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 성향 대학 지원 중단…싱크탱크 예산·인력 대폭 감축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취임 이래 철강·알루미늄·자동차에 대한 25% 관세, 전 세계 대상 10% 기본관세, 미국이 무역 적자를 보고 있는 57개국에 대한 20~40%대 상호관세를 부과하며 글로벌 관세전쟁의 포문을 열었다.
그런 트럼프는 미국 내에서는 이념·문화 전쟁에 앞장서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가 표적으로 삼은 싱크탱크는 사실상 조직이 폐쇄됐다. 진보성향을 보여온 대학들은 연방자금 지원 중단이라는 압박을 받고 있다. 트럼프가 명분으로 내세운 건 연방정부 효율화와 DEI(다양성·형평성·포용성) 정책 폐기다. 결국 학문과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키는 무리한 조치로 미국의 소프트파워나 연구·개발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숙청 대상 된 싱크탱크
미국 28대 대통령 우드로 윌슨(1856~1924)의 이름을 딴 윌슨센터는 최근 예정됐던 강연과 콘퍼런스 등 각종 행사를 취소했다. 대다수 직원은 휴직 처리됐다. 각종 연구 프로그램 자금을 반환하라는 명령도 내려진 것으로 알려졌다. 윌슨센터가 보유한 방대한 분량의 냉전 시기 등에 관한 사료와 디지털 자료의 관리 방안도 미지수다. 현대차그룹-한국국제교류재단(KF)의 기여로 만들어진 한국 역사 및 공공정책연구센터 운영도 불투명해졌다.
이는 트럼프가 지난달 연방정부 조직 축소를 위해 서명한 행정명령에 따른 조치다. 행정명령은 윌슨센터 외에도 VOA(미국의소리)와 RFA(자유아시아) 방송 등을 관할하는 글로벌미디어국(USAGM), 민주주의진흥재단(NED) 등 모두 7개 기관의 기능·인력 최소화를 지시하는 내용이 포함됐다.
워싱턴의 또 다른 싱크탱크 미 평화연구소(USIP)도 지난달 말 거의 모든 직원의 해고통보를 받았다. 특히 USIP 웹사이트가 폐쇄되면서 그동안 연구소나 소속 연구진이 발행한 각종 보고서 등 연구 결과물도 접근이 불가능해졌다. 한 싱크탱크 관계자는 “(북한, 중국 등에서 일어나는) 숙청에 가까운 일”이라고 말했다. USIP가 폐지 수순을 밟게 된 것은 일론 머스크가 이끄는 정부효율부(DOGE)의 소장·이사진 강제 해임 및 교체와 연구소 내부 무단 침입이 있은 지 약 2주 만이다.
1968년 세워진 윌슨센터는 외교·안보, 기후변화 등의 분야에 특화된 초당파적 싱크탱크로 연방정부 예산과 기부금 등으로 운영돼왔다. 1984년 의회가 설립해 의회의 자금 지원을 받는 USIP는 세계 분쟁의 평화적 해법을 주로 연구하는 독립 비영리 연구소다. 둘 다 행정부 산하 조직은 아니다. 그럼에도 트럼프가 집권 1기 때부터 내세운 워싱턴 기득권 ‘고인 물 빼기(Drain the Swamp)’와 연방 정부 예산·인력 대폭 감축 목표 달성을 위한 표적이 됐다. 두 기관에서 한반도를 포함한 인도·태평양 지역 관련 연구도 활발하게 이뤄져 왔다는 점에서 워싱턴 조야의 한반도 논의의 다양성이 위축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보수 진영에선 두 기관 리더십에 민주당 성향 인사들이 주로 임명된다는 이유로 비판해왔다. 하지만 사임 의사를 밝힌 윌슨센터 회장 마크 그린은 트럼프 1기 국제개발처(USAID) 처장을 지낸 인물이다. USIP의 핵심 목표도 미국의 가치와 영향력을 세계에 확산하는 것으로 특정 정당의 정치이념과는 크게 상관이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 대학 ‘길들이기’도
미국 주요 대학들도 트럼프의 집중 공세 대상이다. 특히 공화당과 보수 진영이 진보적 색채를 문제 삼아 공격해온 아이비리그 대학들이 거센 압박을 받고 있다. 트럼프는 대선 과정에서부터 대학 등 고등 교육기관이 ‘급진 좌파’나 ‘워크’(woke·사회정치적 이슈에 대해 깨어 있는 태도)에 물들어 있다고 주장해왔다.
트럼프 2기 출범 이후 컬럼비아대, 펜실베이니아대, 하버드대, 프린스턴대 등 4곳이 연방 정부 보조금 지원이 중단 또는 동결됐다. 트렌스젠더 운동선수 관련 정책을 이유로 한 펜실베이니아대를 제외한 나머지 대학들은 ‘반유대주의’를 표방한다는 이유로 연방 지원이 중단됐다. 미 전역 60개 대학을 상대로 지난해 가자 전쟁 반대 시위인 ‘반유대주의’에 관한 조사를 벌이고 있는 트럼프 행정부는 강제 조치까지도 공언해왔다.
특히 캠퍼스 반전 시위의 진앙이었던 컬럼비아대는 가장 먼저 4억달러 규모의 연방자금 지급 취소 처분을 받았다. 결국 컬럼비아대는 학내 중동지역 연구를 시작으로 지역학 프로그램 재검토, 학내 시위 마스크 착용 금지, 이스라엘 연구 교수 충원 등 트럼프 행정부의 요구사항 대부분을 수용했다. 총장도 물러나기로 했다. 연방자금 지원을 무기로 행정부가 원하는 방향으로 대학의 정책 변화를 관철한 것이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상당수 대학이 재원의 4분의 1 이상을 연방연구지원기금에서 충당한다고 전했다. 돈줄을 쥔 연방정부가 입맛대로 대학 ‘길들이기’를 시도하고 있다는 관측이 나오는 배경이다. 트럼프 취임 직후부터 각 분야에서 벌어지고 있는 DEI 철폐 요구에 따라 대학 내 관련 행사 취소, 소수 인종 학생 모임 축소 등도 잇따르고 있다.
일련의 조치를 두고 대학가의 자유로운 분위기를 저해할 뿐 아니라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반전 시위에 참가했던 외국인 학생들에 대한 비자 취소도 이어지고 있는 점도 우려를 더하고 있다. 국무부는 지난달 국제 학생비자가 최소 300건 취소됐다고 밝혔다.
하워드 프렌치 컬럼비아대 저널리즘스쿨 교수는 최근 포린폴리시 기고에서 “미국의 대학들은 민주주의 체제의 가장 귀한 자산이며 미국의 자기 정체성은 표현의 자유를 포함하는 학문의 자유라는 위대한 전통에서 비롯된다”며 “대학들은 전 세계의 야심 찬 인재들을 끌어들임으로써 미국의 리더십을 지탱해왔다. 미국 브랜드라는 궁극적인 가치가 파괴되면 다시는 회복할 수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워싱턴 | 김유진 특파원 yjkim@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