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북동쪽에 자리 잡은 패서디나(Pasadena)는 매력적인 도시 중 하나다. 웅장한 산맥으로 둘러싸여 있는 도시는 아름다운 자연과 조화를 이뤄 독특한 풍경을 선사한다. 명문 공과대학인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과 세계적인 천문연구기관인 카네기천문대를 품고 있는 과학과 지성의 도시이자, 매년 새해를 맞아 열리는 로즈 퍼레이드(Rose Parade)와 로즈 볼(Rose Bowl)로도 잘 알려져 있다.
내가 패서디나에 거주했을 당시 느꼈던 진정한 매력은 도시를 둘러싼 자연이었다. 앤젤레스 국유림(Angeles National Forest)의 초입에 있어 다양한 하이킹 코스와 야외 활동을 즐길 수 있는데, 그중에서도 이튼캐니언(Eaton Canyon)은 지역 주민과 방문객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곳이다. 패서디나에서 차로 15분 정도 이동하면 만날 수 있는 이튼캐니언은 완벽한 도피처다. 도심의 번잡함에서 벗어나 태양 아래 펼쳐진 푸른 초목과 새소리가 어우러지는 이곳은 마치 또 다른 세계에 온 듯한 기분을 선사한다. 도시에 살면서도 자연과 깊이 연결될 수 있는 이 특별한 환경은 패서디나를 더욱 빛나게 하는 요소다.
주말 아침을 기다리며 이튼캐니언으로 향하는 길은 항상 설렜다. 서늘한 새벽 공기 속에 산책로로 들어서면, 숲은 고요하면서도 생동감이 넘쳤다. 나뭇가지 사이로 부드럽게 스며드는 햇빛, 멀리서 들려오는 새들의 노랫소리, 사이사이 수줍게 핀 야생화, 그리고 계곡 깊숙이 들어갈수록 점점 커지는 물소리는 하나로 어우러져 자연의 하모니를 만들어냈다. 산책로의 마지막에 이르면, 12m 높이의 이튼캐니언 폭포가 절벽 위에서 물을 쏟아내며, 하얗게 부서지는 물방울을 사방으로 흩뿌린다. 폭포 물줄기의 시원한 냉기를 깊이 들이쉬며 도시에서 쌓인 피로를 녹여주었다.
미국 LA 산불, 역사적 피해 확산
미국 현지시간 2025년 1월 7일부터 이튼캐니언을 포함한 로스앤젤레스 광역권에서 산불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다. 남부 해안의 퍼시픽 팰리세이즈에서 시작된 ‘팰리세이즈 산불’을 필두로 ‘이튼 산불’, ‘허스트 산불’, ‘케네스 산불’까지 총 4건의 대규모 산불이 진행 중이다. 특히 이튼캐니언의 산불은 주택 밀집지역인 패서디나로 번지며 심각한 피해를 초래했다. 현재까지 피해면적은 156㎢로 서울시 면적의 약 4분의 1을 넘는다.
지난 1월 17일 기준, 이번 산불로 인한 사망자 수는 27명에 이르렀으며, 피해 규모는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다. LA 당국은 수천명의 소방인력을 투입해 화재 진압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팰리세이즈 산불과 이튼 산불의 진압률은 10%대에 머물러 있다. 바람이 잦아들었다가 다시 거세지는 악조건 속에서 겨울 가뭄으로 진화에 사용할 물조차 부족했다.
산불이 미치는 여파는 환경과 일상으로까지 확산하고 있다. 이튼 화재로 펌프장과 저수지가 피해를 보면서 패서디나 북부 대부분 지역에는 식수 사용 제한 명령이 내려졌다. LA 수도 전력국은 “화재 관련 오염물질이 상수도에 유입됐을 가능성이 있다”며, 음용뿐 아니라 손 씻기나 목욕에서도 수돗물 사용을 금지했다. 대기오염 역시 심각한 수준이다. LA 카운티 공중보건국은 산불 연기 영향을 받는 지역 주민들에게 외출을 자제하고, 공기청정기를 사용하며, 외출 시에는 N95 마스크를 착용하라고 권고했다.
경제적 손실은 역대 최대 규모로 예상된다. 팰리세이즈 산불로 1000채 이상의 건물이 파괴된 데 이어, 이튼 화재로 7000채 이상의 구조물이 소실됐다. 대형 금융사 웰스파고는 이번 산불의 경제적 피해액을 600억달러(약 88조4000억원) 이상으로 추산했다. 이는 역대 최대였던 2018년 캘리포니아 북부 산불 피해액(125억달러)의 5배에 달하는 규모다.
이번 산불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진 원인 중 하나는 국지풍인 ‘샌타애나 바람’이다. 이 바람은 시에라네바다산맥에서 캘리포니아 해안으로 부는데 뜨겁고 건조하다. 최대 풍속이 시속 160㎞에 이르고 방향을 예측하기 어려워 ‘악마의 바람’이라고도 불린다. 실화, 방화, 자연발화 등 어떤 원인으로든 산불이 발생하면 이 바람이 불길을 삽시간에 번지게 한다. 이에 더해 도심 주거지역에서 피해가 컸던 이유 중 하나는 소화전 약 20%가 흡입 수압을 잃었기 때문이다. 소화전은 상수도 급수관에 연결돼 도심 화재 진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지만, 막상 필요한 시기에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캘리포니아의 개빈 뉴섬 주지사는 소화전 수압 저하의 원인에 대한 독립적인 조사를 요청했다.
기후변화와 산불
산불 자체는 캘리포니아에서 새로운 재난이 아니다. 기후가 건조하고 바람이 강한 지역적 특성 때문에 크고 작은 화재는 늘 있었다. 그러나 최근 10여 년 사이, 산불 발생 빈도와 피해 규모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과거와 차원이 다른 이 변화 뒤에는 기후변화의 영향이 숨어 있다.
세계기상기구(WMO)는 지난해가 관측 사상 가장 더운 해였으며, 지구 평균기온이 산업화 이전 대비 1.6도 상승했다고 밝혔다. 이는 파리협정의 목표였던 ‘1.5도 상승 억제선’이 무너졌음을 의미한다. 기온 상승은 지구를 더욱 건조하게 만든다. 기온이 1~2도 오르는 것만으로도 토양수분이 급격히 줄어든다. 강우 양상 역시 불규칙해져 미국 서부에서는 예전처럼 겨울마다 고른 양의 비가 내리지 않는다. 캘리포니아에서는 겨울철 고른 강우 대신 극단적 폭우와 긴 가뭄이 반복되면서 초목이 말라가는 ‘화약고’가 되고 있다. 특히 LA는 지난해 여름 기록적 폭염 이후 지속한 가뭄으로 나무도 땅도 마른 상태였다. 여기에 샌타애나 바람이 자주 불면서 산불의 규모와 파괴력을 더욱 키웠다.
산불은 기후변화의 결과이자, 동시에 기후변화를 가속한다. 산불로 타버린 나무와 초목은 대기 중에 막대한 양의 탄소를 방출한다. 동시에 탄소 흡수원이 사라져 온실가스 농도가 상승하고, 이는 다시 지구온난화를 촉진한다. 이러한 악순환은 매년 전 세계적으로 대형 산불의 위험도를 높이고 있다. 2023년 캐나다에서 발생한 산불은 약 6.5억t의 탄소를 배출했는데, 이는 한국의 연간 배출량(약 6.2억t)보다 많다.
내 기억 속의 도시와 자연 풍경을 화마가 삼키는 모습이 오늘도 화면에 비친다. 참혹하게 전소된 집 앞에서 울고 있는 주민들의 모습은 가슴을 아프게 한다. 기후위기는 우리 옆에 있고, 나와 이웃들에게 그 피해를 남긴다. 기후위기의 불길이 우리의 삶을 위협한다.
<정봉석 JBS 수환경 R&C 대표·부산대학교 환경공학과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