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위기에서 빛나는 우정의 연대

이주영 문화칼럼니스트·영상학 박사
2024.12.16

뮤지컬 <긴긴밤>·연극 <사일런트 스카이>

뮤지컬 <긴긴밤>의 노든과 새끼 펭귄 장면 / 라이브러리컴퍼니

뮤지컬 <긴긴밤>의 노든과 새끼 펭귄 장면 / 라이브러리컴퍼니

이미 여러 번 읽은 루리 작가의 <긴긴밤>(2021·문학동네)을 뒤적이며 ‘긴긴밤’을 지새웠다. 과거 악몽이 되살아나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살아생전 다시 겪을 일 없을 거로 생각했던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12·3 비상계엄 사태)는 44년 전 트라우마를 들쑤셔 놓았다.

비상계엄을 글로 배운 중학생 아이가 과거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묻는다. 희망과 절망이 교차한 ‘서울의 봄’(1979년 10월 26일~1980년 5월 18일 전국적 민주화운동)과 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들 이야기를 복기했다. 아이는 대통령이 발호하는 비상계엄이 준전시 상황임을 인식하고 계엄군이 국회에 진입하는 뉴스를 보며 할 말을 잃었다. 뮤지컬 <긴긴밤> 흰바위 코뿔소 노든의 가족을 공격한 밀렵꾼을 대하는 새끼 펭귄의 분노와도 같다.

<긴긴밤>(양소영 작·작사, 박보윤 작곡, 황희원 연출, 이철 무대)은 루리 작가의 동명 베스트셀러 동화가 원작인 창작 초연 뮤지컬이다. 200석 남짓한 작은 무대는 반타원형 초원이 덧대어진 시공간 융합 공간이다. 아프리카 평원부터 사막, 도심 동물원, 거대한 바다와 물웅덩이, 습지 등 이야기가 진행되는 지구 곳곳의 공간이 시간대를 넘나들며 진행된다.

오묘한 공간에 편안한 면바지와 셔츠 차림의 새끼 펭귄(연지현·이정화·설가은 분)이 ‘따닥따닥’ 캐스터네츠를 울리며 등장한다. 자신의 아버지들인 흰바위 코뿔소 노든과 펭귄인 치쿠 및 윔보, 작은 ‘알’ 상태였던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서다. 아울러 작품의 화자이자 주인공인 자신은 그냥 펭귄일 뿐 이름이 없는 점도 강조한다. 이 작품에서 ‘이름이 있다는 것’은 ‘동물원에 구속된 적이 있다는 것’이다. 펭귄은 이름이 없는 대신 태어나면서 지금까지 스스로 모든 것을 결정하고 감내해온 자유인임을 강조한다.

고통을 이겨내는 불면의 긴긴밤

흰바위 코뿔소 노든(홍우진·강정우·이형훈 분)은 코끼리 무리에서 자라났다. 아프리카풍의 삼바 리듬에 맞춰 춤을 추며 등장하는 어린 노든에게 코끼리 가족들은 “코가 길지 않아도 너는 훌륭한 코끼리야. 이제 훌륭한 코뿔소가 되는 일만 남았어”라고 덕담을 안긴다. 독립 후 가족을 이루어 살던 노든은 뿔을 탐내는 밀렵꾼에게 가족을 다 잃는다. 동물원에 갇혀 악몽 속 긴긴밤을 보내던 중 코뿔소 앙가부(박근식·박선영 분)가 얘기를 하면 나아진다고 조언하자 조금씩 마음을 연다.

마음껏 달리는 게 꿈인 앙가부를 위해 동물원 탈출을 계획하던 노든은 또다시 밀렵꾼에게 앙가부를 잃고 전쟁에 휩싸인다. 한쪽 눈을 실명한 치쿠(유동훈·이규학 분)는 ‘알’을 같이 키우던 친구 윔보를 잃고 함께 키우던 알을 보호하기 위해 노든과 동행한다. 알이 부화한 새끼 펭귄의 터전인 바다로 가기 위해서다.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대표 넘버 ‘바람보다 더 빠르게’에서 “바람보다 더 빠르게. 저 끝까지 달려가. 바람보다 더 빠르게 어디로든 달려”를 반복하는 것은 자유를 만끽하는 대신 책임을 지고 고독을 즐기겠다는 의미로도 읽힌다. 작은 무대지만 극에 빠져들수록 거대한 평원이 동시에 아른거린다. 앙가부와 노든의 질주 본능을 반영한 동선, 새끼 펭귄이 종국에 도달하는 거대한 바다는 조명과 음향만으로 벅찬 감동을 준다. 새끼 펭귄과 노든, 치쿠 등이 긴긴밤을 두려워하지 않고 직면할 수 있었던 것은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이끌어준 우정의 연대 덕이다.

연극 <사일런트 스카이>(로렌 군더슨 작, 김민정 윤색·연출, 김종석 무대, 이수경 영상)는 사후 노벨 물리학상 후보자에 언급된 천문학자 헨리에타 레빗(1868~1921)의 삶과 동료들의 연대를 그린다. 헨리에타(안은진 분)는 대학 졸업 후 하버드대학 천문대에서 항성의 밝기를 검수하는 계산원으로 근무한 여성 천문학자다. 그러나 그는 죽을 때까지 천체 망원경을 거의 만져보지 못했다. 당시 천체 망원경 조작은 남성들의 전유물이어서이다. 여성학자들이 볼 수 있는 것은 남성 천문학자들이 촬영한 사진 건판(Dry plate·빛을 받으면 검게 그을리는 용액을 바른 뒤 말린 유리판을 망원경 뒤에 끼워 넣어 별빛을 검은 반점으로 남긴 판)뿐이다.

연극 <사일런트 스카이>의 크리스마스트리 같은 성운과 별무리 장면 / 국립극단

연극 <사일런트 스카이>의 크리스마스트리 같은 성운과 별무리 장면 / 국립극단

다른 존재의 인정 시너지 창출로

그는 왕성한 호기심과 끈기로 수년간 사진 건판 수천 장을 분석해 동료들과 변광성의 체계를 목록화했다. 맥동 변광성(맥박처럼 주기적으로 빛의 밝기가 변하는 별)인 세페이드 변광성(Cepheid variable star)을 분석해 또 다른 우주가 존재함을 입증해낸 것이다. 여성 참정권 투쟁이 겨우 거론되던 시대, 헨리에타는 많은 연구 업적을 이룩했음에도 주요 연구자로 학회에 참석하지 못했다. 사회적인 제약 속에서 동료들과 여동생 마거릿 레빗(홍서영 분)과 동료 피터 쇼(정환 분) 등은 그의 끈기와 연구에 문제를 제기하거나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며 함께한다.

작품은 밤하늘에 촘촘히 박힌 별처럼 시적이고 잔잔하다. 가족을 돌보거나 사진 건판을 분석하는 것이 전부였던 헨리에타의 삶을 무대화하기 위해 창작진은 그의 인생을 돌아보았다. 평생 흠모했던 천체 망원경 관측과 연구에 영감을 준 여동생 마거릿의 연주, 유럽 여행의 감동 등 그 삶의 인상적인 공간과 기억이 무대예술로 구현돼 마치 거대한 크리스마스트리처럼 따뜻하게 반짝인다. 마지막 장면은 헨리에타가 평생 거의 만져보지 못한 천체망원경을 통해 별을 관측하자 무대 전체에 별 무리와 성운이 가득 영사되는 장면이다. 크리스마스트리로 상징하는 꿈의 실현 같다.

<긴긴밤>은 고단한 삶과 사건 사고를 겪고 ‘긴긴밤’을 지새우던 등장인물들이 서로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 이야기를 또 다른 누군가와 나누기도 하면서 고통을 극복하는 사랑과 연대에 대한 작품이다. 새끼 펭귄이 관객들에게 세 아버지 이야기를 전하는 것도 긴긴밤을 극복하기 위한 몸부림일지 모른다.

<사일런트 스카이>에서 헨리에타가 가장 의지했던 여성 천문학자 윌러미나 플레밍(박지아 분)과 애니 캐넌(조승연 분)과의 젊은 시절 에피소드는 이 작품에서 가장 활기 넘치는 장이다. 서로 다른 스타일을 이해하고 인정하며 각자의 연구에 도움을 주던, 전혀 다른 존재들이 서로를 이해하며 시너지를 창출하는 과정이다.

명분 없는, 법리에 어긋난다고 평가되는 지난 12월 3일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는 3시간여 만에 여야 국회의원 190명의 동의로 해제됐다. 밤새 뉴스를 같이 본 아이와 새벽에 짧은 잠을 청했으나 여전히 잠이 오지 않았다. 긴박한 역사적 퇴행은 일단 마무리가 된 듯하나 새로운 문제가 산적해 있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우정은 친구와 적을 구별하지 않는 친구이면서 적이고 적이면서 친구가 될 수 있는, 친구와 적의 갈등과 해소를 동시에 포용하는 관계”라고 강조했다. 집단지성과 우정의 연대는 생각보다 큰 힘이 있다. <사일런트 스카이>는 12월 28일, <긴긴밤>은 2025년 1월 5일까지 상연한다.

<이주영 문화칼럼니스트·영상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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