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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4.21

지난 4월 4일 서울 용산구 한남동 대통령 관저 인근에서 열린 탄핵 반대 집회에서 한 참가자가 윤석열 전 대통령의 사진을 새긴 옷을 입은 채 헌법재판소 선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성동훈 기자

지난 4월 4일 서울 용산구 한남동 대통령 관저 인근에서 열린 탄핵 반대 집회에서 한 참가자가 윤석열 전 대통령의 사진을 새긴 옷을 입은 채 헌법재판소 선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성동훈 기자

4월 4일 금요일은 아주 바쁜 날이었다. 그다음 주 월요일 이사를 앞두고 맞은 마지막 평일이었다. 인터넷 장비나 정수기를 해체하는 등 집안 곳곳 물건의 이동을 준비하는 약속이 줄줄이 잡혀 있었다. 거실에 앉아 노트북을 두드리다 초인종을 누르는 노동자들에게 문을 열어주고, 인사하고, 다시 일하고, 서명하고, 배웅하기를 반복했다.

오전 9시 30분에 도착한 이의 역할은 매트리스 청소였다. 큰 체격의 남성이 그날 만난 이중 가장 많은 짐을 들고 등장했다. 쌀쌀한 날씨인데도 반소매 차림이었다. 일에 대한 열정과 책임감이 강한 사람일 거라고 추측했다. 그는 짧은 설명을 마친 뒤, 크고 화려한 청소기를 들고 침실로 들어갔다.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청소는 예상보다 길어졌다. 그가 세제를 묻힌 솔로 매트리스 위 얼룩을 꼼꼼히 지우고 있을 때 오전 11시가 됐다. 헤드폰을 꼈다. “지금부터 2024헌나8 대통령 윤석열 탄핵사건에 대한 선고를 시작하겠습니다”라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10분쯤 흘렀을까. 아직 ‘주문’이 읽히진 않았으나 탄핵심판이 인용되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방 안의 남성이 나 때문에 이 중요한 뉴스를 실시간으로 보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문득 미안해졌다. 헤드폰을 벗고 같이 보자고 제안할까 고민하다 걱정이 스쳤다. 만약 그가 탄핵을 반대하는 사람이어서 선고를 보고 분노하면 어떡하지, 돌변해 커다란 청소기나 단단한 솔로 나를 내려치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이었다. 탄핵 관련 현장에 가는 기자들에게 회사가 ‘안전을 위해’ 태극기, 성조기 깃발들을 지급할 정도로 긴장이 팽팽한 날이었다.

계엄부터 탄핵까지 내 모습을 돌이켜 봤다. 정치는 정치, 내 생활은 내 생활이라고 여기려 노력했다. 점입가경의 소식으로 가득한 뉴스를 보며 일일이 화내거나 기뻐하지 않으려 했다. 기대와 실망을 줄이며 시간을 보내려 애쓴 만큼, 그간의 경험이 나를 바꾸어 놓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런데 뭔가 달라졌다. 예전 같으면 침실에 있는 선량한 이에게 뉴스를 같이 보자고 제안하는 것을 꺼리지 않았을 것이다. 동료 시민이 나를 쉬이 해칠 것이라 상상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이제는 무서웠다. 그러고 보면 요즘 계속 그랬다.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거리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이 불편했다. 경향신문 기자라는 걸 알면 내 멱살을 잡거나 앞에서 쌍욕을 해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집회 현장에서 동료들이 겪은 일을 전해 듣고, 서울 도심 법원에 사람들이 난입해 물건을 때려 부수고 판사를 찾으며 위협적인 말들을 내지르는 장면을 눈에 담으며 뭔가 변했다.

헌법재판소는 4월 4일 결론에 “민주주의는 개인의 자율적 이성을 신뢰하고 모든 정치적 견해들이 각각 상대적 진리성과 합리성을 지닌다고 전제하는 다원적 세계관에 입각한 것”이라며 “대등한 동료 시민들 간의 존중과 박애에 기초한 자율적이고 협력적인 공적 의사결정을 본질로 한다”는 판례를 인용했다. 그렇다면 나는 민주주의를 잃어버린 게 틀림없었다. 동료 시민을 존중하기보다 그들에게 위협을 느꼈고, 협력적인 공적 의사결정을 함께 내리기 어려울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민주주의를 되찾자’는 구호를 곱씹어본다. 민주주의가, 한 사람이 떠났다고 되찾을 수 있는 종류의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간절히 바라게 된다. 가까운 미래에 차악과 차차악 사이에서 싸우느라 날이 서더라도, 우리가 서로를 향한 최소한의 신뢰를 회복하기를. 매일을 보내며 ‘정치적 의견이 다른 누군가’에게 급습을 당할 거란 걱정 따위는 하지 않아도 되기를. 그간 잃어버린 것을 더듬어 감각하고 다시 길러낼 시간을 가질 수 있기를 희망한다.

<오경민 기자 5k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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