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기술에 의존하는 만큼, 기술도 우리의 인간적 가치에 의존해야 한다. 우리는 기술철학자 앨버트 보그만(Albert Borgmann·1937~2023)의 주장을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 보그만은 독일 출신의 미국 철학자로, 여러 저서와 연구로 기술의 본질과 그것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을 집요하게 탐구한 기술철학의 대가 중 한 사람이다.
보그만은 기술과 그 사회적 맥락을 탐구하기 위해 ‘장치 패러다임(Device Paradigm)’이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장치 패러다임은 현대 사회에서 기술이 어떻게 인간의 경험과 세계와의 관계를 변화시키는지를 설명한다.
보그만은 기술이 우리의 삶을 편리하게 만들고 일상의 많은 노동을 줄여준다는 점을 인정한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러한 편리함이 인간의 삶의 질을 반드시 향상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기술 장치들은 우리가 세계와의 직접적인 관계를 잃게 만들고, 경험의 깊이와 풍부함을 감소시킨다. 예를 들어 난방 시스템은 우리가 추운 날씨를 직접 경험하지 않도록 해주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는 자연과의 직접적인 상호작용을 잃게 된다.
현대 기술 장치들은 우리에게 원하는 결과를 가능한 한 쉽게 제공하도록 설계돼 있다. 이 과정에서 기술은 사용자와 결과 사이의 모든 복잡성과 노력을 숨긴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결과를 얻지만, 그 과정에서의 의미나 경험은 상실하게 된다. 보그만은 이러한 상실을 인식하고, 보다 의미 있고 연결된 삶을 살기 위해 ‘초점 사물(Focal Things)’과 ‘초점 행위(Focal Practices)’로의 회귀를 제안했다.
초점 사물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고, 우리가 삶의 중요한 측면에 집중하게 만드는 사물이다. 이러한 사물은 우리의 주의를 끌고 공동체, 자연, 자기 내면과 깊은 연결을 경험하게 한다. 예를 들면 책, 악기, 정원 등과 같은 것이 초점 사물이다.
초점 행위는 초점 사물과 관련되거나 그 자체로 의미 있는 활동이다. 이러한 행위는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와 관계를 실천하는 과정에서 깊은 만족과 연결성을 경험하게 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기술이 지배하는 세계에서도 균형과 목적을 찾을 수 있다. 예를 들면 독서, 가족이나 친구들과의 공동 식사, 등산, 수공예 등과 같은 것이 초점 행위다.
생성형 AI와 끊임없이 진화하는 기술의 물결 속에서, 보그만의 초점 사물과 초점 행위 개념은 일견 시대에 뒤떨어진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우리는 이제 몇 초 만에 대량의 정보를 검색하고, 가상 현실에서 세계를 여행하며, AI로 예술 작품을 생성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기술 진보의 핵심에 중요한 질문이 자리 잡고 있다. 그것은 바로 기술이 ‘인간 삶의 질’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있으며, 끝없는 변화 속에서 과연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기술이 삶의 질을 향상하되 삶을 지배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생성형 AI가 인간의 노동과 창작 활동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는 지금, 그것이 삶에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고 인간다움을 회복하는 길이 아닐까 한다.
<류한석 IT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