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마리 앙투아네트>·연극 <엠. 버터플라이> 등
마녀사냥(witch hunt)은 ‘특정 사람에게 죄를 뒤집어씌운다’는 의미로 쓰인다. 중세시대 종교적인 ‘심판’을 빌미로 이단 혹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박멸하는 수단이었다. 학문적으로는 18세기 이후 자취를 감추었다지만 사실상 21세기에도 마녀사냥은 공공연하다. 생각과 입장이 다른 이들을 숙청하는 가장 효과적인 도구임은 불문가지(不問可知)이다.
화려함의 극치일 거라 상상했던 뮤지컬 <마리 앙투아네트>(미하엘 쿤체 극작·로버트 요한슨 연출·실베스터 르베이 작곡)는 마녀사냥으로 귀결된다. 왕당파 주적으로 지목돼 프랑스 대혁명 당시 남편 루이 16세와 함께 단두대의 이슬이 된 마리 앙투아네트는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 만화, 게임 등으로 트랜스미디어(transmedia·매체 특성을 넘나들며 세계관을 공유하는)된 실존 인물이다.
새롭게 들여다보는 앙투아네트
너무 유명해서 더 알아야 할 내용이 있을까 싶은 역사적 인물을 이 작품은 새로운 관점으로 들여다본다.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부정적 소문은 자코뱅파(공화정 급진파)에 의해 조작됐고, 이에 문제 제기하는 민중도 있었다는 해석이다. 진실을 폭로하는 민중으로 가상 인물 마그리드가 등장한다. 지속적인 여론 조작으로 불같이 일어난 민중은 왕가의 사치와 향락, 무능을 대변한 목걸이 사건(1785년 왕비 사칭 고가 목걸이 구입)과 바렌 도주 사건(1791년 루이 16세 부부 해외 도피 시도)이 모두 왕비 때문이라고 확신한다.
왕정 증오는 공화정 옹립의 기폭제다. 겉으로는 시대의 부름이고 민중의 목소리 내기지만, 작품은 이 또한 여론 조작이고 마녀사냥의 부산물일 수 있음을 화려한 복식과 고전적인 회전무대 움직임, 시민 봉기를 의미하는 군무로 보여준다.
마녀사냥 서사를 화려한 퍼포먼스로 재해석한 작품은 빅토르 위고 원작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뤽 플라몽동 극작·질 마으 연출·리카르도 코치안테 작곡·한국어가사 박창학)다. 자유롭고 화려한 집시여인 에스메랄다에 반한 프롤로 주교의 갈등은 중세 종교재판에서 비롯된 마녀사냥 서사의 전형이다.
에스메랄다를 보호하려는 성당 종지기 콰지모도의 애절함, 에스메랄다가 첫눈에 반한 근위대장 페뷔스의 무심함은 성직자 프롤로를 악마의 길로 인도한다. 혼돈을 조장하는 에스메랄다를 고발하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단순한 구성을 빛나게 하는 것은 퍼포먼스다. 집시의 자유로움과 무고함에 대한 저항은 아크로바틱과 비보잉, 대성당의 종을 타고 날아오르는 등 고난도 액션으로 표현된다. ‘대성당의 시대’와 ‘춤을 춰요. 나의 에스메랄다’ 등 대표 넘버(노래)는 세계적인 명곡이다.
대의를 위해 어쩔 수 없었다는 마녀사냥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자신을 위한 정치적 노림수일 뿐이다. 창작 뮤지컬 <다윈 영의 악의 기원>(박지리 원작·이희준 작 작사·오경택 연출·박찬휘 작곡)은 인간의 탈법적 방어본능에 대한 실체를 드러낸다. 정의를 위한 ‘작은 실수’가 삼대에 이르면서 어떻게 거대 악이 되는지 입증하는 점층 화법이다.
1지구부터 9지구까지 권력의 세기 순으로 계층화된 세상에 불만을 품은 민중은 봉기한다. 60년 전 12월 혁명을 주도했던 러너 영은 실수로 동료를 죽게 했다. 30년 후 1지구에서 기득권을 누리며 사는 러너의 아들 니스는 아버지의 범행이 드러날까봐 친우를 우발적으로 살해하고, 이는 그의 아들 16세 아들 다윈 영에게 이어진다. 파이프로 지어진 불안한 세트와 삼대의 악행을 드러내는 삼 분할된 무대 연출은 ‘정의의 허상’이다. 진실과 거짓의 경계가 상실돼 가는 동시대를 풍자하는 연출은 다윈 영을 다크 히어로처럼 표현하며 혼돈을 더한다.
창작 초연 뮤지컬 <이프아이월유>(정찬수 작연출· 한혜신 작곡) 역시 악의 정당화에 대한 혼돈에 방점을 찍는다. 자신이 살인한 추억을 기반으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수현과 그의 소설을 읽고 동생 살해범임을 깨달은 인호의 처절한 기 싸움으로 100분 넘는 2인극이 꾸려진다.
1940년대 경성에서 조우한 이들은 기울어진 서재와 낭만적인 창호를 배경으로 서로가 원수임을 직시한다. 살인자가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고 피해자가 법의 보호 없이 사적 복수를 해야 하는 혼돈의 상황은 관객들을 공포와 불안으로 몰아가지만 정작 두 피해자와 가해자는 냉철하다. “나 살인자 맞아. 그런데 네가 그걸 입증할 수 있어?”라며 피해자를 조롱하는 수현에게 몰린 인호는 또 다른 희생양이 될 뻔하지만 결국 스스로 악을 대체하는 또 다른 악으로 거듭난다.
인종과 젠더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 조명
각자의 정의를 주장하는 작품 중 연극 <엠. 버터플라이>(데이비드 헨리 황 작·부새롬 연출·박영록 번역)는 인종과 젠더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을 심도 있게 들여다보게 하는 수작이다. 남성 백인 외교관 르네와 여성 아시아 무용수 송은 첫눈에 반해 부부가 되고 아들도 낳았다. 수십 년 후 스파이 혐의로 송이 체포되면서 르네는 송이 남성임을 확인한다.
철저한 이성애자인 르네가 수십 년간 부부로 산 송이 남성임을 알아채지 못한다는 게 가능한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작품은 인종과 젠더, 문화권에 대한 편견이 극심했던 냉전 시대를 범인으로 지목한다. 자기만의 정의에 갇혀 실체를 망각하고 살아가는 인간의 단면은 뿌연 커튼에 둘러싸인 무대로, 아시아 여성에 대한 백인 남성의 판타지는 회칠한 무용수의 분장과 화려한 의상으로 대변된다. 편견이 망각을 낳고, 망각이 모래성 같은 삶으로 이어짐을 은유하는 예술적 재해석이다.
마녀사냥은 일상에 상존한다. 대세를 따르지 않는다며 공격하는 일상의 언어는 모두 마녀사냥에 뿌리를 두고 있다. 각자의 정의가 벌이는 혈투에서 패배한 사람들은 마녀사냥의 희생양이 되는 수순에 놓인다. 뮤지컬 <마리 앙투아네트>에서 자신만의 정의에 과몰입한 자코뱅파와 오를레앙공작은 마그리드의 양심선언으로 숙청되고 선악은 다시 모호해진다. 대표 넘버이자 작품의 메시지인 ‘우리가 꿈꾸는 정의는 무엇인가’가 양가적인 상황을 담아내며 관객들에게 철학적인 질문을 던진다. 정의는 바로 그 혈투에서 이긴 사람들만이 정의일 수 있다는 뼈아픈 교훈이다.
아쉽게도 <다윈 영의 악의 기원>은 지난달 상연이 끝났다. <엠. 버터플라이>는 5월 12일, <마리 앙투아네트>는 5월 26일, <이프아이월유>는 6월 1일까지, <노트르담 드 파리>는 6월 30일까지 광주·세종·울산·김해 등 전국에서 투어 공연한다.
<이주영 문화칼럼니스트·영상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