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국가폭력 기억 계승에 고뇌하는 청춘

이주영 문화칼럼니스트·영상학 박사
2024.07.08

연극 <연안지대>·<빵야>·뮤지컬<사월> 등

연극 <연안지대> 공연 장면 / 서울시극단 제공

연극 <연안지대> 공연 장면 / 서울시극단 제공

고통스러운 기억을 무대 위에서 재현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포스트 메모리 세대(전쟁이나 국가폭력을 직접 겪지 않고 구전이나 글로 접한 세대)의 관점에서 재해석한 근현대사 배경 무대극은 기억과 애도에 머물지 않는다. 연극 <연안지대>·<적벽대전>·<빵야>, 뮤지컬 <사월> 등은 청산하지 못한 국가폭력의 결과물과 이를 짊어지고 사는 동시대 현대인들의 ‘기억 계승’을 다룬다. 후세가 떠안는 무거운 짐들의 ‘뒤처리’에 대한 미학적 변주다. 연극 <미궁의 설계자>·<나는 광주에 없었다>는 기억을 각인하게 돕는 체험에 방점을 둔다. 군부독재 당시 폭력적 현장을 관객들이 생생하게 느낄 수 있도록 관객 몰입형 미장센과 동선을 안배했다.

연극 <연안지대>(와즈디 무아와드 원작·김정 연출)는 아버지 이스마일(윤상화)을 안장하기 위해 그 시신을 껴안고 세상을 떠도는 아들 윌프리드(이승우) 이야기다. 전쟁의 공포를 듣고 자란 레바논 출신 캐나다 작가 와즈디 무아와드는 폭력에 대항하는 문제의식을 전쟁 4부작에 담아냈다. <연안지대>는 그중 1부에 해당하는 작품으로 한국 초연이다. 김정 연출이 “매우 키치(Kitsch)하다”고 표현할 정도로 분절적이고 장황하다. 성적 표현과 잔혹함으로 점철된 무아와드의 극작은 한국적 가치관과 동시대 문제의식과 만나 코믹하지만 서늘하고, 슬프지만 몽환적인 미장센으로 다시 태어났다.

■ 아버지 세대가 남긴 폭력의 잔재 애도

아버지 시신을 고향에 안장하지 못하게 막는 가족들의 전쟁 같은 이기주의는 한국의 막장 드라마 같다. 김정 연출가는 이를 과감한 신체 연극과 코믹한 대사, 급박한 리듬으로 표현해 관객들의 혼을 빼놓는다. 무대 위 영혼으로 등장하는 부모의 비호 아래 아버지가 남긴 편지를 읽으며 정체성을 되찾아가는 윌프리드는 비로소 가족과 자아를 되찾는다. 무거운 아버지 시신을 안고 무대 위 시간과 현실의 시간을 함께 버티는 아들은 비슷한 처지의 전쟁고아가 이고 온 무거운 전화번호부와 마주한다. 죽은 이들을 기억하기 위해 그들의 이름을 적은 책자다. 아버지의 이름을 발견하고 통곡하는 윌프리드와 다른 전쟁고아들은 아버지 세대가 남긴 폭력의 잔재를 정리하고 애도한다. 그래야 자신도 살 수 있어서다.

한국전쟁을 전후한 근현대사를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연극 <적벽대전>(류기형 작 연출·마당극패 우금치)은 한국적 ‘연안지대’라고 볼 수 있다. 아버지 이즈마일의 시신을 대신하는 존재는 국가폭력에 의해 학살돼 대전 산내 골령골에 매장된 7000여명 원혼이다. 아들 윌프리드는 이를 안장하고 위로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동시대 유가족들이다. 작품은 1945년 해방기부터 한국전쟁기까지의 혼돈을 연대기적으로 장면화하며 희생자들을 위무하고 유가족의 아픔을 달랜다. 1시간 반 동안 이어지는 진혼굿과 황토 구덩이에서 기어 나오는 원혼의 고통, 유가족의 통곡은 대전 마을 주민 입장에서 재현하는 최신 역사 교과서이기도 하다. 창작 뮤지컬 <사월-The Great April>(김동현 작·왕정민 연출·정원기 작곡)도 비슷한 맥락에서 후세들의 기억 계승을 위한 재현이다. 제주 4·3이 어떤 상황에서 발발했는지 확대경으로 들여다보듯 장면화한 이 작품은 당시 일본으로 탈출한 김시종(1929~ ) 시인의 삶을 모티브로 1947년 전후 암울함 속에서도 꿈을 꾸었던 청춘을 밝은 톤으로 표현했다.

연극 <빵야> 공연 장면 /  엠비제트컴퍼니 제공

연극 <빵야> 공연 장면 / 엠비제트컴퍼니 제공

연극 <빵야>(김은성 작·김태형 연출·민찬홍 작곡·이현정 안무)는 다른 시점을 선택했다. 사람이 아닌 그 시대에 누군가의 손에 들려 살상을 한 장총 ‘빵야’의 관점이다. 한때 잘나갔지만, 지금은 한물간 드라마작가 나나는 소품창고에서 오래된 99구경 장총을 발견하고 장총의 기억을 드라마 대본으로 써내려간다. ‘1945년 인천 무기공장에서 태어난 장총의 여정을 통해 한국 근현대사를 간접적으로 들여다보는 빵야’라는 한 줄 로그라인(줄거리 요약)은 기존의 근대사 재현극의 패러다임을 바꾼다.

관객은 장총 빵야의 주인이 바뀌면서 점점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는 국가폭력 역사에 눈을 뜬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조선인 출신 일본군 손에 들려 있던 빵야는 한국 독립군 토벌로 생을 시작한다. 중국 팔로군에서 남한으로 귀순한 이북출신 서북청년단을 거쳐 제주 4·3을 도발한 빵야는 민간인 대량학살의 주역이 된다. 한국전쟁 발발로 남한 학도병 손에 들려 안타까운 첫사랑을 겪고 북한군 의용대에서 빨치산 소녀의 최후를 겪고 전쟁 후 사냥꾼과 기업인을 거쳐 영화 촬영장에서 전쟁 소품으로 쓰인다.

한때 금기였던 국가폭력을 주제로 다양한 무대극이 창작될 수 있는 것은 치열한 민주화운동을 통해 얻어낸 선물이다. 연극 <미궁의 설계자>(김민정 작·안경모 연출·연극집단 반)는 군부독재 시절 한국 1세대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이 주인공이다. 1976년 남영동 대공분실 설계 및 시공 당시의 군부독재 관계자들과 1986년 여자친구를 기다리다 연행된 대학생 경수(김시유), 2020년 민주인권기념관(2024년 현재 민주화운동기념관) 해설사 미숙(전국향)과 다큐멘터리 작가 나은(이가을)이 등장해 시공간을 넘나들며 남영동 대공분실의 잔혹성과 현대의 재해석을 담아냈다. 소극장에서 이어지는 고문 장면은 대공분실을 형상화한 무대 세트에 라이브로 영사되며 관객을 그 시공간에 가둔다.

■ 기억 계승, 폭력·전쟁 막는 방어기제

관객을 당시의 시공간에 몰입하게 하는 측면에서 <나는 광주에 없었다>(김경주·안준원·고선웅 작)는 새로운 형태의 관객 참여극이다.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대형 블랙박스 극장은 500명 전후 관객으로 헐렁하게 채워져 있다. 무대 가운데 놓인 단 없는 무대에서 배우들이 10일간의 광주민주화운동을 차례대로 재현할 때마다 관객은 시민군으로 합류한다. 앉아 있던 의자를 들고 바리케이드를 쌓고 스크럼을 짜며 함께 시위하는 본격 관객 참여극이다.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일 전후 개막한 이 작품은 전국에서 온 관객과 아시아 각지의 관광객들까지 합류해 수용인원을 넘기며 민주화운동 시위 체험 현장으로 거듭났다.

연극 <연안지대>에서 아들 윌프리드는 통곡하며 아버지 시신을 물로 씻어 바다에 흘려보내려 하나 동지가 된 전쟁고아들이 일단 제지한다. 아버지의 시신은 어느덧 전쟁고아들의 부모가 실존했음을 상징하는 오브제로 작동한다. 고아들 한명 한명과 포옹하고 위무하는 아버지의 시신을 정성스레 씻어 바다에 흘려보내면서 윌프리드는 고난의 짐도 청산한다. 영혼이자 시신으로 무대 위에 상존해온 아버지 이스마일은 시신의 씻김을 통해 전쟁을 일으킨 세대라는 불명예를 어느 정도 수습하고 다음 세대에 배턴을 넘긴다.

연극 <빵야>의 드라마작가 나나는 “비극을 쓰는 건 기억하고, 기록하고, 증언하기 위한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유대인 대학살이 벌어졌던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 정문에도 “아우슈비츠보다 더 무서운 것은 인류가 아우슈비츠를 잊는 것이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기억 계승’은 더 큰 폭력과 전쟁을 막는 가장 기본적인 방어기제다. <연안지대>와 <적벽대전>은 6월30일까지, <빵야>는 9월8일까지 상연한다. <미궁의 설계자>와 <나는 광주에 없었다>, 뮤지컬 <사월>은 상연이 끝났다. <사월>은 유튜브에 올라와 있다.

<이주영 문화칼럼니스트·영상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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