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본토 일주일 넘게 공격…일부 전문가 ‘위험한 오판’ 경고도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러시아의 허를 찔렀다. 2년 반째 이어지는 러시아와 전쟁에서 고전해온 우크라이나군이 러시아 본토로 진격하는 과감한 ‘역습’을 단행했다.
하루 이틀 정도 ‘치고 빠지는’ 도발에 그칠 것이란 전망과 달리, 우크라이나는 지난 8월 6일(현지시간) 러시아 국경을 넘은 후 일주일 넘게 공세를 이어가며 러시아 쿠르스크주, 벨고로드주 등 국경지대 마을을 속속 장악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전쟁이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War is coming home)”고 말했다.
우크라이나군은 기습 일주일째인 지난 8월 12일 접경지역 러시아 영토 1000㎢를 장악했다고 주장했다. 이는 서울시 면적(605㎢)의 약 1.65배에 해당한다. 그 이튿날엔 74개 마을을 점령했다며 러시아가 ‘공정한 평화’에 동의하면 러시아 영토 공격을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우크라이나는 이전에도 친우크라이나 민병대 등을 동원해 산발적으로 국경을 넘어 기습 공격하거나, 수도 모스크바 등을 겨냥해 드론 공격을 가하는 등 러시아 본토에 대한 공격을 몇 차례 시도한 바 있다. 그러나 그때마다 공격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번 공격은 2022년 개전 이후 러시아 본토 공격으로는 최대 규모인 데다 우크라이나 정부가 이를 공개적으로 선언한 것 역시 이례적이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진격 닷새째인 지난 8월 10일 밤 연설을 통해 러시아 공격을 처음으로 확인했고, 이 공격이 “침략자에게 필요한 압박”이라고 주장했다. “러시아는 다른 나라에 전쟁을 몰고 왔고, 이제 그 전쟁을 돌려받고 있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국방부는 자국 병사가 쿠르스크주의 한 마을의 관공서에서 게양된 러시아 국기를 내리고 우크라이나 국기를 게양하는 영상을 공개하기도 했다.
러시아는 예상치 못한 기습에 적잖게 당황하는 모습이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처음으로 외국군에 자국 영토를 공격받은 러시아는 부랴부랴 예비 병력을 끌어모으는 등 대처에 나섰지만, 무방비 상태에서 허를 찔린 까닭에 사실상 초기 대응에 실패했다. 접경지역에 비상사태와 대테러 작전 체제가 발령됐으나, 수십개 마을을 빼앗겼고 12만명이 넘는 주민이 대피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공격 일주일 만에 세 차례나 직접 상황 회의를 주재하고 대응을 지시했다. 푸틴 대통령은 서방이 우크라이나를 통해 러시아를 공격했다고 날을 세웠다. 그는 “서방은 우크라이나의 손을 빌려 우리와 싸우고 있다”며 “분명 적은 미래에 협상 지위를 끌어올리려 애쓰고 있다”고 말했다.
우크라, 전선 확대 이유는
젤렌스키 대통령은 이번 공격으로 “그들(러시아)도 자신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느껴봐야 한다”고 언급했으나, 이번 작전의 목표는 분명하게 밝히지 않았다. 다만 지난해 야심 차게 준비했던 ‘여름철 대반격’이 실패로 돌아가고 올해도 주요 전선에서 거듭 고전하는 상황에서 우크라이나는 오랜만의 승전보에 한껏 고무된 분위기다.
전문가들은 오는 11월 미국 대선이 치러지기 전 국제사회의 관심을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끌어오고, 향후 러시아와의 협상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우크라이나가 이번 공격을 단행했다고 분석했다. 미 공화당 대선후보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자신이 재선에 성공할 경우 취임 24시간 안에 우크라이나 전쟁을 끝내기 위한 협상을 하겠다고 공언해왔다. 미국은 우크라이나의 최대 무기 지원국으로, ‘미국 우선주의’를 주장하며 우크라이나 지원에 부정적인 태도를 피력해온 트럼프의 재집권은 우크라이나에 그 자체로 ‘악몽’이 될 수 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의 전쟁으로 국제사회에서 우크라이나가 점차 뒷전으로 밀리는 가운데 이번 작전이 서방에 무기 지원을 촉구하기 위한 행동이라는 해석도 있다. 젤렌스키 대통령도 자국군의 성과를 강조하며 장거리 미사일로 러시아 본토 깊숙이 공격할 수 있게 해달라고 서방에 재차 호소했다. 그간 서방은 우크라이나에 에이태킴스(ATACMS), 스톰섀도와 같은 장거리 미사일을 지원하면서 전쟁이 자칫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대 러시아’의 직접 대결로 번질 것을 우려해 이들 무기로 러시아 본토를 타격하지 말라는 조건을 내걸었다. 장거리 미사일로 러시아 본토 공격은 하지 말고 방어만 하란 얘기다.
러 본토 공격, 전세 바꿀까
무리한 전선 확대가 ‘전세를 바꿀 승부수’보다는 ‘위험한 도박’에 가깝다는 평가도 나온다. 우크라이나군은 이번 진격으로 우크라이나 동부전선에서 러시아 군사력의 분산을 노린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 본토에 새로운 전선을 구축해 수세에 몰렸던 동부전선에서 돌파구를 마련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전략이 자칫 우크라이나의 병력 분산까지 초래할 수 있다는 평가도 있다. 동부전선에서 러시아의 공격을 막아내기도 벅찬 상황에서 과감한 전선 확대에 나섰다가 오히려 자국 영토를 더 빼앗길 수 있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군이 여전히 병력과 무기에서 열세를 보이는 상황에서 이런 전략적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만큼 장기간 러시아 영토를 점령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우크라이나군은 쿠르스크주 점령지역에서 참호를 구축 중인 것으로 전해졌는데, 이곳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버티기’에 들어갈 가능성도 있다.
일부 군사 전문가들은 러시아 안에서의 장기 작전이 심각한 오판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모스크바에 주재했던 영국의 전 국방무관 존 포먼은 “그들이 그것(장악한 러시아 땅)을 계속 고수하려 하지 않길 바란다”면서 “계속 타격을 입고 ‘피로스의 승리’(너무 많은 희생을 치르고 얻은 승리)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존 나글 미국 육군대학원 교수는 “우크라이나는 자국이 치르는 전쟁에 대한 세계의 관심을 원하고, 여전히 그들이 싸우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면서도 “다른 지역의 전황을 고려했을 때, 이번 작전의 논리가 의심스럽다”고 지적했다. 마이클 클라크 영국 왕립합동군사연구소 연구원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이 이와 비슷한 과감한 반격 전략이었으나, 인천상륙작전과 달리 이번 역공은 전쟁의 판세를 뒤집을 수 없을 것”이라며 “러시아 침공은 지금껏 젤렌스키가 내린 가장 위험한 결정”이라고 평가했다.
<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