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 19일 서울 성북구 동덕여대 캠퍼스를 찾았다. 학교 측의 남녀공학 전환 추진에 반대하며 투쟁하는 학생들을 취재하기 위해서였다. 본관 건물 1층 유리문은 대자보 등으로 가려져 있었다. 틈새로 안쪽을 들여다보니 십수명의 학생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학생들의 말을 많이 들을 수는 없었다. 이들이 취재를 거절했다. 캠퍼스를 오가던 학생들도 인터뷰를 주저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는 반여성주의 단체와 유튜버, 일부 언론과 정치인이 학생들을 폭도로 규정하고 비판·비난을 쏟아내던 상황이었다.
지난 4월 1일 비로소 학생 두 명을 인터뷰할 수 있었다. 투쟁의 기억을 되짚는 학생들 말에선 울분이 느껴졌다. 학생들은 그간 수차례 학교에 요구사항을 말했지만,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했다. 래커 시위는 최후의 수단이었고, 그 선택에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다만 사회가 자신들을 지지, 보호하지 않고 도리어 잘못된 정보로 공격하는 것엔 상처를 입었다고 했다. 계엄 후 광장에서 시민들과의 연대로 ‘봄이 왔다’고 했지만, 학생들은 여전히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학교 측이 학생들을 대거 법적 조치를 했기 때문이다.
학생들의 말을 듣고자 한 이유는 동덕여대 투쟁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을까 싶어서였다. 이 투쟁엔 여러 복잡한 쟁점이 뒤섞여 있다. 여성교육기관으로서의 여자대학이 필요한지, 무엇을 폭력시위로 볼 것인지, 정치와 언론이 투쟁을 다루는 방식은 적절했는지, 대학과 학생은 어떤 관계와 구조 속에 놓여 있는지 등이다. 1980~1990년대 민주화 투쟁과 학생운동이 활발했지만, 시위의 폭력성이 사회문제로 부각되진 않았다. 2000년대 등록금 투쟁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사이 입시·취업 경쟁은 심해졌고, 대학에서 학생들의 목소리와 주도권은 점점 낮아졌다. 대학 서열화, 학령인구 감소와 함께 대학은 구조조정 위기에 놓였다.
사회운동을 연구해온 임미리 사회학 박사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폭력도 하나의 언어”라며 “말을 할 수 없는 사람들, 주로 도시 하층민이 폭력으로 자신을 표출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는 또 이런 말도 했다. “지금 대학생들의 힘이 약한 것은 스스로의 책임도 없지 않겠지만, 386세대에 더 큰 책임이 있다.” 동덕여대 투쟁은 비단 동덕여대 학생들만의 사안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혜리 기자 lhr@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