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호철입니다.” “예약 없는데요.” “아니 한 달 전 예약했는데….” 오리건주 포틀랜드에 도착해 저가 전국체인인 모텔6 포틀랜드에 들어갔는데 예약이 안 돼 있단다. 휴대전화의 호텔 예약 사이트에서 예약 내용을 보여줬다. “아, 이건 메인주 포틀랜드의 모텔6인데요.” 아이고! 그동안 세계 각국을 여행했지만, 메인주에도 포틀랜드가 있는 줄 모르고 멍청한 실수를 하고 말았다. 긴 여행에 경비를 줄이려고 싼 모텔에 예약했다가 생돈을 날리고 말았다.
미국 서부가 대체로 그러하지만, 특히 포틀랜드는 매우 ‘진보적’인 도시다. 그런 만큼 찾아갈 데가 여러 곳이다. 첫 목적지에 도착했다. 작은 가정집이었다. 사무실이 아니고 가정집이라는데 실망했다. 그러나 ‘흑인의 생명도 중요하다’, ‘팔레스타인에 연대를’과 같은 각종 피켓, 그리고 창문으로 보이는 ‘IWW’라는 글자가 내 가슴을 뛰게 했다. IWW(Industrial Workers of World·세계산업노동자들)는 한때 세계 노동운동, 진보 운동의 희망이었다. 1980년대 미국 유학 당시 나는 미국의 노동조합 하면 AFL-CIO(미국 노동 총연맹 산업별 조합회의)만 있는 줄 알았다. 어느 날 ‘<관타나메라>(Guantanamera)’, ‘We Shall Overcome’ 등을 세계적으로 알린 좌파 포크송 가수 피터 시거(Pete Seeger)를 통해 IWW라는 노동조합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사라진 줄 알았던 IWW 여전히 존재
20세기 초 AFL(미국노동자연맹) 등 세계의 노동운동은 산업별로 나뉘고, 기능공 중심이고, 개별 국가로 조직되고, 개량주의적이었다. 1906년 시카고에서 설립한 IWW는 ‘혁명적 산업조합주의’라는 이념으로 무장해 사회주의적 경향이 강했으며, 국가와 산업을 넘어 세계의 모든 노동자가 ‘하나의 노동조합’에 모두 모여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만국의 노동자는 단결하라!’였다. 1917년에는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에 15만명의 노동자들이 참여했다. 1918년 캐나다가 IWW를 불법화했다. 정부의 탄압과 제1차 세계대전 등으로 조합원들이 급감하고 와해했다. 소수 명맥을 유지하던 IWW는 1950년대 매카시 광풍에 또다시 타격을 받았다.
“아니 IWW가 살아 있어?” 1950년대 매카시즘 이후 IWW가 사라진 줄 알았던 나는 이번 답사를 준비하며 IWW가 미미하지만, 오리건을 중심으로 살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2016년 오리건 지역 패스트푸드 체인점인 버거빌에 IWW 노동조합이 결성됐다는 것이다. IWW는 매니저를 노동자들이 직접 선출하는 등 작업장 민주주의를 주장하며 여전히 급진적인 프로그램을 유지하고 있었다. 관계자들을 만나 IWW의 현황에 대해 듣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문이 잠겨 있었다.
IWW와 지역 노동운동의 흔적을 찾아 포틀랜드 커뮤니티대학(PCC)으로 향했다. 대학센터 1층에는 대학노조가 중심이 돼 미술대학생들이 공동으로 그린 ‘기억하라’는 대형벽화가 나를 맞았다. ‘노동조합’, ‘커뮤니티’, ‘연대’라는 큰 글씨들이 쓰인 벽화는 1935년 파업하는 포리스트글로브 노동자들, 노동자들을 구타하는 경찰들, IWW열성지지지였던 인 마리 에퀴 박사, 농업노동자노조 공동창립자이자 이민자 권리 운동가인 시프리아노 페렐 등이 그려져 있는 감동적인 벽화였다. 그림 속의 글이 내 가슴을 찔렀다. ‘우리는 협상을 원하지, 구걸하는 것이 아니다.’
‘존 리드 기념 벤치’에 담긴 미국의 관용
유학 시절인 1982년 가을 나는 난생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카데미 수상식을 눈이 빠지게 보고 있었다. 세계 3대 논픽션의 하나로 꼽히는 <세계를 움직인 열흘>이라는 러시아혁명 현장 르포를 쓴 존 리드(1887~1920)의 일대기 영화 <레즈>(Reds)의 수상을 보기 위해서였다. 할리우드 최고의 바람둥이지만, 탁월한 사회의식을 가진 워런 비티가 공동집필, 제작, 감독, 주연한 대작은 3시간 15분의 상영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감동적인 영화였다. 대작답게 거의 모든 부문에 후보로 올랐지만, 헨리 포드의 유작인 <황금연못>에 대한 추모표에 밀려 줄줄이 낙방했다. 다행히 감독상을 받았다.
“잊힌 미국의 한 공산주의자의 일대기를 위해 자금을 대준 미국 자본주의에 감사한다.” 언덕 위에 있어 포틀랜드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워싱턴 공원의 한 벤치 앞에 서자 22년 전 영화인들의 박수 속에 단상에 올라간 워런 비티의 냉소적이지만, 뼈가 담긴 수상소감이 떠올랐다. 포틀랜드시는 2001년 지역 출신인 존 리드를 기념하기로 했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구즈 홀로 지역이 내려다보이는 이 벤치를 ‘존 리드 벤치’로 지정하고 기념판을 설치했다.
지역 갑부집에서 태어난 리드는 하버드대학 졸업 후 프리랜서 언론인으로 명성을 쌓았다. 멕시코혁명 르포로 명성을 얻었고 제1차 세계대전 종군기자로 이름을 날렸다. 급진적 사회주의자로 미국을 대표하는 좌파 극작가 유진 오닐, 초기 페미니스트 사회주의자 엠마 골드만 등과 친교가 깊었던 그는 러시아의 혁명 분위기를 감지하고 러시아로 달려가 혁명을 직접 목격하고 세계적인 대작을 썼다. 반혁명이 일어나자 그는 총을 들고 혁명수비대에 참가했다.
귀국 후 미국도 러시아와 같은 혁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미국 공산노동당(CLPA)을 공동 창당했다. 반역죄로 기소된 그는 위조여권을 갖고 노르웨이, 스웨덴을 거쳐 러시아로 들어갔다. 러시아혁명에 실망한 그는 미국으로 돌아가려고 화물선에 숨어 탔다가 핀란드 세관에게 발각돼 구금됐다. 그는 풀려나 러시아로 추방됐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발진티푸스(벼룩을 매개로 한 전염병)에 걸렸다. 당시 러시아는 미국 등의 경제제재로 약을 구할 수 없었고, 결국 사망했다. 말년의 비판적 견해 때문에 사이가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소련공산당 지도부는 그를 크렘린 혁명열사릉에 묻었다.
아직 밤이 깊지 않았지만 나는 성인용 스트립클럽 매직 타번으로 향했다. 이곳에서 스트립쇼를 하는 16명의 스트립걸이 열악한 노동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노조를 결성하고 공연예술노조에 가입했다는 뉴스를 봤기 때문이다. 스트립걸까지 노조를 결성하다니, 포틀랜드답다. 도착해보니 상호가 달랐다. 종업원들이 노조를 결성하자 주인은 가게 문을 닫았고, 가게는 다른 가게로 바뀌어 있었다. 역시 미국은 미국이었다. 한국 자본가들도 자주 사용하는 폐업이었다.
포틀랜드를 떠나려니, 오클랜드시 중심가에 사회주의자의 이름을 딴 ‘잭 런던광장’을 만들고 반역죄로 기소돼 적국 러시아에서 혁명을 돕다 죽은 존 리드의 기념 벤치를 만든 미국의 관용이 부러웠다. 우리는 과연 충남 예산 한가운데에 ‘(조선공산당 당수) 박헌영 광장’을 만들고 금산에 ‘(지리산 빨치산 대장)이현상 벤치’를 만드는 것이 가능할까?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