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시리즈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을 보면, 출연자 에드워드 리가 비빔밥을 영어로 설명하면서 “저는 이 흔한 요리를 특별하게 만들고 싶었어요”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여기서 “흔한 요리”는 영어 “such a common dish”를 번역한 것이다. 이걸 보며 문득 생각했다. 한국에 커먼(common)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있는가?
‘커먼’의 의미
영어 ‘커먼’은 라틴어 ‘communis’에서 온 말이고, 다른 서구어 대부분에도 비슷한 철자와 의미를 가진 단어가 존재한다. 메리엄 웹스터 영어사전이 이 말의 핵심 의미를 잘 정의해 놓았는데, ‘한 공동체나 그룹의 모든 구성원에게 공유되고 있는 것’ 정도로 옮길 수 있겠다. 여기에 정확히 일치하는 한국어 단어는 없다. 흔히 ‘공통’, ‘공동’, ‘일반’, ‘보통’ 등으로 번역하는데, 이런 단어에 원래 의미를 온전히 담기는 아무래도 어렵다. 커먼에는 ‘널리 퍼져 있는 것’이라는 의미도 있으니, 에드워드 리의 표현을 “흔한 요리”로 옮긴 것이 오역은 아니다. 하지만 단어의 기본 의미를 고려한다면, ‘한국인 모두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요리’로 이해하는 게 나을 것이다.
갑자기 커먼에 관한 이야기를 꺼낸 것은 이 말의 정치적 중요성 때문이다. ‘공동체(community)’와 ‘커먼’의 라틴어 어원은 같다. 공동체란 단순히 여러 개인이 모여 있는 상태가 아니라 모든 구성원이 무엇인가를 공유하고 있는 집단이다. 이것이 공화국으로 번역하는 ‘republic’의 오랜 의미이기도 하다. 이 말은 라틴어 ‘res publica’에서 왔는데, 여기서 ‘publica’의 의미는 커먼과 유사하다. 그래서 ‘res publica’는 옛날 영어에서 ‘commonwealth’로 번역되기도 했다. 언어의 변화는 복잡하지만, 커먼은 여전히 민주주의 공동체를 설명하는 가장 기초적인 개념으로 사용된다.
그런데 한국에 커먼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존재하는가? 같은 것을 공유하는 개인들의 공동체를 발견할 수 있는가? 누군가는 왜 당연한 것을 묻는지 의아해할지도 모른다. 한국인 대다수가 ‘우리’라는 의식을 공유하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 한국인’이라는 강력한 집단 정체성을 구성하지 않는가? 한국인만큼 공통의 언어, 역사, 문화를 널리 공유하는 집단이 지구상 또 어디에 있을까? 하지만 이러한 집단과 커먼에 기초한 공동체는 다르다. 특수와 보편, 요소와 전체, 개인과 집단 등에 관한 복잡한 철학적 논의들은 잊어버리고, 다소 유치하지만 아래 두 가지 그림을 비교해 보자.
커먼은 오른쪽 그림과 같은 상황을 지시한다. 서로 다른 개인들이 (a)라는 공통의 권리, 지위, 생각, 경험, 감정, 규범 따위를 공유하고, 이를 바탕으로 공동체를 구성한다. 반면 한국에서 집단이 만들어지는 방식은 왼쪽 그림에 가깝다. 공통된 (A)는 개인에게 속한 특성이 아니라 개인을 묶는 범주나 전체이고, 개인들은 (A)의 부분이 된다. 국가, 민족, 정치 진영, 집단적 이해관계 등이 모두 (A)로 기능할 수 있다.
물론 이 두 가지 형태는 완전히 분리된 것이 아니다. 대부분 사회에는 이 두 가지가 공존하고, 하나가 다른 하나로 쉽게 변형될 수 있다. 다만 민주주의 공동체는 기본적으로 오른쪽을 전제하고, 왼쪽으로 변형되는 것을 경계한다. 한국에서 오른쪽은 헌법에 존재할 뿐이고, 현실에서는 왼쪽이 압도적인 지배력을 행사한다. 흔히 이해관계를 위한 연합은 오른쪽을 따를 것이라 상상하지만, 한국에서는 그렇지 않다. 집단적 흐름에 불응하는 개인을 배신자로 낙인찍고 괴롭히는 의사 집단을 보라. 이들은 왼쪽 형태의 극단을 보여준다.
거대한 차이
두 그림의 결정적 차이 중 하나는 개인의 성격에 있다. 오른쪽에는 집단에 선행하는 개인이 있지만, 왼쪽에는 집단과 분리된 개인이 존재하지 않는다. 오른쪽의 개인은 상이한 두 가지 차원에 속한다. 하나는 타인과 공유하는 것들의 차원이고, 다른 하나는 외부와 공유하지 않는 자신만의 사적 차원이다.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개인, 그리고 온전한 개인으로서의 개인이 분리되는 것이다. 반면 왼쪽 그림의 개인은 사적 차원이 없다. 개인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가 집단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이들은 집단의 부분일 뿐, 엄밀한 의미의 개인이라고 할 수 없다. 한국인이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무례함과 폭력의 상당수가 여기서 비롯한다.
두 가지 형태가 소수자를 정의하고 다루는 방식도 다르다. 오른쪽의 개인은 공동체 구성원이라는 평등한 지위와 그에 결부된 권리들을 공유하는데, 이런 지위와 권리를 누릴 자질과 역량이 부족하다고 간주된 개인은 공동체에서 배제된다. 이들이 소수자라고 불린다. 민주주의란 이러한 배제를 최소화하고, 평등한 지위와 권리를 보편화하려는 정치 체제이자 운동이다. 왼쪽에는 이런 의미의 소수자가 없고, 힘 있는 강자와 힘없는 약자의 구별이 있을 뿐이다. 애초에 같은 지위와 권리를 평등하게 공유하는 개인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평등이라는 관념 자체가 존재하기 어렵고, 자유는 단순히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민주주의 공동체의 기본 구조를 보려면, 오른쪽 그림의 (a)에 ‘시민’을 대입하면 된다. 시민은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동등한 지위다. 그것은 집단의 이름이 아니라 개인의 속성을 부르는 이름이다. 시민이라는 같은 지위를 공유하는 서로 다른 개인들이 ‘공통의 것’을 결정하기 위해 대화하는 과정이 바로 정치다. 시민들이 하나의 공동체를 이룬다고 해도, 공동체의 한 부분으로 귀속되는 것이 아니다. 공동체의 존재 이유는 인간 개인의 존엄성을 지키고, 이들 사이의 평등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왼쪽 그림의 (A)에 ‘국민’을 넣으면, 현재 한국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여기서는 개인과 집단이 구별되지 않고, 국민이라는 하나의 명사로 불린다. 오로지 국민이 존재할 뿐이므로, 국민을 뛰어넘는 가치가 있을 수 없다. 국민의 이익을 위해 약자를 희생시키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자산 일부를 소비하는 행위와 다를 바 없다. 부분으로서의 개인은 필요에 따라 처분할 수 있는 수단일 뿐이다. 이런 식으로 노동자는 기계가 되고, 여성은 출산 동물로 취급받는다. 차별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애초에 국민이라는 집단에는 평등이라는 원리가 개입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수는 “국민의 먹고사는 문제”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믿지만, 여기서 “국민”이 정확히 누구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것이 커먼 없는 집단의 모습이다.
<박이대승 정치철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