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벤자민 버튼>·연극 <젤리피쉬> 등
“남자애들이 머리카락이 짧다고 나더러 페미(페미니스트)래.”
사춘기 절정의 중3 딸아이가 무심하게 한마디를 던졌다. 젠더 갈등이 중3 교실에서도 진행 중인가 싶어 걱정이 앞선다. ‘젠더 차별과 불평등을 인식하고 간극을 줄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 정도로 해석하는 ‘페미니스트’가 언제부터 부정적 의미로 통용됐을까? ‘여성의 인권만’ 옹호하는 사람으로 오인해서? 헤어스타일과 페미는 또 무슨 상관인가?
창작 초연 뮤지컬 <벤자민 버튼>(조광화 작·연출, 심새인 협력연출, 이나오 작곡, 문수호 퍼펫 디자인)은 첨예해지는 젠더 갈등에 대한 처방전 같은 작품이다. 나이가 거꾸로 드는 희소병에 걸린 벤자민은 아홉 살 노인이다. 클럽을 떠돌며 아빠와 노래하는 동갑내기 소녀 블루와 친구가 되면서 장애와 고독의 굴레에서 벗어난다. 친부에게 버려진 블루는 트라우마로 사랑을 믿지 못한다. 벤자민을 양육한 마마의 재즈클럽이 망하고 제2차 세계대전 발발로 벤자민이 징집되는 동안 블루는 가수로 유명해진다. 노인에서 중년을 거쳐 청년이 된 벤자민은 엇갈리는 시간 속에서 블루와 사랑을 확인하고 아들 스캇을 낳지만 블루는 다시 여행을 떠난다.
■ <벤자민 버튼>, 젠더 갈등에 대한 처방전
프란시스 스콧 피츠제럴드의 단편소설이 원작으로 1920년대가 배경이다. 한국 창작 뮤지컬로 다시 태어나면서 벤자민의 ‘거꾸로 가는 시간’을 퍼펫(puppet·인형극에 쓰는 인형)들로 표현해 화제가 됐다. 7명의 출연진은 여러 연령대의 다양한 크기 퍼펫을 직접 조종하며 입 모양에 맞춰 노래를 부르고 안무를 곁들이며 퍼펫티어 역할도 한다. 벤자민 역의 경우 대사 주체가 퍼펫인지, 배우인지에 따라 뉘앙스가 달라져 섬세한 전환이 필요한 고난도 연기가 필요하다. 덕분에 관객은 노년부터 갓난아기까지 아우르는 퍼펫에 자연스레 몰입한다.
연극 <젤리피쉬>(벤 웨더릴 작, 이인수 번역, 민새롬 연출, 신재훈 드라마터그, 고권금 창작조력자)는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난관을 기꺼이 선택하는 다운증후군 여성의 성장기다. 장애인 켈리가 비장애인 닐과 사랑에 빠져 임신하고 출산에 이르는 과정의 갈등을 보여준다. 뻔히 보이는 불행으로 질주하는 딸 켈리를 막으려는 엄마 입장은 만국 공통의 것. 그러나 켈리는 자신의 결정을 지지해 달라고 요청하고 마지못해 따르는 엄마와 남편을 다독인다.
실제 다운증후군 배우 백지윤이 켈리로 참여해 155분을 소화했다. 대사량이 많고 연기와 동선이 복잡해 대사를 읽어주는 조력자(프롬프터)가 동참한다. 제작 과정이 극 안에 포함되고 무대와 객석 모두 조명을 밝게 하는 릴렉스트 퍼포먼스(출입이 자유롭고 각자의 상황대로 편안하게 관람하는 형태)에 자막과 수어통역이 수반된 배리어 프리 공연이다. 배경인 영국 동부 스케그니스 해변을 재현한 삼면이 객석인 무대는 아름답다. 그러나 주고받는 대사들은 장애와 세상 편견을 직설적으로 표현해 관객들을 당혹스럽게 한다. 민새롬 연출자는 관객과의 대화에서 “창작조력자의 도움으로 장애 배우들과 의견을 조율해 안정감을 점검해가며 장면화했다”고 설명했다.
여성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역사는 길지 않다. 19세기 초 영국은 여성의 글쓰기도 금기였다. 뮤지컬 <브론테>(성재현 작·작사, 조민영 연출, 양지해 작곡)는 명작을 남긴 브론테 자매의 짧고 강렬한 삶을 록과 어쿠스틱 사운드로 담아냈다. 글쓰기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했던 샬럿과 에밀리, 앤이 작품활동을 독려하고 논쟁하는 과정은 스크린과 조명을 활용한 그림자극으로 섬세하게 전개된다.
작품의 백미는 세 자매의 의견이 충돌하는 넘버 ‘찢겨진 페이지처럼’의 절규 구간이다. 편견과 금기를 깨고 똘똘 뭉쳤으나 생각과 주장이 다름을 인정하고 각자의 길을 간다는 내용으로 어쿠스틱 기타와 첼로, 드럼이 싸우듯 경쟁하며 세 자매가 록 발성으로 대결하는 극고음 파트다. 에밀리는 <폭풍의 언덕>을, 앤은 <아그네스 그레이>를 유작으로 남긴 채 30세 전에 요절한다. <제인에어>를 발표한 샬롯은 동생들보다 몇 년 더 살았으나 역시 일찍 생을 마감한다.
60대 여성이 주인공인 액션 느와르 뮤지컬은 편견과 불평등에 대한 새로운 해체다. 창작 초연 뮤지컬 <파과>(구병모 원작, 장해정 극본, 이지나 각색·연출, 이나영 작곡)는 여성 킬러 조각의 과거와 현재를 직조한다. 자신이 살해한 피해자의 아들 투우와 대결하는 장면은 섬세하면서 팽팽하다. 조각의 내면을 긁는 듯한 열창과 레이저 조명을 활용한 슬로 모션 액션 등 영화적 이미지를 구현해 매체의 경계도 넘나든다. 작품을 여닫는 방식도 영화적이다. 무대 위에 영사되는 타이틀 시퀀스와 엔딩크레딧으로 이 뮤지컬은 선악을 떠나 평생 당당하게 산 여성의 삶을 기록한 영화처럼 다가온다.
■ 금기 깨고 다름을 인정하며 성장하는 여성
뮤지컬 <난설>(옥경선 작·작사, 이기쁨 연출, 다미로 작곡)과 창작 초연 <버지니아 울프>(김지식 원안, 권승연 대본·작곡·편곡, 홍승희 연출)는 안타까운 작가의 삶을 동시대에 재해석해 부활시켰다는 점에서 닮았다. 16세기 조선의 여성 문인 허초희(허난설헌)와 허균 남매, 그들의 스승 이달은 작품 속에서나마 진실 왜곡의 현실을 망각하고 진정한 문인의 삶을 산다. 무대 전체에 영사되는 초희의 시구는 그가 끝내 못 이룬 존재감을 드러내는 과정이다. 애들린 역시 자신의 저작인 <댈러웨이 부인> 속 캐릭터 조슈아와의 삶을 통해 조울증과 신경증으로 일찍 생을 마감한 자신이 아닌 당당하고 재기발랄한 또 다른 자아와 조우한다. 텅 빈 대나무숲과 책갈피를 형상화하고 실감 영상으로 가득 채운 각 무대예술의 간극은 있으나 두 작품 모두 과거의 고통과 세상의 편견에 달관한 듯 “괜찮다”고 전한다.
<벤자민 버튼>의 시작과 마지막은 치매인 블루를 돌보는 아들과 소년 모습의 노인 벤자민, 그리고 도와주는 친구들이다. 평생 서로의 다름과 아픔을 인정하며 기다리고 또 기다린 인고의 시간이 유쾌한 재즈 밴드와 합창으로 마무리된다. “산다는 건 하나씩 하나씩 보내는 것, 하나씩 사라지는 것, 어쩌질 못해 지켜보는 나날, 언젠간 너도 떠나 사라지겠지, 산다는 건 불안으로 흔들렸던 그 많던 날들이니 그만 모두 용서하여라.” 관객들은 마지막 넘버 ‘불안에의 초대’를 출연진들과 함께 흥얼거리며 각자의 삶을 통찰하고 부질없음을 상기한다.
걱정하는 필자에게 아이는 덧붙였다. “마침 나처럼 쇼트커트인 교장 선생님이 지나가셔서 여쭤봤어. 머리카락이 짧으면 페미냐고. 장난치던 남자애가 바로 사라져버리더라고.” 아이들도 알고 있다. 불안으로 흔들렸던 순간은 빠르게 용서하는 것으로 퉁치면 된다는 것을. <파과>와 <젤리피쉬>는 지난주 상연이 끝났다. <브론테>와 <난설>은 6월 2일, <벤자민 버튼>은 6월 30일, <버지니아 울프>는 7월 14일까지 상연한다.
<이주영 문화칼럼니스트·영상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