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기후 대비 못 해 생산량 급감…복잡한 유통단계도 한몫
대기업·사모펀드 소유 도매법인의 농업 발전 투자 살펴봐야
과일 가격이 왜 이럴까. 대목이라는 설이 지났는데도 치솟은 가격은 내려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지난 2월 21일 기준 한국에서 가장 많이 재배되는 사과 품종인 후지는 상등급 제품 10개가 평균 2만9475원에 판매됐다. 생산량이 많았던 1년 전에 비하면 27.4%가 올랐다. 평년과 비교해도 20% 더 비싸다(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 농산물 유통정보 서비스 참고). 현재 대형마트 대다수가 정부 지원으로 농축수산물 할인 행사를 하는 점을 고려하면 실제 인상 폭은 더 컸다고 봐야 한다.
사괏값만 오른 것도 아니다. 지난 2월 21일 신고 배는 상등급 제품 10개가 3만9801원에 판매됐다. 1년 전보다 34.3% 오른 가격이다. 딸기 역시 100g 가격이 1797원으로 1년 전과 비교해 14.1% 올랐다. 과일은 한 품목이 다른 품목을 대체한다. 소비자는 사과가 비싸지면 귤 등 다른 과일을 찾는다는 얘기다. 그 바람에 사과·배뿐 아니라 과일 가격이 전반적으로 다 오르고 있다. 고공행진은 당분간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가격 상승의 원인은 무엇이었는지, 가격 안정을 위한 정부 차원의 대책을 마련할 수는 없었는지 짚어봤다.
예견된 이상기후, 정부 대응은 미진
지난해 과일 농사는 기록적인 흉년이었다. 2014년부터 지난해까지 10년간 연평균 사과 생산량은 50만9000t이었다. 그런데 지난해에는 39만4000t에 그쳤다. 2022년이 풍년이었던 탓에 전년 대비 생산량은 무려 30%나 급감했다. 배 생산량 역시 전년 대비 27%가량 줄었다. 기본적으로 물량 부족이 가격 상승을 이끈 셈이다.
지난해는 유독 악재가 겹쳤다. 과수는 꽃이 피고, 벌 등 곤충에 의해 수정이 이뤄진 후 열매를 맺는다. 그런데 꽃이 필 무렵부터 냉해가 왔다. 이상기후였다. 강원도 홍천에서 하얀사과농원을 운영하는 허성진씨는 “지난해 봄이 오기 전부터 날씨가 따뜻했다. 기온이 올라가니까 봄이 온 줄 알고 나무들이 꽃을 틔우는데 에너지를 쏟았다. 그런데 갑자기 북쪽에서 한파가 와서 꽃눈이 망가졌다. 봄에 냉해를 입으니 원래 달려야 할 열매가 100개라면 20~30개만 달렸다”고 했다. 이상저온이 5월까지 이어지면서 과수들이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했다. 지난해 5월 10일 하루에만 전국 1만여㏊의 과수농가에서 저온 피해 신고가 접수되기도 했다.
여름엔 자주 비가 내렸다. 길게는 열흘 이상 비 소식이 이어졌다. 일조량이 부족하니 과실이 잘 자라지 못했다. 장마로 식물 탄저병과 갈색무늬병이 퍼졌다. 가지가 말라죽거나 과실을 떨어지게 만드는 탄저병은 고온다습하고 장마가 지속할 때 빠르게 확산한다. 6월과 10월 말에는 최대 사과산지인 경북과 충북에 우박이 내리기도 했다. 경북에서 50년째 사과 농사를 짓는 농민도 10월 말 수확기에 우박이 내리는 경우는 처음 봤다고 했다.
사과·배는 9~11월에 수확한 물량이 이듬해 수확 전까지 차례대로 시장에 풀린다. 공급이 부족해 가격이 올라도 물가 안정을 위해 추가로 투입할 물량이 없다는 얘기다. 사과 등은 수입도 사실상 어렵다. 외래 병해충 유입을 막기 위해 외국 사과를 들여올 때는 8단계의 검역 과정을 거치도록 하고 있다. 이러다 보니 물가가 높게 형성된 이후에는 정부가 할 수 있는 일도 제한된다. 정부는 설을 앞두고 농축수산물 할인 지원에 690억원을 투입한 데 이어, 3월까지 300억원을 추가 투입하기로 했다. 할인 지원은 일시적으로 소비자 가격을 소폭 하락시킬 뿐 근본적 대책이 아니다. 공급은 제한된 상황에서 수요를 인위적으로 부양함으로써 오히려 물가 인상을 부추길 여지도 있다.
농민단체는 정부의 정책 의지가 있었다면 지난해 이상기후도 어느 정도는 대비가 가능했다고 본다. 전혀 예상 못 할 상황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미 2021년 4월에도 이상저온 현상이 발생했다. 지난해는 연초부터 엘니뇨가 발생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왔다. 태평양 해수면 온도가 평년보다 높아지는 엘니뇨는 지구의 대기 흐름을 바꿔 이상기후를 불러올 수 있다. 권혁정 전국사과생산자협회 정책실장은 “지난해 초에 사과 농가들은 엘니뇨가 시작돼서 한동안 힘들 거라고 예상했다. 엘니뇨가 시작되면 기온도 오르고 기온 변동폭도 커져서 농사짓기가 힘들어진다. 지난해 3월에 정부에 냉해 방지 시설 등 생산개발 시설 확충을 지원해야 한다고 했지만 아무런 답을 듣지 못했다”고 했다. 예컨대 과수원 상부에 바람을 발생시키는 팬을 설치해 위쪽의 따뜻한 공기를 지상으로 보내는 열풍 방상팬 등의 시설은 저온 피해에 대한 예방책이 될 수 있다. 열풍 방상팬은 과수원의 평균온도를 1~2도가량 높일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비용 부담으로 인해 농가들이 선뜻 설치에 나서지 못하는 상황이다.
지난해 6월에는 정부도 과일의 생산량 감소를 예측했지만 후속 대응은 미진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 농업관측센터는 지난해 6월 저온 피해 등으로 2023년 사과 착과 수가 전년 대비 16% 감소하고, 배는 19% 감소할 것으로 전망했다. 권혁정 정책실장은 “그때라도 정부가 적극적으로 대응했더라면 생산량 감소폭을 10~20%로 제한할 수 있었을 텐데, 별다른 조치가 없으니까 생산량이 30%까지 감소하는 상황이 됐다. 장마가 예상될 때 각종 병을 예방하기 위한 방재라도 지원해야 하는 게 아니냐. 현재도 과수화상병 방제에 대해서는 정부가 농약을 지원하는데, 탄저병 등은 농민들이 알아서 대응해야 한다”고 했다. 생산량 감소 전망에 정부보다 빠르게 대응한 것은 시장이었다. 지난해 6월 기준으로 사괏값이 본격적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생산량 감소 전망에 일단 과일 물량을 사두려는 수요가 증가한 것이다. 지난해 6월 전국 33개 공영 도매시장의 월평균 사과 경매낙찰 가격은 1㎏당 4200원으로 전월 대비 31% 상승했다.
엘니뇨는 올해도 지속할 것으로 전망된다. 엘니뇨 영향권에서는 겨울 기온이 평년보다 포근한 현상을 보이는데, 겨울이 충분히 춥지 않으면 해충도 죽지 않는다. 때아닌 한파 등 이상기후 가능성도 있다. 농림부는 지난 1월부터 ‘과수 생육관리 협의체’를 꾸리고 냉해 예방 및 과수 화상병 약제 지원, 열풍 방상팬 등 재해예방 시설 지원 등을 검토하기로 했다. 그러나 현재 논의되는 지원 규모가 크지 않아 ‘새 발의 피’에 그칠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긴 유통단계 거치면 최종 소비자가는 더 올라
급격히 오른 과일값은 가격 결정 구조에도 의문을 불렀다. 과일 가격은 어떻게 결정되는 걸까. 전국 최대 농산물 도매시장인 가락시장의 경매가격이 시세의 기준이 된다. 최근에는 대형마트 등이 산지의 농민들과 직접거래하는 비중이 늘고 있지만, 여전히 전체 농산물의 절반가량은 전국 33개 공영 도매시장에서 거래된다. 가락시장은 전체 도매시장 거래 물량의 40%가량을 차지한다. 전국 농산물의 20%는 가락시장을 거쳐 가는 셈이다.
유통구조는 복잡하다. 가락시장만 놓고 보면 흐름은 이렇다. 전국의 농민 등 생산자가 수확한 상품을 맡기면, 시장에 있는 6개 도매시장법인이 물건을 경매에 부친다. 시장 내 또 다른 행위자인 중도매인들이 이 경매에 참여해 최고가를 써낸 곳이 물건을 낙찰받는다. 중도매인은 전국의 마트나 소매점에 판매하고, 최종적으로 소비자가 마트나 소매점에서 물건을 산다.
장점이 분명한 방식이다. 경매가격의 4%를 수수료(가락시장을 제외한 공영도매시장의 경우 7%)로 챙기는 도매시장법인은 생산자의 물건을 비싸게 팔아야 이득을 볼 수 있고, 중도매인은 최대한 저렴하면서도 낙찰은 받을 수 있는 가격으로 물건을 확보해야 이득을 볼 수 있다. 양자의 긴장 속에 공정한 시장가격 형성이 가능해진다. 경매가격도 즉시 공개돼 투명성이 있다.
단점도 적지 않다. 일단 유통단계가 길어진다. 유통마진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지난 2월 20일 새벽 가락시장에서 만난 한 중도매인은 “중도매인이 10~20% 마진을 남기고, 소매도 또 남긴다. 예를 들어 감 40개들이가 7만2000원에 낙찰됐으면 1줄에 5개씩 8줄을 팔아야 하는데, 1줄을 1만5000원에 팔면 유지가 되겠나. 우리(중도매인)도 소매에 2만원은 받아야 한다. 소매 가서는 최소 2만5000원에 거래된다”고 했다. 그의 예시대로면 농민은 도매시장법인에 수수료를 떼주고 7만원이 안 되는 돈을 대금으로 받는다. 반면 중도매인은 모든 감이 팔렸을 때 16만원을, 소매는 최소 20만원을 받는다. 감이 팔리지 않을 때의 위험을 이들이 부담한다고 하더라도 유통마진은 상당한 수준이다. 가락시장 인근 과일가게 주인도 “사과 29개들이 한 짝을 (중도매인에게) 5만원에 사서 5개에 1만원씩 팔고 있다. 중도매인은 4만5000원에 낙찰받았다”고 했다. 소매점은 1만원가량을 남기고, 중도매인은 5000원을 남기는 거래가 이뤄지는 셈이다. 지방에서 올라온 농산물이 가락시장 경매를 거쳐 다시 다른 지방의 소매점으로 운송돼 판매되는 때도 있는데, 이때는 물류비용도 추가로 붙어 최종 소비자 가격은 더 올라가게 된다.
이론적으로는 공정한 가격 결정 방식이지만, 현실적으로는 경매의 공정성에 대한 시비가 끊이지 않고 있다. 김성훈 충남대 농업경제학과 교수는 “도매시장법인의 경매 건당 참여하는 중도매인의 숫자가 그리 많지 않다. 적을 때는 2~3명이 참여하는 때도 있고, 많아야 10여명이 참여한다. 얼굴을 아는 중도매인끼리 암묵적으로 가격을 낮춰 받거나 올려 받을 여지가 있어 개선해야 한다는 요구가 꾸준히 제기됐다”고 했다. 실제 2월 20일 가락시장 한 도매법인의 사과 경매는 10여명의 입찰자가 참여한 가운데 이뤄졌다. 수십 건의 경매 낙찰이 모두 완료될 때까지 4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중도매인들이 경매 시작 전에 미리 물건을 보고 전자기기에 입찰가를 입력하는 식으로 경매가 이뤄져 오랜 시간이 걸릴 필요가 없다는 것이 시장 측의 설명인데 충분한 경쟁이 펼쳐지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은 남는다.
1985년 가락시장이 만들어진 이래 거래 행위자와 거래 구조가 거의 같게 유지되면서 독과점 우려도 커지고 있다. 가락시장의 6개 도매시장법인 중 농협을 제외한 5개 법인은 대기업과 사모펀드가 소유하고 있다. 주로 현금 거래가 이뤄지는 데다 안정적인 수수료 수익을 올리는 것이 가능하다 보니 배당 성향이 높은 자본들이 법인을 사들인 것이다. 중앙청과는 아모레퍼시픽그룹의 관련사인 태평양개발이, 대아청과는 호반그룹의 계열사인 호반프라퍼티와 호반건설이 100% 지분을 소유하고 있다. 서울청과와 동화청과도 고려제강과 신라교역이 각각 100%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한국청과는 더코리아홀딩스라는 경영컨설팅 업체가 지분 95%를 갖고 있다. 수산물 유통을 하는 신라교역을 제외하고는 모두 농축수산물 유통과 큰 연관성이 없는 기업들이다. 한국청과를 제외한 4개 법인은 모두 2022년 60억~70억원대의 당기순이익을 거뒀는데, 서울청과는 30억원을, 중앙청과는 32억8000만원을, 동화청과는 50억2500만원을 각각 대주주에게 배당했다. 농산물 유통으로 큰 이득을 보고 있음에도 그 수익금이 농업 발전을 위해 재투자되지는 않고 있는 셈이다.
농림부 관계자는 이들 법인의 공공성을 강화하는 방안에 대해 “농민 등 출하자 지원 여부, 공공성 강화 여부 등의 항목을 두고 엄격한 평가를 진행하고 있다. 평가 방식을 충족하지 못하면 지정을 취소하거나 재지정을 안 할 수 있는 권한도 가지고 있다. 잘못하면 퇴출하는 구조”라고 했다. 그러나 가락시장의 도매시장법인들이 퇴출당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2018년 공정위가 가락시장 도매시장법인 5개사의 담합 행위를 적발해 지난해 대법원에서 확정판결이 내려졌음에도 이들의 독점적 지위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김성훈 교수는 “농민들이 농산물 가격 정보를 알 수 없어 상인들과의 거래에서 불리할 수밖에 없었던 1980년대에는 도매시장법인을 거치는 거래 방식이 긍정적인 기능을 했다. 법인들이 농민들을 대신해 좋은 가격을 받아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는 가격 정보를 산지 농가도 확인할 수 있는 상황이 됐다. 유통은 언제나 정답은 없고, 그 시대에 맞는 적절한 답이 있을 뿐이다. 유통단계가 길 수밖에 없는 도매시장에서의 경매제도 이외에 유통경로를 다양화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이효상 기자 hslee@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