단강 서안지구에서 유대인 정착촌을 확장하며 ‘땅따먹기’에 속도를 내는가 하면, 급기야는 국제사회에서 사실상 ‘레드라인’으로 여겨졌던 가자지구 점령 계획까지 승인했다. 한때 ‘극우의 망상’ 정도로 취급됐던 가자 재점령을 공식화하며 전쟁을 확대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중동 순방을 열흘가량 앞둔 지난 5월 4일(현지시간) 이스라엘 내각은 가자지구에서 군사작전을 확대하고 이곳을 점령하는 계획을 담은 ‘기드온의 전차’ 작전을 만장일치로 승인했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내각 의결 뒤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한 가지는 분명하다. (이스라엘군이) 가자지구에 들어갔다가 철수하지는 않을 것”이라며 점령을 공식화했다.
영토 분할·고립 작전, ‘재점령’ 포석이었나
이스라엘이 두 달간의 휴전을 깨고 지난 3월 19일 가자지구에서 전쟁을 재개한 후 이스라엘군의 동향은 심상치 않았다. 이스라엘군은 가자지구에 새 경계선을 그어 영토를 분할하고 일부 지역을 고립시키는 작전에 착수했다.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를 소탕하기 위해 여러 지역을 반복적으로 공격한 뒤 철수하는 ‘치고 빠지는’ 작전과는 여러모로 다른 양상의 군사작전이었다.
네타냐후 총리도 4월 2일 “우리는 오늘 밤 가자지구에서 전략을 변경할 것”이라며 이른바 ‘모라그 루트’를 점령하겠다고 발표했다. 모라그는 가자지구 남부 최대 도시인 칸유니스와 최남단 도시 라파 사이에 존재했던 옛 유대인 정착촌의 이름으로, 이 일대에 새로운 ‘안보 회랑’을 그어 남부지역 두 도시를 분리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이는 가자 전체 영토의 5분의 1에 달하는 라파를 ‘안보 완충지대’로 조성한다는 명분으로 사실상 고립시킨다는 구상으로, 가자 점령을 본격화하겠다는 의도로 해석됐다.
이스라엘군은 2023년 10월 전쟁이 시작된 후 가자 외곽지역을 점령해 주민들을 몰아낸 뒤 안보 완충지대를 조성했고, 이런 완충지대를 점차 확대해왔다. 가자를 외부와 완전히 단절시켜 고립된 섬으로 만드는 전략이었다.
유엔은 현재 가자 전체 영토의 70%가 작전 구역이나 완충지대로 지정돼 주민 소개령이 내려졌다고 파악하고 있다. 한국의 강화도 크기와 비슷한 365㎢ 면적에 220만명 넘게 살고 있어 가뜩이나 세계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지역 중 하나인 가자 주민들을 점점 더 비좁은 땅으로 내몰고 있는 것이다.
트럼프 정부 출범 후 이스라엘 극우 인사들 중심으로 심심치 않게 흘러나왔던 ‘가자 재점령’ 주장은 결국 이스라엘 내각이 점령 작전을 승인하는 것으로 공식화됐다.
이는 국제사회가 요구해온 팔레스타인 주권국가 수립 가능성을 완전히 차단하는 것은 물론, 전쟁이 끝난 뒤 가자지구 전후 통치는 팔레스타인인들에게 맡겨야 한다는 암묵적인 합의 역시 부인하는 것이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해법으로 여겨온 ‘두 국가 해법’과도 정면으로 배치된다.
이스라엘이 한때 극우 세력의 ‘숙원’이자 ‘망상’ 정도로 취급됐던 가자 점령 계획에 본격 착수한 것에는 트럼프 미국 정부 출범이 큰 영향을 미쳤다. 전임 조 바이든 정부는 이스라엘의 가자 점령을 단호하게 반대해왔고, 네타냐후 역시 지난해 1월까지만 해도 바이든 당시 대통령의 압박에 “가자지구를 재점령하거나 민간인을 이주시킬 뜻이 없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트럼프 재집권 후 이스라엘 극우 세력에 힘이 실리면서 기류가 달라졌다.
이는 이스라엘이 유대인 정착촌을 조성해 자국민을 집단 이주시키는 방식으로 점령을 확대해온 서안지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스라엘은 트럼프 정부 출범 뒤 서안지구에서 군사작전을 강화하고 국제사회가 ‘불법’으로 규정한 서안지구 내 유대인 정착촌 건설을 무더기 승인하는 등 점령 확대에 나섰다.
트럼프는 집권 1기 당시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정해 미 대사관을 이전하는 한편, 이스라엘이 불법 점령 중인 시리아 영토 골란고원에 대한 이스라엘 주권을 인정하는 등 이스라엘의 불법적인 영토 확장을 지지해왔다. 아울러 전임 미 행정부와 유엔 등 국제사회 결의를 뒤집고 서안지구 내 유대인 정착촌이 “불법이 아니다”라며 이스라엘 편을 들어줬다.
‘트럼프 가자 구상’ 발표 후 폭주하는 이스라엘
지난 2월 트럼프 대통령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가자지구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을 영구적으로 이주시키고 이곳을 휴양지로 개발하겠다는 구상을 발표하며 국제사회에 충격파를 던졌다.
전쟁 중인 가자지구에서 특정 민족을 강제 이주시키는 것은 국제법상 인종 청소에 해당한다는 비판이 거셌으나, 이후에도 미국과 이스라엘 관리들이 수단과 소말리아 등을 가자 주민들의 ‘새로운 정착지’로 물색하고 있다는 얘기가 지속적으로 흘러나왔다. 이스라엘 내각은 주민 이주를 추진하는 전담 부서를 만드는 등 이른바 ‘트럼프 구상’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인종 청소 논란으로 공론화되기 어려웠던 극단적인 구상이 트럼프의 발표 이후 속속 구체화하며 이스라엘 정부가 이를 공식화하는 단계로까지 나아간 셈이다. 영국 가디언은 이를 두고 “트럼프의 무책임한 외교가 이스라엘을 최악의 방향으로 충동하고 있다”고 논평했다.
이스라엘 내각의 대표적인 극우 인사인 베잘렐 스모트리히 재무장관은 내각의 작전 승인 다음 날 “가자지구는 완전히 파괴될 것”이고, “(팔레스타인 주민) 대다수가 제3국으로 이주할 것”이라며 인종 청소 계획을 거침없이 밝혔다.
국제사회의 거센 비판에도 네타냐후가 가자 점령 계획을 밀어붙인 것에는 내부 강경파를 달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정치적 셈법이 작용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각종 부패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네타냐후 총리는 이번 전쟁 국면 내내 휴전할 경우 연립정부에서 탈퇴해 정권을 붕괴시키겠다는 극우 연정 파트너들의 압박을 받아왔다. 극우 정당의 연정 탈퇴로 정권이 붕괴하면 하마스 공격을 방어하지 못한 안보 실패 책임은 물론 개인 비리 혐의로 그의 정치 생명이 끝날 수 있다. 네타냐후가 자신의 정치적 생존을 위해 전쟁을 이용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