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벌이는 관세전쟁이 일단은 파국을 면했다. 그는 미국에 무역흑자를 내는 60여 개국에 대해 상호관세를 발효한 지 13시간여 만에 90일의 유예기간을 둔다고 했다. 중국을 제외하고 모두 10%의 기본관세를 적용받는다. 중국에 대한 관세는 125%로 올렸다. 관세 폭탄을 맞게 된 중국은 끝까지 싸운다는 태도다. 연합뉴스는 이번 관세전쟁이 미·중 간 전면전으로 치달을 가능성도 있다고 전했다.
미국과 중국이 전면전으로 가지는 않더라도, 과거와 같은 우호 관계로 회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양국 사이의 힘의 균형이 이미 많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환율을 어떻게 적용하는가에 따라 그림이 약간씩 바뀌지만, 2000년 미국의 12%(명목환율 기준) 또는 20%(불변환율 기준) 수준이었던 중국의 국내총생산(GDP)은 2023년에는 64%(명목환율 기준) 또는 78%(불변환율 기준) 수준으로 커졌다. 이런 추세라면 중국은 2030년대 초에 GDP 규모에서 미국을 추월할 것이다.
군사력에서도 양국의 차이는 좁혀지고 있다. 중국은 미국 다음으로 많은 국방비를 쓰고 있다. 스톡홀름 국제평화연구소(SIPRI)는 2023년 중국의 국방비 지출을 약 2250억달러로 추정하는데 이는 세계 2위이고, 미국의 30% 수준이다. 그런데 중국의 군사력은 국방비 지출 규모보다 훨씬 강하다고 볼 수 있다. 4월 8일(현지시간) CNN은 미국은 한국의 현대중공업에 이지스 전함 제조를 위탁할 수 있다고 보도했는데, 이는 미국이 중국의 전함 건조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서 미국이 해군력의 우위를 지속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중국의 제조 역량은 군사력에서도 실력을 발휘하고 있다.
관세전쟁은 미 패권 상실의 불편한 진실 드러내
트럼프 대통령이 세계 각국을 상대로 벌이고 있는 관세전쟁은 미국이 점진적으로 패권을 잃어가고 있다는 불편한 진실을 드러내는 극단의 사건이다. 관세전쟁이 증상이라면 그 원인은 패권의 점진적인 상실에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앞장서 세워온 자유주의적 국제질서의 종말을 미국 대통령이 앞장서고 있다.
돌아보면, 2008년은 세계 경제의 발전 경로에서 뚜렷한 전환점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세계 금융위기가 자본주의의 심장이라는 월스트리트에서 발발해 급속하게 선진국을 포함한 세계 경제 곳곳으로 전이됐다. 미국은 심각한 경기 침체에 빠졌고, 영국과 일본도 심각한 경기 위축을 겪었다. 금융위기로 유로존 국가들은 큰 타격을 입었는데 GDP 감소, 높은 실업률 그리고 재정 압박에 직면했다. 각국은 긴급 처방으로 투입한 구제 금융과 양적 완화, 재정 확대로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다. 금융위기로 큰 손실을 본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은 2008년 11월 런던정경대를 방문한 자리에서 “왜 경제학자 그 누구도 금융위기를 예견하지 못했느냐”는 질문을 던져 주변을 당혹스럽게 했다.
상당한 시간이 흐른 오늘의 관점에서, 세계 경제 전체로 보면 몇 가지 중요한 사안이 눈에 들어온다. 가장 큰 사안은 2008년을 기점으로 세계 경제에서 교역의 확대가 멈춰섰다는 점이다. 2001년 중국이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고 미국을 선두로 선진국 경제가 개방과 세계화를 추진하면서 세계 교역량은 2008년 세계 GDP 대비 61% 수준까지 확대됐다. 그러나 금융위기 이후에는 교역량 비중이 단기적으로는 수요가 줄면서, 그리고 장기적으로는 정책 기조가 변화하면서 이전 수준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교역량 비중의 정체에 못지않게 중요한 사안은 2008년을 기점으로 많은 나라에서 정부 부채가 많이 늘어났다는 점이다. 국제통화기금(IMF) 통계에 의하면 미국 정부의 부채는 GDP 대비 2008년 75%에서 2023년 123%로 늘어났다. 같은 기간 중국은 27%에서 84%로, 한국은 26%에서 49%로 증가했다. 정부의 부채 통계에 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여러 나라에서 정부 부채가 많이 늘어났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정부 부채가 늘어나면 위기 시에 정부가 나서서 대응할 역량이 떨어진다.
미·중 사이 무역전쟁 씨앗은 2008년 금융위기
금융위기가 10년이 지난 시점에서 미 브루킹스연구소의 데이비드 달라 박사는 미국과 중국 사이 무역전쟁의 씨앗은 2008년 금융위기에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2008년 금융위기 당시 미국 재무부 소속으로 중국 북경의 미국 대사관 경제특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당시에 그는 허베이성에서 중국 공무원 500여 명을 대상으로 중국이 금융위기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강연했다. 강연 후 질의응답 시간에 한 참석자의 코멘트가 그를 매우 놀라게 했다. 중국 공무원은 “지금까지 우리는 미국이 모든 면에서 우리의 귀감이라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이 발언에 대해 그가 놀랐던 이유는 2008년 이후 중국은 그동안 추진해온 개혁·개방 노선에서 실질적으로 벗어나게 되는데, 2008년 금융위기가 중국의 정책당국자들이 미국 시스템에 대한 신뢰를 상실한 한 계기가 됐을 수도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미·중 관계가 악화한 계기를 금융위기 하나에서만 찾을 수는 없다. 외부 상황뿐 아니라 중국 내 정치 상황도 여럿 작용했을 것이다. 매우 우려스러운 것은 미국의 상황이 나빠지고 있다는 점이다.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하고, 정치적으로 우경화 세력이 다수를 차지하고, 국수주의가 정권을 잡게 되는 과정은 각본처럼 짜여서 진행되지는 않았지만, 오늘날의 트럼프주의로 이어졌다. 미국 중심주의는 현직 대통령 트럼프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전임 조 바이든 대통령도 ‘바이 아메리카(Buy America)’를 주창했고, 인플레이션 축소를 이유로 외국기업의 미국 내 투자를 촉구했다. 이제 팍스 아메리카 이후 시대를 진지하게 준비해야 할 때다.
개인적 소회를 이 글에 붙인다. 데이비드 달라 박사는 수술 합병증으로 1년여 전에 작고했다. 생전에 그는 미·중 경제 관계를 균형 있는 시각으로 분석하고 자문을 해온 중국 전문가로 평가받았다. 한국 경제에도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했고, 여러 경로로 한국에 자문했다. 2020년 4월 카이스트가 주최한 ‘코로나19 극복을 위한 글로벌 협력방안’ 국제포럼에 초대하는 e메일을 보냈는데 그는 흔쾌히 수락했다. 화상을 통해 그는 위기 극복을 위해서는 국제협력이 더욱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미·중 관계가 악화 일로를 걷고 있는 오늘날의 상황에서 그의 지혜는 더욱 절실하다. 고인의 영면을 이 자리를 빌려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