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부 당시 청와대에서 일한 안종범 전 경제수석 비서관은 자신의 기록이 사초(史草)가 됐으면 한다고 했습니다. 실제 안 전 수석이 수기로 남긴 수첩은 정호성 전 청와대 부속비서관의 휴대전화 통화 녹음과 함께 박근혜 대통령 탄핵의 결정적 근거가 됐습니다. 감옥에서 나온 뒤 안 전 수석은 수첩 속 메모에 기반해 박근혜 대통령 탄핵 사건을 재구성하는 책 두 권(<안종범 수첩>·<수첩 속의 정책>)을 썼습니다.
정윤회씨와 최서원씨(개명 전 최순실)가 박근혜 정권의 비선 실세라는 이야기는 박근혜 정부 출범 전부터 정·관계나 언론 주변에서 떠돌았습니다. 그런데 당시 ‘공식’ 대선캠프에서 일하던 사람들을 취재했지만, 캠프 내에서 최씨나 정씨를 봤다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비선 국정농단이 사실로 드러난 건 JTBC가 최씨가 쓴 것으로 알려진 태블릿PC를 공개한 뒤였습니다. JTBC 보도가 나오고 1년쯤 뒤 포렌식으로 복구한 해당 태블릿PC의 전체 파일을 입수해 분석해보니 대선 시기 정씨 또는 최씨는 암호화된 구글 e메일을 통해 이른바 ‘문고리 권력 3인방’(안봉근·이재만·정호성 전 비서관) 등에게 지시를 했습니다. 이들을 포함한 7~8명이 별도의 비선라인을 만들었다는 물증이었습니다.
안 전 수석의 책들을 읽으며 2012년 대선 이후 이 비선 국정농단이 어떤 식으로 지속했는지 궁금했습니다. 대통령을 보좌하는 사람 중 적어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청와대 경제수석이 비선 국정농단에 관해 얼마나 알고 있었는지 궁금했습니다. 적어도 책에 기술된 내용만 놓고 보면 ‘비선 최순실의 존재’는 당시 청와대에서 근무하던 사람은 김기춘 비서실장을 비롯해 누구나 알고 있었지만, 입 밖으로 꺼내긴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책에는 JTBC의 첫 보도가 나온 다음 날 안 전 수석과 우병우 전 민정수석 등 3인이 모여 “최순실 문제에 대해 대통령이 직접 사과를 하라고 건의하러 가자”고 용기 내(?) 의기투합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모두 여사 문제를 알고 있었지만 아무도 말하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왜? 후보가 불같이 화를 내니까. 대신 누구누구가 비선이다, 여사와 어떤 관계다라는 소문만 횡행했다. 아닌 게 아니라 당사자들이 그걸 자랑스럽게 떠들고 다니기 때문이다.” 지난주 표지 이야기를 쓰기 위해 지난 대선 때 윤석열 캠프에 있었던 신용한 전 서원대 석좌교수를 만나 들은 이야기입니다. 기시감이 느껴지는 대목이었습니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