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민주주의 퇴보, 미완의 제도에 내재된 딜레마

서중해 경제학자
2024.02.18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지난 1월 21일(현지시간) 뉴햄프셔주 로체스터 유세 중 청중석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다. 로체스터 로이터=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지난 1월 21일(현지시간) 뉴햄프셔주 로체스터 유세 중 청중석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다. 로체스터 로이터=연합뉴스

2024년은 선거의 해다. 올해 60여개 국가의 40억명에 해당하는 역사상 가장 많은 인구가 선거에 참여한다. 국민이 지도자를 선출한다는 의미에서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다. 현재 인류의 절반 정도가 선거 민주주의가 시행되는 나라에 살고 있다. 그런데 선거 민주주의의 역사는 아무리 길어도 200여 년에 불과하다. 긴 인류의 역사에 비하면 아주 짧은 최근에 나타난 제도다. 선거 민주주의는 완숙한 제도가 아니라 시행착오 과정에 있는 미완의 제도다.

한국은 1948년 제1대 국회의원선거와 제1대 대통령선거를 시행한 이래 선거 민주주의를 실행해오고 있다. 1948년 당시 선거 민주주의를 실행하고 있는 나라는 30개국에 불과했다. 76년째 선거 민주주의를 이어오고 있는 대한민국은 이 점에서 충분히 긍지를 가질 만하다.

선거가 민주주의의 꽃이라지만 선거를 통해 반드시 민주주의가 신장되는 것은 아니다.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폭군이 출현하기도 하고, 국민 다수가 혐오하는 극단주의자들이 권력을 잡기도 한다. 선거를 통해 폭군이 출현하는 것은 과거의 히틀러만이 아니다. 2021년 1월 6일 당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지지자들이 2020년 대선이 부정선거라고 주장하며 의사당에 난입했다. 민주주의의 최전선이라는 미국에서 극우로 치닫는 미국 보수와 선거 결과를 부정하는 정치지도자를 보게 되면서 세계 시민들은 경악했다. 2024년 초 현재 상황이라면 다가오는 11월 미국 대통령선거에 트럼프가 공화당 후보로 나설 확률이 높다. 올해 세계 여러 나라의 선거에서도 예상 밖의 놀라운 결과가 나타날 것이다. 미국을 포함한 어느 나라에서도 민주주의는 퇴보할 수 있다. 이는 민주주의에 내재한 딜레마다.

민주주의 역설과 트럼프

1938년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침공했다. 이 소식을 들은 오스트리아 출신의 영국 철학자 칼 포퍼(1902~1994)는 서양사상에 내재한 전체주의에 대한 비판 작업에 착수했다. 그 결과로 나온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이 1945년 영국에서 출판됐다. 이 책에서 포퍼는 열린 사회가 숙명적으로 가지게 되는 3가지 역설을 언급했다. 완전한 자유는 강자에 의한 약자 억압을 가져온다는 자유의 역설, 무한한 관용은 관용의 소멸을 가져온다는 관용의 역설, 그리고 다수결 원칙에 근거한 민주주의는 폭군 정치로 귀결될 수 있다는 민주주의의 역설이 그것이다.

이들 역설 중 특히 민주주의의 역설은 오늘날 혼돈의 정치상황을 조명하는 길잡이가 된다. 트럼프와 같은 극우 보수주의와 최근 유럽에서 성행하고 있는 포퓰리즘 정치가 선진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출현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그 근본 원인을 민주주의에 내재한 본질적 특성으로 설명한다. 책은 자유와 관용이 사라진 전체주의를 비판하는데 머무르지 않고 보다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유혈 사태나 폭력 없이 폭군을 제거할 수 있으려면 국가는 어떻게 조직되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그의 답은 “정부를 국민이 다수결로 (즉 민주적 절차로) 해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말하는 민주주의란 ‘다수의 지배’처럼 모호한 것이 아니라 국민이, 특히 총선거를 통하여 정부를 해산할 수 있는 권리를 포함한 제도를 의미한다. 통치자를 국민이 통제하고 해임할 수 있어야 민주주의이다. 국민이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심지어 통치자의 의지에 반하여 개혁을 이룰 수 있는 제도가 민주주의이다.”

포퍼의 과학철학은 누구나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매우 단순한 사실에서 출발한다. 일반인이든, 통치자이든, 과학자이든 인간이라면 항상 옳을 수 없다. 내가 틀릴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면 상대방을 인정할 수 있게 되고 이런 과정을 통해 사회와 정치와 과학이 진보할 수 있다. 포퍼의 과학철학을 정치 영역으로 확장하면 ‘기존의 정치체제가 잘못된 길로 들어설 때 어떻게 하면 이를 바로잡을 수 있는가’가 관건이 된다. 위의 인용문에서 포퍼는 분명하게 그 답을 제시한다. 현실에서 민주주의가 실현되려면, 폭력을 통하지 않으면서 민주적 절차로 통치자를 통제하고 해임할 수 있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오류 가능성에 기반을 둔 포퍼의 과학철학은 정치영역에서는 민주적 개혁에 정당성을 제공하는 개혁의 정치철학이 된다.

2021년 1월 6일(현지시간) 당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워싱턴에서 열린 2020년 미국 대통령선거 결과 인준에 반대하는 시위 도중 미 국회의사당 벽을 오르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2021년 1월 6일(현지시간) 당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워싱턴에서 열린 2020년 미국 대통령선거 결과 인준에 반대하는 시위 도중 미 국회의사당 벽을 오르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민주주의 정치체제의 딜레마

애석하게도 오늘날 많은 나라에서 선거는 진보를 지향하지 못하고 극단의 정치의 수단으로 전락할 위험에 처해 있다. 선거가 개혁으로 나아가는 길이 되지 못하고 기성체제와 기득권을 공고히 하는 기제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2021년 미국 여론조사기관 퓨연구센터가 한국, 미국, 일본, 프랑스 등 17개 선진국 국민을 대상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개혁의 필요성에 대해 조사 대상국의 상당수는 ‘매우 필요하다’고 응답했는데, 정치 개혁의 필요성이 가장 높고 경제 개혁과 의료 개혁이 상대적으로 낮았다. 정치 개혁의 필요성에서는 이탈리아(89%), 스페인(86%), 미국(85%), 한국(85%) 등에서 아주 높게 나왔다. 반면 뉴질랜드(24%), 스웨덴(34%) 싱가포르(39%)에서는 정치 개혁의 필요성이 낮게 나왔는데, 이는 현재 정치체제에 대한 만족도가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은 정치 개혁의 필요성뿐 아니라 경제 개혁의 필요성(72%)도 매우 높게 나왔다.

이 여론조사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부분은 ‘각국의 정치체제가 과연 개혁을 제대로 해낼지에 대해 얼마나 확신하는가’라는 질문이다. 17개 국가 응답자의 절반 정도는 개혁이 필요하지만 정치체제가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할 것이라고 답했고, 응답자의 18% 정도만 개혁을 해낼 것이라고 답했다. 국가별로는 이탈리아(73%)가 가장 비관적으로 답했고, 반면 싱가포르와 뉴질랜드, 스웨덴 등에서는 할 수 있다는 응답이 과반수를 넘었다. 한국은 정치 개혁이 필요하다는 응답자 중에서 3분의 1 정도가 실제로 개혁을 할 수 있다고 신뢰했고, 나머지 3분의 2는 신뢰하지 못한다고 응답했다.

기존의 정치체제에 대한 개혁의 필요성은 매우 높지만 기존의 정치체제가 개혁을 수행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신뢰가 매우 낮다는 조사 결과는 민주주의 정치체제의 딜레마를 확인시켜준다. 필요한 개혁의 실패는 (폭군까지는 아니더라도) 전제정치 또는 극단의 정치의 빌미를 제공한다. 미국의 극우 보수주의와 유럽의 포퓰리즘 정치가 이 딜레마의 한 단면이다. 한국은 여기에서 얼마나 자유로울까.

<서중해 경제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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