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산물값 안정? 계약재배가 ‘답’이지만 적용 쉽잖아 ‘문제’

2024.10.21

계약재배, 농민과 농협 저마다의 이유로 활성화 지지부진

지난 5월 2일 서울 시내 한 대형마트에서 시민들이 과일과 채소를 살펴보고 있다. 조태형 기자

지난 5월 2일 서울 시내 한 대형마트에서 시민들이 과일과 채소를 살펴보고 있다. 조태형 기자

“배추 가격 2만2000원. 지금 ○○마트만 배추 비싼 게 아니고 시장이고 마트고 다 비쌈. (중략) 올해 김장 비싸서 못할 거 같음.”

지난달 말 여러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화제가 된 ‘배춧값 근황’이라는 글의 한 대목이다. 2만원대 배추는 일부 마트의 사례였지만, 배춧값의 고공행진은 사실이다. 통계청 ‘9월 소비자물가 동향’에 따르면 지난달 배추 가격 상승폭은 53.6%(지난해 같은 달 대비). 농수산식품유통공사(aT)의 통계도 유사하다. 배춧값이 가장 비쌌던 9월 27일(1포기당 9963원) 기준으로 배춧값은 평년 대비 38.05% 올랐다. 이후 배추 가격은 조금씩 내려 10월 8일 기준 1포기당 8758원이 됐지만, 여전히 평년 대비 17.91% 비싸다.

부실한 물가 관리에 대한 비판 여론이 들끓자 정부는 ‘수입 카드’를 꺼내 들었다. 올해 10월 말까지 중국산 배추 1100t을 들여오기로 한 것이다. 7~9월에 출하되는 고랭지 배추 생산량(30만~35만t 수준)을 고려하면 수입량은 많지 않다. 그러나 이런 대책은 ‘농산물 가격상승→수입’이 공식과도 같이 굳어져 있음을 보여준다.

기후위기로 인한 농산물 가격상승은 눈앞의 현실이지만, 합리적 해법 찾기는 녹록지 않다. 급등한 가격을 빠르게 낮추기 위해 수입을 과하게 늘리면 농가의 생산기반이 타격을 입는다. 그렇다고 높은 가격을 그대로 두면 취약계층의 부담이 커진다. 지난 9월 9일 주간경향 1595호 표지 이야기(대파·양파 ‘닥치고 수입’…기후 대응 이게 최선일까)는 ‘수입에만 과도하게 의존해 국내 농가가 타격을 입고 자급률이 줄어드는 악순환’을 다뤘다. 그렇다면 농산물 가격을 안정시킬 합리적 해법은 없을까. 속도는 느리지만, 농민과 소비자에게 모두 도움이 되는 ‘정공법’이 있다. 계약재배를 통해 공급량을 조절하는 방법이다.

■조금만 부족해도 크게 뛴다

농산물 가격 안정 해법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일단 농산물 시장의 특성부터 이해할 필요가 있다. 각종 통계를 종합하면 지난 9월 배춧값은 지난해 같은 달과 비교해 40~50% 뛰었다. 배추가 40~50% 부족해서였을까. 그렇지 않다. 농촌경제연구원에 따르면 7~9월에 출하되는 여름 배추(주로 고랭지 배추)의 올해 생산량은 32만2161t(농업관측센터 전망치)으로 평년보다 13.8%가 줄었다. 물량 부족분보다 가격이 더욱더 가파르게 뛰었다는 얘기다.

2022년 10월 강원도 홍천군의 한 고랭지 밭에서 이주노동자들이 비가 내리는 가운데 배추 수확을 서두르고 있다. /연합뉴스

2022년 10월 강원도 홍천군의 한 고랭지 밭에서 이주노동자들이 비가 내리는 가운데 배추 수확을 서두르고 있다. /연합뉴스

올봄 ‘금사과’ 대란을 겪었던 사과도 마찬가지였다. 지난해 사과 생산량은 39만4000t으로 평년(50만9000t)보다 22% 줄었다. 그런데 가격은 두 배 가까이 올랐다(올해 2월 가락시장 도매가격 기준).

공급이 조금만 부족해도 가격이 급격히 오르는 이유는 간단하다. 농산물은 공산품처럼 바로 찍어낼 수 없어 공급이 비탄력적이고, 비싸도 사지 않을 수 없기에 수요 역시 비탄력적이다. 수요·공급이 조금만 맞지 않아도 가격이 널뛸 수밖에 없다.

농산물이라고 공급조절 수단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가격이 오를 때는 공급량(출하량)을 빨리 늘려 폭등을 막고, 가격이 낮아졌을 때는 산지에서 폐기해 폭락을 막는 재배 방식이 있다. 생산자단체(주로 농협)와 생산자(농민)가 사전에 계약을 맺어 수급을 관리하는 ‘계약재배’가 그것이다.

농산물 수급을 오랫동안 연구해 온 농촌경제연구원의 최병옥 연구위원은 계약재배를 아파트 거래에 빗대 설명했다. “우리가 아파트를 계약하면 계약금, 중도금을 주고 아파트를 받으면서 잔금을 치르죠. 계약재배도 똑같아요. 농협과 농민이 사전에 계약서를 쓰고, 그 계약서 내용에 따라 계약금과 중도금 등이 오간 다음 농산물을 인도하면서 잔금이 오가는 거죠. 그런데 이 계약서는 시장가격이 치솟을 때 농산물을 빨리 인도하라는 ‘출하명령’을 내릴 수 있게 돼 있어요. 이때 출하된 농산물은 가격 폭등 전 사전 약속된 금액으로 거래되기 때문에 다양한 판매처에 시장가보다 더 싼 농산물이 나갈 수 있죠.”

문제는 낮은 참여율이다. 농촌경제연구원의 연구(‘채소 계약재배 활성화 방안’, 이용선 외 3인·2015)를 보면 정부가 계약재배를 채소가격 안정 정책으로 활용한 것은 1995년부터다. 제도 도입 후 약 30년이 흘렀지만, 현재 계약재배 물량은 전체 농산물의 20% 수준이다.

■계약재배, 이론적으론 좋은데…

계약재배는 왜 활성화되지 않을까. 농산물 수급 연구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첫 번째 이유는 계약 파기 사례가 적지 않아서다. 대학에서 농업경제학을 가르치는 A교수의 말이다. “농민들에게도 책임이 있어요. 계약재배에 참여한 농민이 가격 상승 시에 계약을 파기해버리는 경우가 많아요. 사전에 계약된 가격은 폭등한 가격보다 낮으니까요. 지역농협이 계약서에 따라 계약 파기한 농민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겠지만 그렇게 못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조합장 선거가 엮여 있기 때문이죠.”

농촌 현실을 생각하면 농민 탓만 하기도 어렵다. 2000년 이후 농가가 농산물을 판매하는 가격은 연평균 2.6% 높아졌지만, 재료비와 인건비 등 농사를 짓는 데 들어간 비용은 연평균 3.5%씩 상승했다(농촌경제연구원 ‘농식품 공급망에서의 물가 결정요인 분석 연구’, 김종진 외·2023). 지난 20여 년간 농가 경영이 악화 일로를 걸어왔다는 얘기다. 이런 상황에서 눈앞의 이득을 선택하는 농민이 적지 않은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울 수도 있다. 강선희 양파생산자협회 정책위원장은 “전남의 모범적인 농협들은 (가격 폭등 시에) 수익을 거둘 때 일정한 적립금을 제외한 나머지 금액을 농민들에게 환원하는 사업을 하고 있다”면서 “이것이 (계약 파기를 줄이는) 하나의 답이 될 수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1994년의 농협중앙회 건물. ‘농촌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지금의 농협은 농업협동조합이라는 이름이 무색할 만큼 지역 농산물 가공, 판매 등의 경제사업 분야는 허약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1994년의 농협중앙회 건물. ‘농촌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지금의 농협은 농업협동조합이라는 이름이 무색할 만큼 지역 농산물 가공, 판매 등의 경제사업 분야는 허약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계약재배 확대가 어려운 또 다른 이유는 농협에 있다. 지역농협들 가운데 판로를 충분히 확보해놓지 않은 곳은 시장 가격이 폭락할 경우 큰 손실을 보기 때문에 계약재배 확대에 잘 나서지 않는다. 최병옥 연구위원은 농협의 ‘실력차’를 이렇게 설명했다. “배추 가격이 뚝 떨어졌다고 가정할 경우 실력 있는 농협들은 시장가보다 높은 계약가에 배추를 사들이더라도, 절임배추 사업도 하고 김치공장이나 학교에 납품도 하고, 때로는 김치공장을 직접 운영도 하면서 어떻게든 손해 보지 않게 물량을 소화합니다. 뚝 떨어진 시장가의 적용을 받지 않는 ‘시장 외’로 물량을 빼내서 팔 능력이 있는 거죠. 그런데 대다수의 농협은 그럴 능력이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농업협동조합이란 이름에 걸맞지 않게 농협의 경제사업 분야(농산물의 가공·판매 등)가 전반적으로 허약해 계약재배를 감당하기 어려워한다는 얘기다.

지역농협이 하루아침에 판로 개척 등을 할 수 없는 만큼 계약재배 확대를 위해선 지역농협의 손실 부담을 낮춰줘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농촌경제연구원의 김원태 전문위원은 “농협중앙회나 정부에서 지역농협들의 손실분을 어느 정도 지원해주고 있지만 지금보다 더 메워줘야 농협들이 계약재배에 의욕적으로 나설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산지유통인을 아시나요

계약재배가 활발하지 않은 마지막 이유는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민간 계약재배’ 때문이다. 이른바 ‘밭떼기’라고 불리는 이 계약재배의 상대방은 농협이 아닌 산지유통인들이다. 배추를 예로 들어 살펴보면 이렇다. 농민은 씨앗을 뿌려 모종을 키운 뒤 밭에 옮겨심는다. 이후 일정 기간이 지나면 산지유통인과 밭째 거래를 하는데, 이 거래 이후 배추를 키우고 수확하는 주체는 농민이 아닌 산지유통인이다. 산지유통인이 배추밭 근처에 상주하면서 이주노동자 등을 고용해 나머지 농사를 짓고 수확한 배추를 유통하는 식이다.

밭떼기 거래는 가격 폭락 시 자취를 감추는 등 계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는 산지유통인들 때문에 언론에 부정적으로 비쳐왔다. 그러나 판로에 대한 걱정 없이 안정적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다는 이점 때문에 밭떼기 거래를 선호하는 농가는 여전히 많다. 산지유통인 입장에선 가격 폭락 시 손해를 보지만 가격 급등 시 떼돈을 벌 수 있다. 지역에 뿌리를 둔 산지유통인은 지역 농민에게 담보나 계약서 없이 자녀 학자금을 융통해주는 등 사금융의 역할까지 하는 사례도 있다고 한다. 품목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고랭지 배추와 무의 경우 70~90%가 밭떼기 거래로 유통되고 있다.

문제는 산지유통인과의 계약과 농협과의 계약이 ‘경쟁’ 관계에 있다는 점이다. 농촌경제연구원의 최병옥 연구위원은 “10년 전에도 지난달처럼 배추가격이 급등하는 배추파동이 일어 농협중앙회가 계약재배 확대에 대대적으로 나섰지만, 산지유통인이 더 높은 계약가를 제시하는 사례가 많아 결국 성과를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산지유통인의 거래를 양성화해서 그들이 계약하는 물량을 공개하게 하고, (가격 급등락 시) 출하량 조절 대상에 제대로 포함할 수 있다면 수급정책은 어느 정도 작동할 수 있을 것”이라면서 “다만 산지유통인 조직들도 요구 조건(저장창고 시설 지원 등)이 있어서 정부가 이들의 거래까지 정책 대상으로 편입시키기엔 걸림돌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

<송윤경 기자 kyu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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