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은 전례 없는 고요한 시대를 살고 있다. 작은 사건은 계속되지만, 거대 사건으로 발전하는 경우가 별로 없다.
거대 전선의 실종
현 정부도 이른바 보수로 분류되지만, 과거 보수 정부와는 몇 가지 차이가 있다. 이명박은 집권하자마자 소고기 수입 반대 촛불시위에 직면했고, 국정원 여론 조작 사건은 박근혜 정부 초기부터 대중적 저항을 촉발했다. 탄핵의 직접적 계기는 세월호 참사와 국정 농단이었지만, 보수 정부를 향한 폭발적 저항의 잠재력은 항상 존재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윤석열 대통령 탄핵을 요구하는 국회 입법 청원이 100만명을 넘겼지만, 예전과 같은 대규모 저항 운동으로 발전할 가능성은 커 보이지 않는다. 원인은 다양할 것이다. 현 정부가 보여주는 극도의 무능력과 취약한 지지기반이 오히려 저항의 필요성을 제거하고 있는지 모른다. 굳이 거리로 나가 촛불시위를 하지 않아도 그들을 충분히 저지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또는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반감 때문일 수도 있다. 윤석열 반대는 곧 이재명 지지라고 이해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이유가 무엇이든 과거처럼 ‘진보’와 ‘보수’가 격돌하고, 대통령을 지키려는 집단과 끌어내리려는 집단이 정면충돌하는 양상은 보이지 않는다.
이미 지나간 과거처럼 생각되지만, 미투 운동이 한국을 휩쓴 것이 불과 6년 전이다. 성폭력 가해자가 한 명씩 폭로될 때마다 그를 방어하는 진영과 규탄하는 진영이 나뉘어 격렬하게 대립했다. N번방 사건을 계기로 폭발한 온라인 페미니즘은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듯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흔적을 찾기 힘들 정도로 급격히 쇠퇴했다. 반페미니즘 집단의 황당한 난동과 노골적인 페미니즘 사냥이 정기적으로 반복되지만, 그에 대한 사회적 통제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제 페미니즘은 거대 전선을 형성하는 기표가 아니라 일방적 공격의 대상이 돼버렸다.
지금은 노동 운동의 사회적 영향력이 극도로 축소됐지만, 늘 이랬던 것은 아니다. 2011년 희망버스를 떠올려보자. 한진중공업이 대규모 정리해고를 발표하자 노동조합은 총파업에 들어갔고, 김진숙 지도위원은 크레인에 올랐다. 이들과 연대하기 위해 수많은 시민과 정치인이 부산으로 향했다. 2014년에는 가수 이효리가 쌍용차 해고 노동자를 응원하며 티볼리 광고 모델을 자원하기도 했다. 이 당시 비정규직과 정리해고는 노동조합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10년이 지난 지금, 노동 문제를 공개적으로 언급하는 연예인은 상상하기 어렵다.
방금 말한 사례들의 성격과 전개 과정은 제각각이지만, 한 가지 비슷한 경향을 보여준다. 거시적 갈등과 대중 운동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한국은 헤게모니 경쟁의 전형을 목격할 수 있는 곳이었다. 일관성과 체계성 없는 국가 제도는 사회 갈등을 효과적으로 관리하지 못하고, 무슨 문제만 생기면 사회 전체가 두 진영으로 나뉘어 적대 전선을 형성하기 일쑤였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런 식의 거대 전선이 보이지 않는다. 물론 평화의 시대가 시작됐다는 말은 아니다. 사회적 참사와 노동 사고는 반복되고, 불평등은 여전하며, 삶의 공간은 온갖 분쟁으로 가득 차 있지만, 예전처럼 모두가 둘로 나뉘어 싸우지는 않는다. 이게 일시적인 소강상태인지, 영구적인 상태 변화인지는 알 수 없다.
미시적 분쟁의 시대
대규모 사회 갈등이 사라진 후에 공적 공간을 채우고 있는 것은 온갖 종류의 스캔들이다. 지금 언론의 정치면을 채우는 사건들을 보라. 연예면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거의 다르지 않다. 물론 정치인들은 언제나 서로 욕하고 싸웠다. 하지만 예전에는 개별 분쟁이 거대 전선에 종속되는 경향을 보였다면, 지금은 개인 간의 말싸움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여당과 야당의 경쟁, ‘보수와 진보의 대결’ 같은 거시 구도에서 사건이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정치인의 개인사 같은 성격을 가진다는 말이다. 거기서도 갈등과 대립 전선이 만들어지지만, 특정 지지 집단의 범위를 넘지 않는다.
유명인 스캔들은 끊임없이 터지는데, 그럴 때마다 소규모 전선이 만들어졌다가 사라진다. 두 연예인이 사귀다가 이별하면 각자를 응원하는 팬덤 간 갈등이 발생하는 식이다. 흥미로운 것은 보통 사람도 이런 미시적 분쟁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만일 당신이 동네에서 ‘주차 빌런’을 만났다고 해보자. 과거에는 이런 개인사가 사회적 문제로 다뤄지려면, 사회구조 일반을 대표하는 성격이 부여돼야만 했다. 하지만 요즘엔 다수의 공분을 끌어낸다면 무엇이든 공적 사건이 돼버린다. 연예인이 불륜 상대자의 악행을 폭로하는 것처럼 이제는 모두가 일상의 빌런을 규탄하고, 자신의 소규모 팬덤을 형성할 수 있다. 언론은 거기서 적극적 역할을 한다. 온라인 공간에는 잡다한 사연들이 떠돌아다니는데, 전통적인 주류 언론조차 그런 사연을 날 것 그대로 판매한다.
주요 의제가 다뤄지는 방식도 달라졌다. 불평등은 그 어떤 정치인도 피해갈 수 없는 거대 주제였지만, 이재명 후보의 당대표 출마선언문에는 불평등이라는 말이 단 한 번, 구색 맞추기로 나올 뿐이다. 당연히 불평등 해소를 위한 큰 공약도 없다. 이는 물론 정치인 개인의 변화가 아니라 시대의 변화를 반영한다. 이제 불평등도 미시적 분쟁의 주제 중 하나가 됐다. 요즘 어린이 사이에 ‘개근 거지’라는 신조어가 유행한다고 해서 많은 사람이 충격을 받았다. 이 사건이 다뤄지는 방식은 여느 ‘SNS 화제’나 ‘인터넷 논란’과 다르지 않다. 시민 개인이 온라인 커뮤니티에 자신의 경험담을 올리면, 다른 이들이 집단적 분노를 표현하고, 언론이 뉴스로 가공해 보도한다. 하지만 ‘공동체는 어떻게 사회경제적 불평등에 대응해야 하는가?’라는 정치적 질문으로 전환되지는 않는다. 사건은 ‘개인의 불쾌한 경험’이라는 범주를 벗어나지 않으며, 콘텐츠 상품으로 소비된 후 잊힐 뿐이다.
지금까지 말한 변화를 좋다 나쁘다 평가하기는 어렵지만, ‘시대가 변했으니 그대로 인정하자’고 말할 수도 없다. 앞서 말한 적대 전선과 대규모 대중 운동은 한국을 움직이는 동력이면서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기도 했다. 거시적 갈등은 제도의 실질적 변화보다는 상대 진영의 제거에만 몰두한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조용한 지금이 더 낫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과거의 동력이 새로운 동력으로 대체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은 안정기로 들어온 것인가, 변화의 동력 자체를 상실하고 있는 것인가?
<박이대승 정치철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