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관계에서 배운다

강원국 작가
2025.04.28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신영복 선생은 평생 ‘학생’이었다. 부산상고와 서울대 경제학과, 동 대학원을 졸업하기까지 25년, 감옥에서 20년, 성공회대 교수로 25년간 학교에 다녔다. 부친이 초등학교 교사여서 어린 시절을 학교 관사에서 살았고, 스스로 ‘인간학 교실’이라고 말하는 교도소에서 젊은 시절을 보낸 후, 성공회대 교수를 끝으로 2016년 삶을 마감했다.

선생은 자신이 평생 배우는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특히 교도소에서 누구도 경험할 수 없는 값진 배움을 얻었다고 한다.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피를 팔았습니다. 피를 조금이라도 더 팔기 위해 물을 많이 마셨습니다. 소를 팔기 전에 물을 많이 먹이는 것처럼요. 그럴 때마다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양심에 찔렸습니다. 물을 많이 마셔 잔뜩 묽어진 피를 수혈받은 사람에게 정말 죄송했습니다.”

교도소에서 만난 청년의 양심고백을 들으며 신영복 선생은 얼마만큼 배워야 이 청년 같은 양심을 지닐 수 있겠는가. 이 젊은이를 보면서 소위 배웠다는 자신이 얼마나 양심을 속이며 살아왔는지 반성했다고 했다.

그곳에서 선생은 늙은 목수도 만났다. 그는 집을 그릴 때 주춧돌을 먼저 놓고 기둥을 세운 후, 마지막에 지붕을 얹었다. 그런데 신영복 선생은 평생 지붕부터 그렸다. 지붕을 먼저 지을 수 있는 집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데 말이다. 손발로 집을 지어본 적이 없는, 그저 머리로만 평생을 살아온 자신이 부끄러웠다.

보고 배우는 것은 두 갈래다. 본받거나 본뜨거나. 이런 배움은 관계 속에서 가능하다. 나는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마다 그에게서 한 가지를 본받으려고 한다. 지금까지 만난, 그 누구도 그 하나가 없는 사람은 없었다. 또한 모든 사람은 본뜨고 싶은 것도 갖고 있다. 본받기가 그 사람처럼 되고 싶은 ‘지향’에 해당한다면, 본뜨기는 그 사람같이 하고 싶은 ‘지침’ 같은 것이다. 나는 누군가의 생활이나 행동 따위를 흉내 내는 것으로 배운다. 예를 들어 누구처럼 글을 쓰고 싶으면 그의 글을 반복해서 읽었다. 이를 통해 그를 본받고 그의 글솜씨를 본떴다.

라디오 인터뷰 진행하며 출연자들에게 배워

라디오 인터뷰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출연한 분들에게 배운 게 많다. 무엇보다 인생이 생각보다 길다는 사실을 배웠다. 삶은 질기다. 금세 끝날 것 같지만 쉽게 끝나지 않는다. 인생에서 늦은 때는 없다. 나는 신영복 선생이 감옥을 나왔다는 뉴스를 접하고, 그의 책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읽으면서 이분은 얼마나 억울하고 분할까 생각했다. 아무런 죄도 없이 감옥에서 청춘을 통째로 보냈으니 말이다. 그런데 나중에 지켜보니 감옥에서 나온 그 시점이 그분 인생의 출발점이었다. 그때부터 그분 삶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었다. 다 끝났다고 생각한 때가 시작이었던 것이다.

인터뷰 프로그램을 하면서 눈을 뜬 또 하나는, 위기는 언제든 닥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위기를 얼마나 지혜롭게 넘기느냐에 따라 인생의 성패가 판가름 난다. 누구에게나 시련과 고난의 때가 오는데, 진짜 위험에 빠지느냐, 아니면 전화위복의 기회가 되느냐는 전적으로 위기를 대하는 자세와 생각에 달렸다. 극복하지 못할 위기는 없다. 반드시 벗어날 길이 있다. 지금 위기라면 아직 벗어날 길을 못 찾고 있을 뿐이다.

내가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은 네 가지다.

첫째, 초기화 또는 재설정이다. TV나 컴퓨터가 고장 났을 때 전원을 껐다가 다시 켜듯, 실패나 낭패를 당했을 때 리셋하는 것이다. 글을 쓸 때도 마구 엉켜서 진도가 나가지 않는 경우가 있다. 어떻게든 고쳐보려고 애쓰지만, 돌파구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나는 이때 다시 쓴다. 그것이 오히려 빠른 길이다. 아파트를 리모델링하는 것보다 아예 재건축하는 게 나은 것처럼.

둘째, 국면 전환이다. 오던 길을 계속 가는 게 아니라 방향을 바꾸거나 다른 일을 시도하는 것이다. 나는 글을 쓰다가 막히면 그걸 뚫고 가려고 안간힘을 쓰지 않는다. 그때는 다른 일을 한다. 그러다 다시 글쓰기로 돌아오면 의외로 막혔던 부분이 시원하게 뚫리기도 한다. 정면승부만이 능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회하는 것도 방법이다.

셋째, 초심으로 돌아간다. 길을 잃었을 때는 처음 출발한 지점으로 되돌아가야 하듯 신영복 선생이 늘 얘기했듯이 ‘처음처럼’ 초심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미숙했지만 설렜던 처음이 있다. 새해 첫날, 첫 등교, 첫사랑, 첫 출근, 신혼의 첫 출발. 그때를 생각하면 나는 늘 힘이 샘솟고 희망이 보인다.

넷째, 함께하는 것이다. 나와 같은 어려움을 이미 겪은 사람을 찾아가 조언을 구하고, 나보다 더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을 보며 용기를 얻고, 나를 도와줄 사람에게 손길을 내미는 것이다. 더 이상은 어찌해볼 수 없다는 생각이 들 때, 누군가 내밀어준 손길이 다시 살아볼 용기를 준다. ‘나 혼자가 아니다’라는 느낌이 삶을 지속하게 하는 희망이 된다.

가장 먼 여행은 머리에서 손발로 가는 여정

신영복 선생은 세상에서 가장 먼 여행이 머리에서 가슴을 거쳐 손발로 가는 여정이라고 했다. ‘머리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고, 마음 좋은 것이 손 좋은 것만 못하고, 손 좋은 것이 발 좋은 것만 못하다.’ 관찰보다는 애정이, 애정보다는 실천이, 실천보다는 관계가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사람에게 배우려 할 때 걸림돌이 셋 있다. 그 하나는 싫어하는 사람에게 배워야 하는 경우다.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 배우는 건 힘들다. 하지만 아무리 싫은 사람도 그 사람을 알려고 노력하면 충분히 알 수 있고, 알면 이해가 된다. 모르기 때문에 이해되지 않고, 그래서 싫은 것이다. 싫어하는 사람도 알게 되면 얼마든지 배울 수 있다.

또 하나 걸림은 도저히 본받거나 본뜨기 어려울 만큼 수준 높은 사람을 만나는 경우다.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저 사람처럼 될 수 없어’라는 생각이 든다. 내 경험으로는 이 또한 문제가 안 된다. 처음부터 그렇게 ‘넘사벽’인 사람은 없다. 또한 제아무리 출중한 사람도 알고 보면 다른 사람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나는 이 사실을 살아오면서 깨달았다. 내가 보기에 뛰어난 사람도 처음은 미미했고, 누구나 노력하면 ‘그 사람’처럼 될 수 있다. 이 세상에 넘지 못할 벽은 없다.

세 번째 걸림돌은 관계하면서 느끼는 감정이다. 그 감정은 열등감 아니면 우월감, 그리고 시기심이다. 물론 이런 감정이 실리가 전혀 없는 건 아니다. 열등감은 겸손하게 하고, 시기와 질투심은 분투하게 한다. 아무런 실속도 없는 게 우월감이다. 우월감은 사람을 나태하게 한다. 그래서 배움에 소홀하고 발전이 없다. 사람에게서 배우는 걸 방해한다. 나는 잘난 사람에 대한 콤플렉스가 심한 편이지만, 늘 그들에게 배운다. 배움을 통해 그들처럼 되는 걸 꿈꾼다.

<강원국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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