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다행?

2025.02.17

김찬호 기자

김찬호 기자

“마치 호수 위에 떠 있는 무슨 달그림자 같은 거를 쫓아가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2월 4일 헌법재판소 탄핵심판에 출석해 ‘비상계엄’은 선포했지만 “실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대통령의 시적 감수성과 별개로 반복적으로 확인되는 ‘아니면, 말고’식 태도에 우려가 나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부 출범 후 2년 반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대통령이 아직도 본인의 직업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현행 한국 정치구조에서 대통령은 최고의사결정권자입니다. 윤 대통령이 집무실 책상 명패에 써두었다는 “The BUCK STOPS here!”(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라는 문구는 단순한 명언이 아닌 그가 느꼈어야 할 막중한 책임감을 상징합니다. 재판에서야 “아무 일도 안 일어났잖아요, 뭐가 문제입니까” 식의 태도가 유리할지 모르나 정치 지도자가 국민이 보는 앞에서 취할 수 있는 태도는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그의 주장처럼 정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나요. 윤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은 미국의 정권 교체를 한 달여 앞두고 시행됐습니다. 모든 나라가 변화된 국제질서에 발 빠르게 대응하는 상황에서 한국은 사실상 멈췄습니다. 1450원대까지 치솟은 환율은 소비자물가상승률도 2%대로 끌어올렸습니다. 북핵 문제를 둘러싼 안보질서의 변화 움직임도 보입니다. AI 기술 패권을 둘러싸고 각국이 사활을 걸고 뛰어들고 있습니다. 이처럼 국가적 난제가 산적해 있는 상황에서 현직 대통령은 헌법재판소에서 ‘지시를 했네, 안 했네’, ‘그런 단어를 쓰네, 안 쓰네’로 다투고 있습니다.

윤 대통령은 야당에 경고 한 번 하겠다고 ‘비상계엄’을 선택했다고 합니다. 국회가 막아서 빠르게 철회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대통령직에 복귀하고 싶다고 합니다. “이처럼 중대한 변곡점에 차라리 다행 아니냐”라는 취재원의 말이 조금은 이해가 될 것도 같습니다.

<김찬호 기자 flycloser@kyunghyang.com>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매체별 인기뉴스]

    • 경향신문
    • 스포츠경향
    • 주간경향
    • 레이디경향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