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방송국 특집 기획으로 국어 과목 수능시험을 치르게 됐다. 학력고사를 본 지 40년이 넘어 치른 시험이었다. 무척 어려웠다. 이래 봬도 학력고사 국어는 만점을 받았는데, 이번 시험에서는 절반 약간 넘는 점수를 받았다. 한 번만의 경험으로 속단하기는 어렵겠지만, 적어도 내가 경험한 수능 국어시험의 문제점은 평가 대상이 치우쳐 있다는 것이었다. 말하기, 쓰기 능력은 제쳐두고 읽기 능력만 평가하고 있고, 읽기도 속독 능력만 시험하는 듯했다. 속독보다는 정독을 해야 글을 읽으면서 자기 생각과 감정을 길어 올릴 수 있을 텐데 말이다.
나에게 인생은 세 시기로 나뉜다. 태어나서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가 첫 번째이고, 직장생활이 두 번째, 직장생활 이후 지금까지가 세 번째 시기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학교와 직장이라는 무대만 다를 뿐, 그 시기를 잘 지내는 데 필요한 역량은 다를 바 없었다. 이 시기는 이해력, 요약력, 유추력, 분석력, 기억력, 적용력이란 여섯 가지 힘을 요구한다. 이 여섯 가지 능력을 갖추면 남의 말과 글을 잘 알아먹고, 핵심을 추려내고, 배경과 맥락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분석하고 기억해뒀다가 시험을 치거나 일할 때 활용한다. 한마디로 잘 읽고 잘 들으면 된다. 말하고 쓰는 능력이 아니라 읽고 듣는 역량만 갖추면 학교생활, 직장생활 모두 잘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이런 역량은 어느 정도 갖췄다. 어릴 적부터 남의 눈치를 심하게 봤고, 어떻게든 남의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 사람은 남의 말과 글을 허투루 대하지 않는다. 유심히 듣고 읽어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과 비교해 더 큰 사랑과 인정을 받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이런 기질을 가진 사람은 앞서 말한 여섯 가지 역량을 키우게 되고, 이렇게 갖춰진 역량으로 학교와 직장생활을 잘하게 된다.
하지만 세 번째 시기는 다르다. 첫 번째와 두 번째가 남의 것을 잘 받아들이고 남이 시키는 일을 요령껏 잘하는 과정이었다면, 세 번째 시기는 스스로 뭔가를 해야 한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시기에는 남의 제품을 만들어줬다면, 세 번째는 내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 남에 의해 내 존재 가치를 인정받는 게 아니라 스스로 내 가치를 입증해 보여야 한다. 누군가가 빛을 비춰줘야 모습을 드러내는 반사체가 아니라 스스로 빛을 내는 발광체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발광체로 살아가려면 말하고 써야 한다. 말하고 쓰기 위해서는 자기 생각과 의견이 필요하다. 그래서 세 번째 시기에는 앞서 말한 여섯 가지에 덧붙여 세 가지 역량이 더 필요하다. 그것은 질문력, 비판력, 공감력이다. 내 생각과 의견을 만드는 첫 출발점은 질문이다. 남의 말에 대해 의문을 갖고 반문해야 한다. 그런 바탕 위에서 남의 생각과 의견을 평가하고 그것에 자기의 생각을 덧대거나, 그것과 자기 생각을 연결하고 결합해 새로운 대안을 만들어내는 비판력이 있어야 한다. 나아가 사람들의 처지와 심정, 입장을 헤아려 그들을 도우려는 공감력이 필요하다. 그래야 그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고 아픈 데를 치유해줄 수 있고, 그것으로 먹고살 수 있다. 쉰한 살부터 세 번째 시기를 살고 있는 요즈음, 나는 질문과 비판, 공감이 얼마나 필요하고 중요한지 실감한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시기를 추동하는 힘이 승부욕과 인정욕구라면, 세 번째 시기는 성취욕과 생존욕구가 필요하다. 누군가의 인정과 칭찬보다는 스스로 자기 일에 의미를 부여하고, 하고 있는 일에서 충만감과 만족감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 가지를 갖추고 이를 나누며 살아야 한다. 그것은 콘텐츠, 스토리, 캐릭터다.
가장 필요한 것이 자기만의 콘텐츠다. 그 사람 하면 떠오르는, 그 사람만의 테마나 주제 같은 것이다. 나는 무엇에 관심이 있고, 무엇을 잘하는가. 이때 무엇에 해당하는 게 그 사람의 콘텐츠다. 나의 콘텐츠는 글쓰기와 말하기다. 글쓰기와 말하기에 관해 사람들에게 말하고 글을 쓰는 게 쉰한 살 이후의 나이고 나의 삶이다. 콘텐츠를 만들기 위해서는 공부해야 한다. 학창 시절과 직장생활 때와는 전혀 다른, 홀로서기 위한 공부를 해야 한다. 본시 공부하는 목적은 살아남기 위해서다. 생존확률을 높이는 게 공부하는 이유다. 학창 시절에는 더 좋은 학교에 진학하고, 더 나은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 공부했다. 직장에서도 자리를 보전하고 높이 올라가기 위해 공부했다. 이 모두가 생존확률을 높이는 공부다. 세 번째 시기에 공부의 중요성은 한층 커진다. 공부를 통해 나만의 콘텐츠를 확보하지 않으면 생존 자체가 위협받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요구되는 건 스토리다. 콘텐츠는 그 자체만으로는 팔리지 않는다. 인터넷이나 유튜브에 양질의 무료 콘텐츠가 널려 있기 때문이다. 자기 스토리를 입혀야만 자신만의 콘텐츠가 되고, 그런 콘텐츠라야 재미가 있고 진정성이 느껴져 사람들의 구미를 당길 수 있다. 자기 스토리는 두 방향에서 찾고 모아가야 한다. 우선 살아온 과거의 기억 속에서 스토리를 발굴하고,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 아울러 나이를 먹을수록 새로운 일에 도전함으로써 새로운 일화, 에피소드 등을 만들어나가야 한다.
끝으로, 캐릭터다. 이제 사람들은 이미지를 산다. 누구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어야 하고, 그 이미지가 호감 가고 매력적이어야 한다. 사람들이 요즘 어떤 기준으로 카페를 찾는지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커피 맛과 가격, 위치 등 카페의 콘텐츠를 보는가? 어느 유명 커피전문점처럼 스토리에 끌리는가. 그런 점도 감안하겠지만 느낌이 좋아서, 분위기가 편해서 카페를 찾는 사람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감성’을 좇는 것이다.
100세 시대다. 세 번째 시기가 인생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시기에는 늘 만나는 가족, 직장 동료와 함께하는 시간이 대부분이었다면, 세 번째 시기는 대상을 확장해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을 만들어가야 한다.
다행히 사회관계망 서비스 등 온라인 가상공간이 활짝 열려 있다. 이를 통해 얼마든지 많은 사람과 소통하며 좋은 관계를 만들어갈 수 있다. 나는 직장을 그만둔 후 지난 10년 동안 네이버 블로그, 페이스북, 카카오스토리, 트위터, 티스토리, 카카오톡채널, 스레드, 개인 누리집 등에 2만 개 가까운 글을 쓰며 사람들과 소통해왔다. 앞으로 워드프레스, 링크드인 등에도 도전해볼 요량이다.
수능 국어시험 결과가 좋지 않을 거라고 예상했지만, 나는 그런 경험으로부터 도망가지 않았다. 그 결과 나름의 교훈도 얻었고, 새로운 이야기와 콘텐츠도 생겼다. 글쓰기와 말하기 관련 콘텐츠도 독서와 공부를 통해 꾸준히 보완해 나갈 예정이다. 문제는 캐릭터인데, 앞으로 나는 귀여움으로 승부하려고 한다. 완벽하고 출중한 사람에게서는 귀여움을 찾기 어렵다. 나같이 부족하고 모자라고 손길이 많이 가는 사람에게 사람들은 귀여움을 느낀다. 수능 국어 문제를 절반밖에 못 맞추고도 당당한 내 모습이 어찌 귀엽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강원국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