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세상의 이야기를 사랑한다. 작가의 역량은 상상의 세계를 얼마나 치밀하게 구축할 수 있는지에서 드러난다. 거기서 국가와 정치에 관한 상상이 빠질 수는 없고, 이는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에도 영향을 미친다. 생각나는 몇 가지 사례를 살펴보자.
종말 이후의 국가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와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는 아포칼립스보다 국가의 탄생과 변형에 관한 창조신화에 가깝다. 영화의 세계를 구성하는 세 가지 정치 형태를 구별할 수 있다. 사막을 떠돌아다니는 약탈적 유목민, 시타델이라는 유사 국가, 퓨리오사가 돌아가려는 어머니들의 푸른 땅이다. 유목 집단을 이끄는 디멘투스는 국가의 자원과 권력을 욕망하지만, 그걸 운영할 역량은 없는 비겁하고 포악한 인물이다. 시타델을 지배하는 임모탄 조는 근대적 독재자보다 고대 국가의 왕에 가깝다. 유목민에 맞서 국가를 지키는 것이 그의 첫 번째 임무다. 그의 권력은 억압적 국가기구가 아니라 물과 식량의 분배, 추종자들의 신뢰와 숭배에서 나온다. 그는 기본적으로 ‘베푸는 자’이고, 그와 백성 사이의 물질적·종교적 부채관계가 시타델의 기초를 이룬다.
이 영화의 핵심은 국가와 가부장제의 동시 발생을 전제한다는 점에 있다. 시타델은 여성을 가축으로 취급함으로써 유지될 수 있다. 여성은 심지어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간주되지도 않는다. 오로지 아이를 낳고 모유를 생산하는 가축으로서의 가치만 지닌다. 퓨리오사는 정반대의 정치 형태를 대표한다. 그의 고향은 아나키스트 어머니들의 공동체, 국가도 없고 가부장제도 없는 푸른 유토피아다. 그가 살아가는 이유는 ‘집으로 돌아갈 길을 찾으라’는 어머니의 유언에 있지만, 이 말의 참 의미는 먼 훗날 드러난다. 고향이 이미 사라졌다는 것을 알았을 때, 맥스와 퓨리오사는 단지 희망으로만 존재하는 푸른 땅 대신 시타델로 돌아간다. 이때 유언이 예언으로 변모한다. 퓨리오사가 여성들과 함께 폭력의 중심으로 되돌아가 가부장 국가를 전복하고, 그곳에 새로운 어머니들의 땅을 세우리라는 것이다.
세계 종말 이후의 정치 형태를 다룬 작품은 다양하다. 드라마 <더 라스트 오브 어스>에서는 인류 대부분이 균류에 감염돼 좀비로 변한다. 생존자들은 미국 각지에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는데, 정치 형태는 제각각이다. 가장 흔한 것은 군사-정치 복합체가 지배하는 전체주의 체제이고, 이에 맞서는 저항 조직도 탄생한다. 가장 평화롭고 안전한 곳은 지배 권력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 공산주의 공동체다. 공포 영화에 나올 것 같은 종교 공동체도 있다. 하지만 미국 드라마답게, 주인공이 집착하는 것은 공동체의 형태나 정치 체제가 아니라 가족이라는 가치다.
정치의 다양한 형태
일본 만화 <나루토>와 <원피스>도 견고한 정치적 세계관을 구축한다. <나루토> 전체를 관통하는 질문은 혈족 중심의 닌자 사회를 어떻게 ‘닌자 마을’이라는 유사 국가 체제로 개편할 것인지다. 이 질문을 두고 하시라마와 마다라, 나루토와 사스케가 대립한다. 하시라마와 나루토는 혈족 사회의 끝없는 폭력을 끝내기 위해 닌자 마을이 주도하는 평화 질서를 구축하려 한다. 반면 혈족의 계승자들인 마다라와 사스케는 닌자 마을이 위선적인 폭력의 체제임을 폭로하며, 전혀 다른 방식의 평화에 도달하려 한다. 그래서 나루토는 마을을 매개로 한 ‘동료’ 관계에 집중하지만, 사스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일족의 고통스러운 역사와 경험이다.
<원피스>의 세계를 구성하는 것은 세 가지 정치 유형, 즉 세계 정부라는 법-군사 복합체, 다양한 정치 체제를 가진 개별 나라들, 해적이라는 유목 집단이다. 이 만화의 혁신적인 발상은 유목 집단에 약탈자와 해방자라는 이중의 정체성을 부여했다는 점에 있다. 고정된 영토에서 살아가는 정주민은 생존을 위해 포악한 군주를 몰아내거나, 외부의 공격을 막아내면서 국가 내부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반면 해적은 국가의 완전한 외부에 존재한다. 이들은 문제가 터지면 다른 곳으로 도망가면 그뿐이다. 외부 권력의 어떤 간섭도 허용하지 않으며, 지배 체제의 도덕이나 규칙에서도 자유롭다. 약탈자가 되거나 해방자가 되는 건 전적으로 개인의 성향에 의존한다.
마블의 드라마 <로키>를 보자. 시간 변동 관리국(TVA)을 묘사하는 첫 장면은 국가 관료주의에 관한 블랙 코미디로 가득 차 있다. 국가는 번호표를 나눠주고, 줄 세우고, 지루한 서류 심사를 요구하는 귀찮은 존재지만, 규칙에서 벗어난 자를 가차 없이 제거하는 살인자이기도 하다. 드라마가 던지는 질문은 꽤 현실적이다. 시간의 소멸을 막기 위해 학살자 국가를 유지할 것인가, 그런 국가를 거부하고 소멸을 선택할 것인가? 주인공 로키는 이 양자택일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친다. 국가가 비록 태생적인 폭력의 실행자라 할지라도 어떻게든 고쳐 쓸 수는 없는가? 드라마의 결론은 신화적 방식으로 이 질문에 답한다.
지금까지 말한 작품은 모두 국가의 부재 또는 소멸을 상상의 대상으로 삼는다. 아나키스트 여성 공동체, 약탈적 유목민, 해방자 유목민, 공산주의 공동체, 혈통 중심 사회 등 구체적 유형은 다양하다. 물론 이런 상상이 전적으로 작가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19세기 중반 인류학자 루이스 모건은 야생, 야만, 문명이라는 세 가지 사회 유형을 제안했고, 이는 마르크스주의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 인류학자 피에르 클라스트르는 국가 있는 사회와 국가에 맞서는 사회를 구별하고, 들뢰즈와 과타리는 여기에 유목 사회를 추가한 새로운 사회 유형학을 제안한다.
국가 없는 상태에 관한 상상은 단순한 지적 즐거움이나 극적 재미를 위한 것이 아니다. 무슨 혁명적 영감 따위를 얻기 위한 것도 아니다. 기존의 지배 체제가 무엇인지 이해하고, 작은 변화라도 시도하려면, 그것이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 있어야만 한다. 최근 한국사회는 그런 상상을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경향을 나타낸다. 한국 영화, 드라마, 웹툰은 기존 사회 구조의 폭력과 부조리를 분석하고 비판하는 데는 뛰어난 역량을 보여주지만, 새롭고 다른 세상을 구축하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다. 그래서 이야기의 목적이 폭력을 규탄하는 것인지, 폭력을 재현하며 도착적 쾌락을 제공하려는 것인지 모호한 경우가 많다. 이런 상황은 정치 담론, 학술 연구, 일상 대화에서도 마찬가지다. 한국에서는 이미 존재하는 세상이 상상력의 한계를 규정한다. 하지만 상상력이 세상의 한계를 규정하는 곳에서만 변화는 가능하다.
<박이대승 정치철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