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은 <플로우>가 의미를 찾는 영화가 아니라 경험을 받아들이는 영화로 다가가길 원한다. 그러나 이 작품의 진가는 직관적인 황홀한 ‘경험’을 제공함과 더불어 자연스럽게 성찰을 유도하는 ‘의미’에 있다.
제목: 플로우(Flow)
제작연도: 2024
제작국: 라트비아, 벨기에, 프랑스
상영시간: 85분
장르: 애니메이션
감독: 긴츠 질발로디스
개봉: 2025년 3월 19일
등급: 전체 관람가
북유럽 공화국 라트비아의 영화 제작자이자 애니메이터인 긴츠 질발로디스 감독은 1994년 화가인 어머니와 조각가 겸 영화 영사기사로 활동한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많은 영화를 접할 수 있었던 그는 자신감 없는 10대를 보내면서 자신만의 세계를 홀로 표현해낼 수 있는 애니메이션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기록에 의하면 여덟 살 때부터 애니메이션 제작을 시작했다고 하는데, 고등학교 졸업 후에도 대학 진학 대신 홀로 단편을 제작하며 기술을 독학했다. 이때부터 각본, 디자인, 작화, 연출, 편집, 작곡까지 모든 작업을 1인이 담당하는 원맨 프로덕션 방식을 이어간다.
공식적인 첫 영화는 1분 25초짜리 단편영화 <러시>(2010)지만, 그의 재능이 인정받게 된 본격적인 작품은 2012년 열일곱 살에 발표한 7분짜리 단편영화 <아쿠아>로 알려져 있다. 홍수 때 물을 무서워하는 고양이의 고군분투를 다룬 이 작품은 <플로우>의 리허설 같다는 평가를 받는다.
감독의 초기 단편들은 유튜브(youtube.com/@gzilbalodis)와 비메오(vimeo.com/gints)에 마련된 그의 계정을 통해 무료로 볼 수 있다. 개별 작품의 재미도 있지만, 한 작가의 성장 과정을 단계적으로 고스란히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더 흥미롭다.
말없이 화려하고 역동적인 영상미의 성찬
<플로우>는 긴츠 질발로디스의 작품으로는 처음으로 라트비아, 벨기에, 프랑스 3개국이 합작한 대규모 프로덕션으로 제작됐다. 더불어 외부 스태프들과 공동작업을 통해 완성된 첫 작품이기도 하다. 이전까지 홀로 작업해왔던 그에게는 새로운 도전이 아닐 수 없는데, 이는 작품 안에서 보여주고 싶었던 주제를 현실에서 스스로 실천하는 선택이기도 했다.
그의 영화의 특징 중 하나는 마치 실제 카메라를 들고 찍은 것 같은 역동적인 카메라의 시점이다. 이는 초기 작품을 만들 당시 빈약한 배경과 무게감을 느끼지 못하는 캐릭터의 한계를 보완하려는 방편으로 음악과 함께 중점을 뒀던 것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이후 그의 작품을 부각하는 특징이자 장점으로 발전했다.
또 하나, 눈에 띄는 점은 대사가 없는 것이다. 이번 작품 역시 한마디의 대사도 등장하지 않는다. 이는 지역과 세대의 벽을 허물어 공감할 수 있는 관객의 폭을 획기적으로 넓힌다. 더불어 관객은 대사나 자막으로 인한 시선을 분산시키지 않고 온전히 화면에만 집중해 감상할 수 있다는 장점이 된다.
감독은 “관객이 퍼즐을 풀어야 하는 영화를 만드는 데에는 관심이 없다”며 “<플로우> 역시 의미를 찾는 영화가 아니라 경험을 받아들이는 영화로 다가가길 원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작품의 진가는 직관적인 황홀한 ‘경험’을 제공함과 더불어 자연스럽게 성찰을 유도하는 ‘의미’에 있다.
표면적 의미 넘어 내면의 깊고 넓은 철학
제목 <플로우>는 사전적 의미로 ‘흐름’을 뜻한다. 외형적으로 작품 속에서는 뭍에 발을 붙이고 사는 대다수 동물을 위협하는 거대한 홍수의 물결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이런 단순한 표면적 의미를 넘어서는 ‘시간’과 ‘시대’의 흐름이라는 것을 쉽게 눈치챌 수 있다.
물은 세상을 집어삼킬 듯 휩쓸며 넘쳐나지만, 어느 순간 맥없이 자취를 감춘다. 한 시대를 휩쓸고 역사 속으로 침잠하는 거대한 ‘조류(潮流)’에 대한 은유이며, 그것은 사상, 이념, 신앙, 유행 등 다양한 형태와 현상으로 우리의 주변을 떠돈다.
마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물이 필수인 것처럼 우리가 맞닥뜨리게 되는 변화무쌍한 시대적 조류 역시 인류가 거부할 수 없는 필연적 요소란 사실은 씁쓸하지만 인정해야 할 진실이다.
이외에도 다양한 인종을 은유하는 동물들, 신화와 종교를 아우르는 다양한 상징과 사건은 이 작품에 단순히 재미있고 예쁘기만 한 만화영화 이상의 가치를 부여한다. 아이와 어른 모두가 각자의 시선에서 온전히 즐길 수 있다.
영화 <플로우>는 올해 97회 아카데미 시상식 장편 애니메이션상을 비롯해 골든 글로브, 영국 아카데미상, 안시 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 등 세계 유수영화제에서 애니메이션상을 휩쓸며 화제를 이어가고 있다.
거울로 직시하는 진정한 자아?
영화 <플로우>는 수미쌍관의 형태를 취한다. 땅에 고인 물 위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는 고양이의 얼굴로 시작하고, 비슷해 보이지만 이전과 명백히 다른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이미 많은 영화와 문학, 미술을 통해 볼 수 있었듯 거울은 주체가 마주하는 자기를 반영한다는 점에서 쉽게 나르시스 신화와 관련시키는 경우가 많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은 자아와의 조우를 의미하며 내면의 탐구와 성찰을 이끄는 시발이 된다는 해석이다.
하지만 조지 허버트 미드와 찰스 호튼 쿨리의 상징적 상호작용론에서 비롯된 본래의 ‘거울자아 이론(Looking-glass self)’은 다른 사람들이 바라보는 자신의 모습, 또는 다른 사람이 나에 대해 기대한다고 생각되는 모습을 자기 모습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여 자아를 확립해간다는 ‘사회적 자아’에 대한 관점이다. 마치 거울이라는 도구를 통해 자신이 미처 보지 못했던 외모를 깨닫듯, 타인의 시선을 통해 자신에 대한 가치를 깨닫고 판단한다는 의미다.
‘거울’과 이를 통해 투영된 자아의 의미를 다룬 작품들은 단순한 검색을 통해서도 쉽게 찾을 수 있을 만큼 넘쳐나지만, 특별히 떠오르는 작품 하나를 언급한다.
히라노 게이치로의 소설을 원작으로 이시카와 케이 감독이 연출하고 츠마부키 사토시, 안도 사쿠라가 출연한 <한 남자>(ある男·2022)는 변호사인 한 남자가 사고사를 당한 한 남자의 의문스러운 정체를 뒤쫓으며 차갑고 냉정하게 자신을 성찰하게 되는 과정을 냉소적으로 그린다.
영화에 중요한 소품으로 등장하는 벨기에의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의 ‘금지된 재현(Not to Be Reproduced)’(1937·사진)은 영화의 주제라 할 수 있는 ‘거울자아’에 대한 허상과 의심을 명쾌히 함축한다.
<최원균 무비가이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