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15일 오전 10시 33분, 윤석열 대통령이 내란죄 혐의로 체포됐다. 커다란 불확실성 하나가 걷혔다. 이제부터라도 불법적 비상계엄 선포 이후 그동안 지루하게 진행되던 탄핵정국을 신속하게 마무리해 나라의 질서를 바로 세우고 경제를 짓누르는 정치적 불확실성을 해소해야 한다.
그 핵심적 역할을 담당하는 사람이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다. 최 권한대행은 이례적으로 선거에 의하지 아니하고 정치와 경제의 전권을 한 손에 거머쥔 공무원이 됐다.
그렇다면 최 권한대행의 소임은 무엇일까? 혼란의 시기에 엄정하게 국법을 집행하고, 정치적 불확실성을 최소화해 우리 경제를 안정시키면서 신속하게 탄핵의 강을 건널 수 있도록 만전을 기하는 것이다.
그럼 지금 최 권한대행은 이러한 소임을 다하고 있는가? 나는 애석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평가의 핵심에는 ‘재량권’에 대한 잘못된 인식과 오남용이 도사리고 있다.
재량권은 공무원의 행위를 평가할 때 매우 중요한 잣대다. 공무원은 우선 특정 행위를 함에 있어 본인에게 재량권이 있는지를 먼저 판단해야 한다. 재량권이 없다면 자신에게 주어진 규범(그것이 헌법이건, 법률이건, 아니면 다른 하위 규범이건 간에)을 그대로 준수해 행동해야 한다. 만일 재량권이 있다면 그때는 그 재량권을 신의성실하게 사용해야 한다. 신의성실의 원칙을 벗어나서 재량권을 남용하거나 섣불리 방기해서는 안 된다. (물론 자유재량의 경우에는 공무원 맘대로 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반문하실 독자들이 계실지도 모르지만, 공무원의 직무 중에 신의성실 의무에 구애받지 않고 원론적인 자유재량이 완전하게 허용되는 경우는 사실상 거의 없다.)
그렇다면 최 권한대행의 행위는 이런 기준에 비추어 어떠한가? 애석하지만 낙제점이다.
유체이탈식 화법으로 교묘한 줄타기
우선 재량권이 없는데 재량권을 행사한 경우부터 살펴보자. 대한민국 헌법 제111조 제2항은 “헌법재판소는 법관의 자격을 가진 9인의 재판관으로 구성하며, 재판관은 대통령이 임명한다”고 하여 헌법재판소 재판관에 대한 임명권은 대통령에게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여기까지만 보면 헌법재판소 재판관의 임명은 대통령의 재량권 범위 내에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동조 제3항을 함께 읽으면 그렇게 볼 수 없다. 동조 제3항이 “제2항의 재판관 중 3인은 국회에서 선출하는 자를, 3인은 대법원장이 지명하는 자를 임명한다”라고 돼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 6인의 재판관 임명에 대해서는 대통령이 형식상의 임명권은 보유하고 있으나 임명 여부에 대한 재량권은 가지고 있지 않다고 봐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대통령이 재량권을 가지고 임명할 수 있는 헌법재판소 재판관은 총 9인 중 위의 6인을 제외한 3인이라고 봐야 한다.
그런데 최 권한대행은 지난해 12월 31일 국회가 선출한 3인의 헌법재판소 재판관 후보 중 정계선, 조한창 후보는 재판관으로 임명했으나, 마은혁 후보는 “여야 합의가 확인되는 대로 추후 임명”하겠다며 사실상 임명을 보류했다. 그러나 이는 ‘국회 선출 후보의 대통령 임명’이라는 재량권 없는 행위에 대해 마치 본인에게 재량권이 있는 것처럼 가장한 행위로 헌법 위반의 소지가 크다. 최 권한대행은 ‘여야 합의의 부재’를 이유로 내세웠지만, 이는 헌법 제111조 제3항에 명시되지 않는 조건일 뿐이다.
다음은 재량권이 있는 행위에 대해 신의성실의 원칙을 제대로 지키지 않은 경우를 살펴보자. 이 부분은 훨씬 미묘하고 대부분 사법적으로 그 잘못을 묻기도 쉽지 않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잘못된 행위의 결과가 사소하다는 뜻은 아니다. 어쩌면 경제에 미치는 효과는 재량권 오남용의 문제가 더욱 심각할 수 있다.
먼저 정치적 불확실성의 축소와 관련한 재량권의 방기 또는 오남용 부분을 보자. 최 권한대행은 이 부분에서 매우 ‘교묘한 줄타기’를 했다. 윤 대통령의 체포 과정에서 최 권한대행이 보여준 ‘유체이탈식 화법’이 그 좋은 예다.
윤 대통령의 체포는 일사천리로 순조롭게 진행된 것이 아니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는 작년 12월 중순 이후 세 차례에 걸쳐 피의자 신분으로 출석해 조사를 받으라고 요구했으나 윤 대통령은 이를 모두 거부했다. 지난 1월 3일에는 법원이 발부한 체포영장을 가지고 윤 대통령을 체포하려고 시도했으나 대통령 경호처의 저항에 막혀 실패했다. 그후 다시 체포영장을 발급받고 여러 사전 작업을 거쳐 비로소 지난 1월 15일에 체포에 성공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국민이 가장 우려했던 점은 법원이 발급한 영장에 저항하는 경호처의 모습이었다. 법치주의가 물리력 앞에서 무릎을 꿇는 현장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최 권한대행은 이때 국법을 준수하고 이를 성실하게 집행하는 관리자로서의 모습을 보였어야 한다. 그러나 최 권한대행은 경호처에 대한 지휘권을 행사하라는 요구를 거부하면서 ‘국가기관 간 물리적 충돌은 없어야 한다’는 식의 그야말로 마이동풍식 유체이탈 화법으로 일관했다.
국가기관 간 갈등이 생기고 물리적 충돌의 우려가 있을 때 이를 교통정리 해야 할 사람이 도대체 누구인가? 대통령 아닌가? 그런데 대통령 권한대행이 갈등을 해소할 생각은 하지 않고, ‘너희들, 서로 싸우지 말고 어떻게 잘 좀 해봐’라는 식의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 그 소임을 다하는 것인가?
‘예산 상반기 조기 집행’ 운운 눈에 거슬려
다음으로 재량권을 남용하는 경우를 보자. 가장 미묘하게 눈에 거슬리는 것은 ‘예산 67% 상반기 조기 집행’ 운운하는 부분이다.
언뜻 보면 이상할 것이 없어 보이기도 한다. 예산의 상반기 조기 집행이라는 것이 거의 연례행사처럼 되풀이됐고, 그 비율이 예년보다 조금 높아 보이기는 해도 탄핵정국이 초래한 내수 침체를 부양할 목적이라면 오히려 적절하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조금 찬찬히 따져보자. 도대체 내수가 급속히 침체한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 불법적 비상계엄의 후과 때문 아닌가? 그렇다면 내수 진작을 위한 가장 핵심적 정책은 탄핵정국을 최대한 신속하게 종식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지금 최 대행이 하는 것은 비상계엄이 초래한 탄핵정국은 질질 끌면서 그에 따른 경기침체는 국민 세금을 쏟아부어 막아 보겠다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본말이 전도된 정책이다.
지금 최 권한대행이 가고 있는 길은 그가 의도했건 그렇지 않았건 잘못된 길이다. 그는 올해 1년 전체를 정책 시계로 하여 경제정책을 펼치는 태평성대의 장관이 아니라 탄핵정국 이후 새 정부가 집권할 때까지 6개월의 시계 내에서 위기관리를 책임지고 있는 비상시국의 관리자다. 최 권한대행이 국가와 국민을 위해서 현명하게 재량권을 행사할 것을 진심으로 당부한다.
<전성인 홍익대 경제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