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밤> 연출은 카메라를 들고 시나리오대로 화면을 찍었다는 것 이상의 다른 의미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무미건조하다. 영화 전반의 기본 요소가 함량 미달이다 보니 다른 요소가 눈에 들어올 리 만무하다.
제목: 거룩한 밤: 데몬 헌터스
제작연도: 2025
제작국: 한국
상영시간: 92분
장르: 액션, 코미디
감독: 임대희
출연: 마동석, 서현, 이다윗, 경수진, 정지소
개봉: 2025년 4월 30일
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거룩한 밤: 데몬 헌터스>(이하 <거룩한 밤>)는 어느 정도 기대를 불러일으킬 만도 했다. 근래 한국 상업영화 사상 가장 큰 성과로 기록된 <범죄도시> 시리즈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마동석의 주먹 액션과 <파묘>의 성공으로 기세를 확장하고 있는 ‘오컬트’ 장르가 결합했다고 하니 표면적으로 어찌 흥미롭지 않겠는가.
악마를 숭배하는 집단의 폭력이 사회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시대가 도래하고, 이들의 광기가 극에 달하자 공권력마저 역부족이 돼버린다. 이때 경찰조차 도움을 요청하는 해결사 3인방이 있었으니 그들이 내건 사무실의 간판은 ‘거룩한 밤’이다. 겉모습은 영락없는 흥신소지만 이들이 처리하는 사건이나 일하는 사람들의 면모는 범상치 않다.
일단 이곳을 운영하는 책임자인 사장 바우(마동석 분)는 거구에 단순무식하며 초인적 힘을 자랑한다. 정체 모를 신기를 가진 미모의 여성 샤론(서현 분)은 구마 의식 전문가이고, 가장 나이가 어리고 컴퓨터에 능한 김군(이다윗 분)은 정보 수집부터 허드렛일까지 팀 업무 전반을 보조한다.
어느 날, 신경정신과 의사 정원(경수진 분)이 그들의 사무실에 찾아와 악마에게 빙의된 여동생 은서(정지소 분)를 구해달라고 애원한다. 바우는 정원의 의뢰가 과거 자신의 아픈 과거와 엮인 사실을 알고 거절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사건이 단순한 빙의가 아님을 알게 되면서 결국 동료들과 함께 사건에 뛰어든다.
넓고 얕고 산만한 오락영화
제작자이기도 한 마동석과 임대희 감독은 자신들이 가진 역량을 총동원하고 공유하며 <거룩한 밤>의 세계를 구축했다고 한다. 이들은 함께 수많은 작품을 교본 삼아 분석해서 가져다 재배열하고 비틀어 색다르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려 노력했단다.
예로 극 중 전면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뿐 아니라 주변인들까지 꼼꼼한 전사(前史)를 만들었지만, 영화 속에 이를 다 담아내지 못했다며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이 먼저 고심했어야 하는 것은 주변에 흩뿌릴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기본이 되는 중심 플롯(Plot·이야기를 구성하는 일련의 사건 또는 사건의 논리적인 패턴과 배치)이 아니었나 싶다.
영화의 다양한 단점 중 하나가 수시로 화면 위에 펼쳐지는 주석 자막이다. 주석의 활용은 일반인들이 쉽게 접할 수 없는 분야의 정보를 전하는 목적이 크지만, 더불어 부지불식간 관객들에게 눈 앞에 펼쳐지는 상황을 현실처럼 받아들이게 유도하는 역할도 기대할 수 있다.
최근 한국 영화 중 <검은 사제들>과 속편 <검은 수녀들>이 비슷한 경우로 오프닝 크레딧에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빙의나 구마 의식과 관련해 등장하는 단어 설명을 나열했다.
<거룩한 밤>은 오프닝 크레딧은 물론이거니와 상영 내내 수시로 주석을 노출한다. 전개를 이해하는 데 큰 지장이 없을 것 같은 용어까지도 설명하는 자막이 빈번하고, 심지어 반복되다 보니 그나마 헐겁게 이어지던 플롯마저 맥이 끊긴다.
아쉬움 가득한 신인 감독의 데뷔작
기시감 가득한 시나리오도 문제지만, 치명적인 연출이 영화를 더욱 평면적으로 만든다. 모름지기 ‘연출’이라는 지위에 부여하는 기대와 책임은 넓다. 이야기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끝까지 밀고 가는 믿음과 뚝심, 최대한 남다른 화면을 구성해내는 시선과 미적 감각, 배우들의 재능을 최상으로 끌어내는 소통과 통솔력 등은 연출이라는 재능의 작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유감스럽게도 <거룩한 밤> 연출은 카메라를 들고 시나리오대로 화면을 찍었다는 것 이상의 다른 의미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무미건조하다.
영화 전반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요소가 함량 미달이다 보니 다른 요소가 눈에 들어올 리 만무하다. 관객들을 극장으로 유도하기 위해 특별히 심혈을 기울였다는 음향효과나 각자의 위치에서 열심히 개인기를 펼쳤을 배우들의 노력도 큰 의미가 없다.
영화를 보는 내내 소위 악마 추종자들로 등장하는 인간들에게 간간이 주먹질을 해대는 마동석을 보며 ‘이제 악마까지 때려잡는다’는 포스터 카피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이건 과장 광고 아닌가? 놀랍게도 영화가 끝나가기 직전 그 진위가 드러난다. 적어도 거짓 과장 광고는 아니었다.
독이 되고 약도 되는 ‘클리셰’의 신비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라는 말처럼 현대 영화의 대부분은 기본적으로 ‘레퍼런스’(Reference·참고하거나 영향을 받은 다른 창작물)를 기반으로 만들어진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공한 작품들은 새로운 이야기의 창조에 절실한 나침반이 된다.
영화 <거룩한 밤>은 앞서 나온 수많은 관련 영화를 기획부터 참고했음을 유난히 대놓고 실토하고 있다. 그 솔직함을 칭찬하기에는 결과물에 더해졌어야 할 필수적인 창의성과 능동성이 한참 부족하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판에 박은 듯’ 비슷한 영화를 목격하게 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상업 영화의 경우 빈도가 높은데, 이는 성공작들의 전례를 최대한 수용해 실패를 최소화하려는 당연한 계산과 욕심에서 비롯된다. 이야기 전체부터 인물의 성격과 관계, 특정 장면까지 관객들이 좋아했던 요소를 최대한 가져와 활용하다 보니 시작을 보면 바로 끝이 보이는 비슷한 작품이 넘쳐난다.
이처럼 진부하고 상투적인 ‘표현’이나 ‘개념’, ‘생각’을 지칭해 ‘클리셰(Cliché)’라고 한다.
비슷한 말로 ‘컨벤션(Convention)’이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관습화돼 반복되는 ‘설정’을 뜻하는 말로 클리셰보다는 구체적인 요소를 언급하는 좁은 개념으로 이해하면 된다.
이렇게 뻔하고, 반영의 경중에 따라 ‘표절’ 혐의를 받을 수도 있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왜 이런 상투적 창작방식은 반복되는 것일까?
관객들이 반복해 보면서도 익숙하게 수용한다는 의미는 그들이 좋아하는 것, 더 나아가 원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위 관객의 요구(Needs)를 충족시키기 위한 ‘필수’ 조건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창작자에겐 불가피한 양날의 검이다.
<최원균 무비가이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