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에서 보이는 흥미로운 경향이 하나 있다. 다양한 드라마와 영화를 소개하면서 ‘OO라고 무시당하던 주인공이 OO를 참교육하는 이야기’라는 식의 제목을 붙이는 것이다. 한국인이 생각하는 정의란 무엇인지, 어떤 서사 구조에서 쾌감을 얻는지, 사회관계를 바라보는 기본 관점은 무엇인지가 이 문장 하나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런 경향은 국가 제도와 법률에 대한 극단적 불신, 정의는 복수극의 형식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는 믿음에 기초한다.
그런데 ‘참교육’이라는 말을 이른바 ‘사적 복수’에 대한 열광으로만 해석할 수는 없다. 저런 믿음에 기초한 일종의 공적 규율체계가 이미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체계의 핵심에 신상 공개가 있다. 가해자, 범죄자 또는 ‘빌런’이라 생각되는 이의 신상을 온라인에 공개하고, 집단적 공격을 조직하는 행위는 정의를 실현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식으로 인정된다. 실제로 많은 한국인이 법적 처벌보다 신상 공개를 더 두려워하지 않는가? 신상 공개는 단순한 사적 복수가 아니라 공적 공간에서 실행되는 사회적 처벌과 제재의 한 가지 방식으로 자리 잡았다.
중대범죄신상공개법과 알권리
신상 공개의 기능을 분명히 보여주는 사례가 최근에 시행된 중대범죄신상공개법이다. 이 법의 목적은 “국가, 사회, 개인에게 중대한 해악을 끼치는 특정중대범죄 사건에 대하여 수사 및 재판 단계에서 피의자 또는 피고인의 신상정보 공개에 대한 대상과 절차 등을 규정함으로써 국민의 알권리를 보장하고 범죄를 예방하여 안전한 사회를 구현하는 것”이다. 문제는 유무죄가 확정되지 않은 피의자나 피고인에게 신상 공개라는 처벌적 조치를 가한다는 점이다. 이런 이유로 위헌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이 법이 드러내는 쟁점은 그보다 복잡하다.
먼저 법의 목적으로 제시된 ‘국민의 알권리’라는 개념을 살펴보자. 이것은 정확히 무엇을 알권리인가? 몇 가지 사례를 생각해보자. 내가 나 자신의 개인정보를 알권리는 당연히 보장된다. 장관 임명자의 과거 행적이나 국가기관의 의사결정 등을 알권리는 헌법이 보장하는 정치적 권리의 일부다. 반면, 타인의 개인정보, 연예인의 사생활, 타 기업의 내부정보 등을 알권리는 없다. 명확히 판단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어떤 경우에도 목적어 없는 알권리는 무의미하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알권리의 목적어를 진지하게 고려하는 경우가 드물다.
그럼 중대범죄신상공개법이 말하는 ‘국민의 알권리’의 목적어는 무엇인가? 중대범죄 피의자와 피고인의 신상정보일 것이다. 그런데 내가 시민으로서 그 정보를 알권리가 있다면, 왜 그것의 공개 여부를 법원도 아닌 수사기관이 판단하는가? 권리를 가진 시민의 요구와는 상관없이, 어떻게 수사기관 마음대로 신상 공개를 할 경우와 아닌 경우를 결정할 수 있는가? ‘국민의 알권리’란 사실상 수사기관의 권한 강화를 보기 좋게 포장하기 위한 미사여구 아닌가?
이 법을 미국의 머그샷 공개와 비슷한 것으로 소개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둘은 전혀 다른 원리에 기초한 제도다. 미국은 수사 대상이 된 모든 사람의 신상을 공공정보로 취급한다. 따라서 그에 대한 시민의 알권리를 당연히 인정한다. 굳이 이런 제도가 필요할까 싶지만, 어쨌든 여기에는 범죄의 종류와 심각성, 유무죄에 대한 판단이 개입하지 않는다. 머그샷 공개 자체는 처벌적 조치가 아니고, 사회적 낙인 효과도 제한적이다. 그래서 정치인과 유명인의 머그샷이 인터넷 밈으로 돌아다닌다.
이와 달리 중대범죄신상공개법은 신상 공개를 할 수 있는 중대범죄의 종류를 규정하고, 공개 권한을 수사기관에 부여한다. 이 법의 핵심은 선택적 정보 공개를 통한 사회적 유죄 선언에 있다. 신상 공개의 실제 의미는 이런 것이다. ‘법원은 아직 유무죄를 판단하지 않았지만, 우리 수사기관은 이 사람을 유죄로 판단하므로 신상을 공개해 심각한 범죄자로 선언하겠다.’ 이는 무죄추정의 원칙을 정면으로 무시하는 것 아닌가? 사실 이 법의 목적은 한국사회의 특징을 악용하는 데 있다. 신상 공개가 사회적 처벌과 집단적 분노를 조직하는 수단으로 기능하는 상황에서, 국가권력이 그 수단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겠다는 것이다.
무죄추정의 원칙
여기서 무죄추정의 원칙이 무엇인지 재확인할 필요가 있다. 요즘에 이 원칙을 올바르게 말하는 사례가 드물다. 누군가는 가해자를 방어하고, 피해자에게 침묵을 요구하는 수단으로 이것을 사용한다. 하지만 모든 시민은 법적 또는 도덕적 기준에 따라 타인의 행동을 판단할 수 있고, 유무죄를 주장할 수도 있다. 무죄 판결을 받은 사람의 유죄를 주장하며, 재판 결과를 비판하는 것도 가능하다. 경우에 따라 언론이 피의자나 피고인의 신상을 공개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어떤 경우에도 타인의 존엄성과 권리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물론 그 존엄성과 권리의 구체적 내용을 정의하는 일은 복잡한 작업을 필요로 한다).
그렇지만 국가기관은 재판에서 유무죄가 확정되지 않은 사람을 범죄자로 취급하거나 처벌할 수 없다. 중대범죄신상공개법은 이런 원칙을 무시하고, 피의자와 피고인에 대한 처벌적 조치를 허용한다. 흥미로운 점은 그것이 국가 제도에 의한 처벌이 아니라 대중의 집단 감정을 이용한 사회적 처벌이라는 사실이다. 이제 수사기관은 이 법에 따라 비국가적 처벌을 유도할 수 있고, 이는 여론 관리를 위한 매우 효과적인 수단을 제공한다. 이것이 ‘국민의 알권리’라는 말의 실제 의미다. 즉 대중의 집단적 분노를 적절히 달래주면서 그 분노를 필요한 곳에 활용하겠다는 뜻이다.
처벌을 복수의 형식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갈수록 강화되고 있다. 처벌에 대한 공포감을 통해 범죄를 예방한다거나, 죄지은 자를 도덕적 주체로 교정하기 위한 수단이 처벌이라는 식의 발상은 사라지고, 강력한 처벌을 통해 죗값을 충분히 받아내야 한다는 생각만 남는 것이다. 그래서 끔찍한 범죄가 발생하면 ‘사형시켜라’라는 댓글이 넘쳐나지만, 강력한 처벌이 범죄예방에 실질적 효과가 있는지를 진지하게 묻는 사람은 드물다. 상당수가 자신의 분노를 가라앉혀 줄 강력한 복수를 실행하는 일에만 집착한다. 놀라운 것은 한국의 국가 권력이 안전과 정의를 보장할 국가체계를 강화하는 대신, 복수의 논리를 국가운영의 기술로 흡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결과가 중대범죄신상공개법이라는 공적 복수 제도의 탄생이다.
<박이대승 정치철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