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인가, 공연 실황인가…화제의 ‘정년이’

2024.11.25

tvN 드라마 흥행몰이…‘판소리 뮤지컬’ 보는 듯 즐거움 선사

가진 건 없지만 타고난 소리꾼 정년(오른쪽·김태리 분)과 엘리트 코스를 걸어온 수재 소리꾼 영서(신예은 분)의 대결을 축으로 펼쳐지는 드라마 <정년이> / tvn 제공

가진 건 없지만 타고난 소리꾼 정년(오른쪽·김태리 분)과 엘리트 코스를 걸어온 수재 소리꾼 영서(신예은 분)의 대결을 축으로 펼쳐지는 드라마 <정년이> / tvn 제공

판소리 천재 소녀가 여성국극배우로 성장하는 과정을 그린 tvN 드라마 <정년이>에는 주인공 윤정년(김태리 분)이 처음 연기에 도전하는 장면이 나온다. 엉겁결에 <춘향전>의 방자 역을 맡게 된 그는 책을 읽듯 대사를 읊는다. “자아, 도오련님, 이것이, 제가 아까, 말씀드린….”

경멸하는 표정으로 정년을 바라보는 국극단의 엘리트 영서(신예은 분). 갑자기 능글맞은 미소를 짓더니 어깨를 들썩인다. “자 도련님, 이것이 제가 아까 말씀드린 삼남에서 제일가는 광한루올시다.” 바지춤을 추켜올리고 발을 방정맞게 구르는 것이 영락없는 방자다.

“내일부터는 지대로 해낼랑 게”라고 말하는 정년에게 영서는 차갑게 답한다. “어떻게 할 건데? 내가 보여준 방자를 흉내 낼 거야?” 공연까지 남은 기간은 열흘. 윤정년은 자신만의 방자를 찾아내 연기할 수 있을까.

1950년대 한국전쟁 후 최고의 국극배우에 도전하는 소녀들의 이야기를 담은 드라마 <정년이>가 시청자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고 있다. 여성국극은 여성 소리꾼이 여성과 남성 역할을 모두 소화하는 창극의 한 갈래로 춤과 연기의 비중이 큰 ‘판소리 뮤지컬’이다.

<정년이>의 전국 시청률(닐슨 코리아 집계)은 지난 10월 12일 첫 화 4.8%로 출발해 2~3화에서 약 두 배로 뛰더니 10화엔 14.5%로 같은 시간대 전 채널 중 1위를 기록했다. 유튜브 등 각종 플랫폼에서의 영상 누적 조회수는 약 4억2000만뷰.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검색 및 추천 플랫폼 키노라이츠의 인기도 집계에서도 11월 1·2주차 연속 1위다. <정년이>가 회차를 거듭할수록 화제인 이유는 뭘까. 배우들의 열연과 수준급 국극 무대, 여성들의 다채로운 성장 서사가 이 드라마의 힘이다.

■여성 배우들의 연기 차력쇼

드라마 주무대인 ‘매란국극단’의 연구생(연습생) 공연 날, 방자 연기를 고민하다 자취를 감췄던 정년은 공연 직전에야 나타나 합류한다. “히야~ 워메 워메! 아따 도련님, 멋들어져 갖고 그냥 넋이 홀~딱 빠져불겄쏘잉.” 그가 찾은 방자는 ‘관객을 웃기는 광대’. 익살스러운 표정과 슬랩스틱 코미디를 선보여 큰 박수를 받는다.

<정년이>는 한마디로 여성 배우들의 ‘연기 차력쇼’다. 차갑고 도도한 영서가 한순간에 <춘향전> 속 방자로 변신해 눈알을 떼굴거리는 장면, 정년이가 결국은 방자에 몰입해 연기 또한 천재임을 증명해 보인 장면은 온라인에서 큰 화제를 모았다. 정년과 영서는 이후 <자명고>의 남자 악역 ‘고미걸’, 평강공주 설화의 ‘온달’ 등을 자신만의 해석으로 선보이며 현란한 연기 대결을 펼친다. 여성국극계의 ‘왕자님’ 문옥경(정은채 분)이 선보이는 다양한 남성성 역시 눈길을 사로잡는다. 자신이 발굴한 정년에겐 부드럽고 따뜻한 ‘키다리 아저씨’인 그는 <자명고> 속 호동 왕자로서는 강인하고 박력 있는 남성상을 그린다.

배우들은 실제 ‘차력’에 비견될 만큼의 땀을 흘리기도 했다. 극의 몰입도를 높이기 위해 배우 김태리와 신예은은 오랫동안 판소리를 연마했다. 매란국극단의 간판스타로 분한 배우 정은채, 김윤혜(서혜랑 역) 역시 수준급의 판소리, 발림(소리꾼의 몸짓), 무용을 선보인다. 제작진은 국극 무대 연출자를 따로 두고 국극만 4~5차례씩 별도로 촬영했다고 한다. <춘향전>, <자명고>, <바보와 공주> 등 드라마 속 국극을 묶은 영상 클립엔 “드라마인가, 공연 실황인가”, “방구석에서 돈 안 내고 국극 공연을 보는 수준”, “국극이라는 잊힌 예술을 부활시켰다” 등의 댓글이 이어졌다. 배우들의 연기는 물론 판소리와 춤, 화려한 무대 세트와 의상 등의 풍성한 볼거리에 시청자들이 호응한 것이다.

극중극을 10~20분씩 과감하게 배치했지만 정년, 영서, 옥경, 혜랑 등의 인물이 서로의 연기에 감탄하거나 실수를 만회해 주는 등의 장치가 쉴 새 없이 이어져 지루하지 않은 것도 미덕이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국극을 잘 이해하지 못한 채로 그냥 보고 들으면 재미없었을 판소리, 연기 등의 세부적 요소들을 인물 간 대결 구도 등을 통해 드라마화했다”라면서 “여성국극의 매력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무대를 재현한 점이 이 작품의 큰 힘”이라고 말했다.

남자 주연 역할을 도맡아 여성국극계의 ‘왕자님’으로 불리는 옥경(정은채 분)은 여성팬들을 거느린 스타로 그려진다.  tvn 제공

남자 주연 역할을 도맡아 여성국극계의 ‘왕자님’으로 불리는 옥경(정은채 분)은 여성팬들을 거느린 스타로 그려진다. tvn 제공

■케미 다채롭지만…

다채로운 여성 서사도 인기 요소다. 정년의 라이벌 영서는 ‘득음’을 위해 목을 혹사하는 정년을 말리며 말한다. “내가 왜 이렇게 죽을힘을 다해서 노력하고 있는 건데. 난 네가 최고의 상태일 때 싸워서 이길 거야.” 목이 망가져 국극을 포기한 정년이 돌아오도록 설득하는 인물도 영서. 여적여(여자의 적은 여자)를 넘어서 서로를 자극하고 성장시키는 여성 라이벌 서사다.

정년이 국극단에서 한때 쫓겨나면서까지 보호하려 했던 ‘절친’ 주란과의 관계 역시 단순하지 않다. “난 네가 무서워. 네가 또 역할에 지나치게 몰입해 버릴까봐. 그럴 때 넌, 네 역할도 잡아먹어 버리고 상대역도 잡아먹어 버리고, 남는 건 윤정년 너밖에 없어.(주란·우다비 분)” 주란은 오디션 파트너로 영서를 택하면서 정년에게 좌절을 안기고, 이후 조급해진 정년은 서혜랑이 놓은 덫에 걸려 목소리를 망치게 된다.

조혜영 영화평론가는 “그간 여성의 성장을 다룬 드라마에선 남성 캐릭터가 뛰어들어 로맨스가 만들어지거나 조력 관계를 형성하는 패턴이 있었는데 드라마 <정년이>는 그런 것 없이도 여성들 간의 흥미로운 관계를 얼마든지 역동적으로 그려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고 말했다.

다만 여성국극을 전면에 내세웠으면서도 1950년대 전성기를 누린 여성국극이 의미하는 바는 제대로 담지 못했다는 평도 나온다. 조 평론가는 “전쟁에 나간 남자들을 대신해 가정경제를 일으켜야 했던 1950년대의 여성들은 기존의 성 역할을 뛰어넘을 수밖에 없는 시대를 살았다”며 “국극 무대에서 여성들이 다양한 남성성을 보여준 것처럼 당시 여성의 일상도 무대와 다르지 않았으며, 일상과 무대는 서로 연결돼 있다는 걸 보여주는 내용이 원작엔 있었으나 드라마에선 생략됐다”고 지적했다. 원작 웹툰 속에서 정년과 동성 연인으로 발전하는 ‘부용’, 남장 여자로 살아가는 ‘고사장’을 삭제하면서 당대의 ‘무대 밖’ 여성 이야기도 함께 지워졌다는 얘기다.

윤석진 충남대 국문과 교수 역시 “여성국극에 환호할 수밖에 없었던 전후 시대 평범한 여성들의 이야기가 담기지 않은 점이 아쉽다”면서 “배우들의 열연과 정년이를 중심으로 한 다양한 관계는 흥미로우나 드라마를 통해 무엇을 얘기하려고 하는지 초점이 불분명해 보이는 한계는 있다”라고 말했다.

<송윤경 기자 kyu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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