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서로 인정하며 평화롭게 살기’ 가능할까

이주영 문화칼럼니스트·영상학 박사
2024.08.19

뮤지컬 <영웅>·<빨래>·<접변>

뮤지컬 <영웅> 공연 장면 / 에이콤.

뮤지컬 <영웅> 공연 장면 / 에이콤.

매일 서울 대학로에서 공연을 관람하다 보면 아시아 속의 한국을 실감한다. 일본과 중국, 홍콩, 대만계 관객들을 매일 접하기 때문이다. 휴가철에는 단체 관람객이 급증해 색다른 경험도 한다. 대학로 유니플렉스 2관에서 공연 중인 뮤지컬 <빨래>(추민주 작·작사·연출, 민찬홍 작곡, 서정선 안무, 여신동 무대)가 그러했다. 중국, 대만, 일본 관광객들 사이에서 필자를 비롯한 한국인 관객은 소수였다. 한국인지, 홍콩인지, 대만인지 혼돈이었으나 그래서 더 흥미로웠다.

2005년 초연된 뮤지컬 <빨래>는 한국을 대표하는 창작 뮤지컬이다. 타지에서 모여든 서민들이 ‘만만치 않은 서울살이’의 애환을 안고 서울 외곽 낡은 다세대 주택에 모여 살며 겪는 군상극(하나의 주제를 여러 등장인물이 각자의 시선으로 풀어나가는 형태)이다. 지방에서 올라온 나영과 몽골 출신 솔롱고가 부르는 ‘참 예뻐요’는 아시아 가요로 통할 정도로 유명하다.

“한국인의 ‘정’, 아시아 정서로 확대”

중국과 일본 등에서 여러 번 라이센스 공연됐고, 한국어 교재로 사용돼 해외에서 더 유명한 작품이다. 한국에 오면 오리지널 공연을 봐야 한다는 불문율이 있어 <빨래> 공연장은 늘 아시아인들로 붐비지만 정작 내용은 지극히 한국적인 ‘정’을 다룬다.

타향살이에 지친 사회적 약자들의 설움과 그 속에서도 피어나는 연민과 연대가 매 순간 코끝을 찡하게 한다. ‘서울살이 몇 해인가요?’, ‘비 오는 날이면’ 등의 유명한 넘버들은 폭소와 오열을 오가며 마음 근육을 다지게 돕는다. 몽골인 솔롱고, 필리핀인 마이클을 비롯해 다양한 국적과 다양한 지역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낡은 주택은 타향살이를 넘어선 이민자들의 터전이다. 국적 불문 인간 대 인간으로 서로를 보듬고 다독이며 사는 이야기 구조 속에 한국적인 ‘정’이 갈등의 해결책으로 등장한다.

놀라운 것은 아시아 각국에서 온 관객들이 그 복잡한 정서를 정확히 이해하고 공감한다는 사실이다. 필자가 관람한 회차에는 홍콩에서 온 단체 관람객과 대만 관객이 많았다. 청장년이 섞인 이 관람객 중에는 커튼콜이 끝나고 나서도 오랫동안 멈춰 서서 무대를 바라보며 탄사를 거듭하는 이도 있었다. 작품의 여운을 만끽하는 자세가 아름다워 필자도 함께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한국적 정서가 아시아의 정서로 확대되는 순간이었다.

문화예술을 통한 아시아 연대를 전략적으로 풀어낸 공연은 올해 15주년, 열 번째 시즌을 맞이한 창작 뮤지컬 <영웅>(한아름 작·작사, 김민영 연출, 오상준 작곡, 이란영 안무, 박동우 무대)이다.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 전후 1년여 시간을 다루는 <영웅>은 윤제균 감독의 뮤지컬 영화 <영웅>(2022)을 통해 빠르게 대중화됐다. ‘장부가’와 ‘누가 죄인인가’ 등 대표 넘버들을 모르는 이는 거의 없다.

안중근 의사의 구국 결의와 당시 일제강점의 부당함을 세계만방에 알린 재판 항쟁이 생생한 넘버들이다. 뮤지컬 <영웅>이 여느 독립운동가 서사와 다른 것은 안중근 의사의 국제 정치 감각을 담은 미래지향적 넘버 ‘동양평화’ 때문이다.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후 일본인들로만 구성된 재판장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대한제국 의용군 참모중장으로서 적군의 장수를 죽인 것이니 전쟁포로로서 군사재판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국가 대 국가로서 자국을 지키기 위한 행위였음을 세계에 알리기 위한 것이다. 또 그는 “간절히 원하는 것은 한·중·일 삼국이 서로를 침범하지 않고 인정하며 평화롭게 사는 동양평화”라고 역설했다. 동아시아가 서구식민주의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방향성이라는 것이다.

<영웅>은 프로덕션 과정에서 작은 ‘동양평화’를 실천하고 있다. 하얼빈 의거 직전 중국인 조력자로 안중근을 보호하다 사망하는 가상 인물 왕웨이와 안중근 사형집행 과정을 지켜본 실존 인물 치바 도시치 역으로 실제 화교 배우 왕시명과 일본 배우 노지마 나오토를 캐스팅했다. 노지마 나오토는 윤제균 감독의 영화 <영웅>에서 같은 역할로 열연한 바 있어 화제가 됐다.

안중근의 뤼순 감옥 구금 당시 간수였던 치바 도시치는 안중근을 흠모해 고뇌했고, 안중근은 사형집행 전 유묵(생전에 남긴 글이나 그림) ‘위국헌신군인본분(爲國獻身軍人本分·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이 군인의 본분이다)’을 남겨 그를 다독였다고 전해진다. 실제 치바 도시치는 안중근 순국 후 유묵과 함께 제를 지내고 자신의 사후에도 이어지도록 유언했다고 한다.

더블 캐스트인 왕웨이 역과 달리 치바 역은 원 캐스트이다. 배우 노지마 나오토는 공연이 올라가는 3개월 가까운 시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안중근의 순국 장면을 보필하고 끝까지 지켜보는 치바 연기를 반복한다. 안중근 역할의 세 배우들(정성화·양준모·민우혁)과 함께하는 치바의 ‘동양평화’ 이중창과 연이은 감정선을 볼 때마다 필자는 가슴이 벅차오른다. 매일 치바로 살아가는 노지마 나오토 배우와 뮤지컬 <영웅>의 창작·출연진들, 그리고 이를 마주하며 매일 공연장을 찾는 관객들의 존재 자체가 소소한 ‘동양평화’의 순간들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안중근 소원, 대학로에서 실현”

국내 첫 중국 창작 라이센스 뮤지컬인 <접변>(이기쁨 연출, 한재은 윤색, 이진욱 편곡·음악, 신선호 안무)은 아시아 문화예술계의 화합과 연대를 통해 제작된 작품이다. 중국 제작사인 포커스테이지 첫 한국 진출작으로 국내 중견 제작사 네버엔딩플레이와 협력해 대학로에 연착륙한 웰메이드 작품이다.

1930년대 말 중화민국 시대 상해를 배경으로 홍콩과 만주를 넘나드는 밀정을 통해 일제강점기 동아시아의 정세를 스릴러 형식으로 담아낸 여성 중심 서사다. 당시 시대상을 그대로 재현한 프로덕션 디자인과 중국풍의 넘버들이 밀도 높은 서사로 전개된다. 포커스테이지는 이를 위해 한국에 지사를 설립하고 네버엔딩플레이 등 한국 제작사들과 협력을 확대해 범아시아 콘텐츠 창작에 주력할 계획이라고 밝힌 바 있다.

안중근은 순국 직전까지 “나의 행위는 동양평화를 위해서다. 한·일 국민이 협력하고 평화를 도모하기를 희망한다”고 유언했다. 그의 유일한 소원은 2024년 한국 대학로를 비롯한 공연장에서 아시아 각국의 작품과 창작진, 관객들의 화합과 참여로 소소하게 실현되는 중이다. 뮤지컬 <영웅>은 8월 11일, <접변>은 9월 22일, <빨래>는 12월 29일까지 상연한다. 뮤지컬 <영웅> 공연실황 영화도 전국 메가박스에서 오는 8월 21일 개봉한다.

<이주영 문화칼럼니스트·영상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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