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페이크 성착취물 사건’은 오래된 물웅덩이를 휘젓듯이 사회를 헤집었다. 사회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더럽고 나쁜 온갖 것이 수면에 떠 올라 소용돌이쳤다. 뉴스도 세상을 따라 회오리쳤다. 기사가 어지럽게 쏟아졌다. 그래도 세상을 아름답게 보자고 다짐할 때마다 왜 한 번씩 이런 일이 일어날까. 경악하며 뉴스를 읽어가다가 어떤 기사 위에서 시선이 오래 흔들렸다.
‘딥페이크 관련주’가 상한가를 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솔직히 나는 이 뉴스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아직도 모르겠다. 구체적으로 뜯어보면, 정부가 딥페이크 성착취물을 엄벌하겠다고 하자 보안 관련주 주가가 올랐다는 내용이다. 건조한 팩트일 뿐이다. 하지만 어떤 기사들에서는 활자들이 신난 듯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눈길’, ‘반짝’, ‘날개’, ‘고공행진’ 같은 제목을 단 기사들 말이다. ‘딥페이크’라는 단어 옆에 저 말들이 있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게 이상한 일이냐고 누군가는 되물을지도 모른다. 나만 께름칙한가 싶어서 나름 열심히 생각해봤다. 돈이 힘이자 뜻이고 의지인 이 사회에서, 투자자들은 딥페이크 피해를 막을 기술을 가진 업체들에 정의로운 응원의 마음을 모아준 것일 수도 있다. 백번 좋게 해석했을 때 그렇다는 말이다. 자본은 감정이 없다. 뜨거우니 모였고, 식으면 떠날 뿐이다. 철저한 수사와 처벌, 재발 방지, 구조적 성차별 해소 같은 데에 자본은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도 자본과 관심사가 비슷한 것 같다. 철저한 수사와 처벌, 재발 방지, 구조적 성차별 해소 같은 것들에 앞서 ‘관련주’를 검색하는 사람들. 그것이 ‘아주 이상한 일까지는 아닌’ 세계. 시대의 관심에 호응해 날개 달고 고공을 오르며 기사를 쓰는 우리 기자들. ‘아주 이상하지는 않은’ 이 관련주 세계관에서 사람의 얼굴은 희미하다.
딥페이크 성착취물 사건과 관련주 세계관 사이에는 어떤 선이 그어져 있을까. 타인을 살아 숨 쉬는 인간이 아니라 성적 대상물로 여기는 딥페이크 범죄와 울고 있는 피해자를 소거한 채 돈의 급등세만 따라 들뜨는 관련주 세계관은, 얼마나 멀까. 서로 관련 없어 보이는 두 나무의 뿌리가 아주 깊은 땅속에서 닿아 있는 모습을 상상한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풍경이다. 세월호 참사에서 아이들이 죽을 때 누군가는 유족의 보험금을 산정해 신속하게 보도했다. 우크라이나에서 꼬마가 미사일에 맞아 머리가 터져 죽을 때 관련주는 뉴스를 바삐 오르내렸다. 2022년 미국에서는 초등학교 총기 난사 사건 이후 총기회사 주가가 급등했다. 이태원 참사 때도 누군가는 관련주를 꼼꼼히 정리해 올렸다. 용역 깡패가 철거민을 쫓아내면 개발 호재이고 기후위기, 전염병, 지진 같은 재난도 관련주 앞에서는 일개 종속변수처럼 보인다. 이미 그런 세계다.
혼란스럽고 께름칙해 글을 쓰고 있지만 나도 떳떳하지는 못하다. 이 풍경의 공범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다만 우리가 이런 거로 최소한 떳떳해 하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사람의 얼굴이 계속 흐릿해지는 세상에서, 앞다퉈 냉소하지는 않기를.
<조해람 정책사회부 기자 lennon@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