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아세안 지역 시민들에게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이상적인 국가다. 195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했고, 아세안 여러 국가로부터 원조를 받는 최빈국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한국은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이자 세계 곳곳에 방산 무기를 수출하는 군사 강국이다. 또 전 세계인이 음악, 드라마, 소설, 웹툰에 음식과 화장품까지 즐기게 만든 문화 강국이 됐다.
한국의 창의적인 콘텐츠와 라이프 스타일에 매료됐던 아세안 인들은 불법적인 계엄령에 성숙한 시민의식으로 대처한 한국적인 민주주의에 또다시 감탄했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불법 계엄을 단 3시간도 안 돼 막아낸 국회. 4개월간 질서정연하면서도 합법적인 방식으로 대통령 탄핵까지 이끌어낸 시민들. 대통령 탄핵 집회 현장에는 흥겨운 K팝이 흘러나오고 누군가 이미 결제해둔 따뜻한 음료와 음식을 누구나 먹을 수 있었다. 집회 참가자들이 매서운 겨울바람을 이겨낼 수 있게 난방버스가 대기하는 모습은 영화에서도 볼 수 없었던 초현실적인 장면이었다.
폭력과 혼란 대신 한국식 민주주의의 성숙함을 보여주자 아세안 시민들은 ‘우리도 한국처럼 되고 싶다’라는 꿈을 갖게 됐다. 아세안 시민들의 바람 속에 ‘실현 가능성’이 깃들어 있는 이유는 70년 전만 하더라도 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국은 아세안 여느 국가보다 가진 것이 없는 나라였기 때문이다. 그런 한국이었기에 아세안 시민들에게는 닮고 싶고 자신들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생겨난 것이다.
매력 국가 대한민국
1990년 조지프 나이 미국 하버드대학 교수는 ‘다른 국가를 강압하지 않고 매력과 설득을 통해 전하는 힘’을 소프트 파워라고 규정했다. 이 소프트 파워 이론이 한국에 유입되면서 국내 학자들은 ‘매력 국가(Attractive State)’라는 확장된 개념을 만들어냈다. ‘군사력이나 경제력으로 강요하거나 압박하지 않았음에도 다른 국가가 자발적으로 모방하고 따르고 싶게 만드는 나라’를 지칭한다.
아세안 국가들이 닮고 싶어하는 한국이 바로 이 매력 국가의 전형적인 사례다. 아세안은 자신들에게 경제적으로 압박하거나 군사적 동맹을 요구하는 미국이나 중국에 휘둘리지 않고 싶어한다. 아세안의 설립 취지 자체가 비동맹주의이고, 강대국들로부터 균형 전략을 추진하는 것이다. 자신들만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추구하는 아세안을 지지해주고 정치, 경제, 문화 전방위적으로 협력 발전해갈 수 있는 나라가 한국이다. 한국은 미국의 군사 동맹국이면서도 중국을 최대 경제 교역국으로 두고 있기에 아세안을 상대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중간자 역할을 할 수 있다.
새 정부 신남방정책 2.0을 실시해야
2025년 6월 3일 대통령선거가 끝나자마자 들어설 대한민국의 새 정부는 신남방정책 2.0을 곧바로 실시해야 한다. 2017년 11월 문재인 정부는 인도를 포함한 아세안 10개국과의 관계를 한반도 주변 4강인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신남방정책을 선언했다. 2019년 부산에서 한·아세안 특별 정상회담을 개최했고, 그동안 장관급 회담이었던 한·메콩 회담(베트남·태국·미얀마·라오스·캄보디아 5개국)을 정상급 회담으로 끌어 올렸다.
신남방정책을 바탕으로 한·아세안 무역 규모와 인적 교류는 획기적으로 증가했고, 아세안은 한국의 제2 교역 대상으로 부상했다. 문재인 정부의 신남방정책 1.0은 교역 확대, 인적 교류, 개발 협력 등 다양한 측면에서 성과를 거두었지만, 경제 협력에 치중했던 한계가 있었다. 각 아세안 국가들에 대한 이해 부족도 있었고, 단기적인 성과 중심으로 대응했던 아쉬움도 있었다. 신남방정책 2.0은 기존 경제 협력의 바탕에 문화와 가치, 제도와 정책을 공유하는 ‘매력 국가 대한민국’의 확장판이 돼야 한다.
아세안 국가들은 정치 발전과 경제 성장, 사회 안정을 동시에 달성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 하지만 미·중 싸움에 아세안 내부가 갈리기도 하고 민족, 종교에 따른 사회 불안정으로 발전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러한 아세안에 한국은 조언자이자 갈등의 중재자 역할을 할 수 있다. 한국 역시 남북 분단과 전쟁이라는 참혹한 내부 상처를 안고 있었다. 하지만 국가 사회 전체가 배움에 대한 열망을 멈추지 않았고, 높은 교육열로 양성된 인재들이 경제 성장을 이끌었다. 정치 공작으로 조장된 지역 갈등은 지방자치제 부활을 통한 지방 분권을 확대하고 공공기관의 지역 이전을 통해 균형 발전을 추구하는 방식으로 치유했다. 영토가 분단된 채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라는 세계 4대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으며 선진국이 된 한국의 외교 전략도 아세안에 공유할 수 있다.
아세안 국가들은 시민들의 힘으로 군사독재를 극복하고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진입한 한국의 특별한 경험도 이식받고 싶어한다. 최근 이상고온과 심각한 가뭄으로 농작물 생산량이 줄어들어 식량안보에 위협을 받고 있는 아세안 국가들은 한국의 선진적인 농업기술 지원을 당장 필요로 한다. 이외에도 한국의 디지털 전자정부, 첨단 의료시스템, 보편적 교육 체계 등은 아세안 국가들이 배우고 싶은 한국의 시스템이다. 신남방정책 2.0은 이러한 것들을 망라하며 아세안 국가들을 지원하고 협력해야 한다.
노파심에 한 마디 더 보탠다면, 좋은 취지의 신남방정책 2.0일지라도 한국의 일방통행식 전달이 돼서는 안 된다. 경제적으로 한국보다 규모가 작은 나라들이라고 해서 문화와 역사를 무시하고 한국의 방식만이 최선의 방식이라고 강요해서는 안 된다.
<호찌민 | 유영국 <베트남 라이징>·<왜 베트남 시장인가>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