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복부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이 놀라운 장기는 종종 ‘제2의 뇌’라고 불린다. 소네트를 작곡하거나 방정식을 풀지는 못하지만, 이 복잡한 생물학적 경이로움은 우리의 전반적인 건강과 삶의 질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제2의 뇌’라는 타이틀은 장의 벽 내에 거주하는 놀라운 밀도의 신경세포에서 비롯된다.
소장신경계라 불리는 이 복잡한 네트워크는 약 5억 개가 넘는 뉴런으로 구성돼 있는데, 이는 두뇌 뉴런 수의 0.5%에 이르고, 뇌의 일부인 척수 및 기타 말초신경계의 다섯 배에 이르는 규모다. 소장신경계는 미주신경을 통해 두개골에 있는 ‘대뇌’와 양방향으로 의사소통해 소화, 영양소 흡수, 장 운동성을 제어한다. 본질적으로 우리의 장은 음식을 처리하고 내부 균형을 유지하는 중요한 임무에 집중된 자체 의식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우아한 이진체계: 초파리 유전학의 구원자들
1901년, 20세기의 벽두에 미국 뉴욕시의 컬럼비아대학에서 토머스 헌트 모건이 고전유전학이라 불렸던 초파리 유전학의 시작을 알린다. 이후 초파리 유전학은 미국이 유럽에 맞서 당당하게 내세우는 과학 분야로 성장했다. 하지만 영국에 유학 중이던 미국인 제임스 왓슨이 발견한 DNA 이중나선구조가 추동했던 분자생물학은 역설적으로 초파리 유전학의 확고한 지위를 위협하는 요소가 된다. 화학자와 물리학자로 구성된 분자생물학 그룹은 생화학적 실험 방법과 물리학적 개념 분석에 익숙하지 않았던 초파리 유전학자들을 유행에서 뒤처지게 했다.
바로 이 시기에 파지그룹의 일원이었던 시모어 벤저가 자신의 전문분야였던 박테리오파지 연구를 버리고, 초파리 행동유전학을 창시하는 일이 발생한다. 1974년 생체시계를 조절하는 최초의 유전자 ‘피리어드(period)’가 발견되고, 초파리 유전학은 행동을 조절하는 유전자라는 개념으로 다시 새롭게 조명받는다.
이렇게 야심 차게 시작된 초파리 행동유전학도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다시 시들해진다. 바야흐로 인간유전체계획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고, 정교한 초파리 유전학은 여전히 불가능했으며, 생쥐 유전학자들은 ‘넉아웃 생쥐’를 만들며 초파리 유전학의 지위를 위협 중이었다.
바로 이 시기, 게리 루빈은 가장 빠르게 초파리 유전체계획을 성공시키며 초파리가 유전학의 성배임을 다시 한 번 입증한다. 때맞춰 루빈의 동료였던 노버트 페리몬은 효모 유전학에서 발견된 ‘GAL4/UAS’라는 바이너리 체계를 이용해 원하는 조직과 세포에 원하는 유전자를 원하는 시기에 발현시키는 방법을 발표한다.
이를 이용하면, 신경회로를 지도화할 수 있다. 현재 초파리 행동유전학자들은 초파리 뇌의 복잡한 신경회로를 시각화하고 특정 신경세포집단이 행동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 분석하고 있다. 또한 UAS 제어하에 이온 채널이나 신경전달물질을 발현시켜 신경활동을 조작함으로써, 초파리 행동유전학은 특정 뉴런을 인위적으로 활성화하거나 억제해 의사결정이나 기억과 같은 행동에 대한 그들의 인과적 관여를 밝혀내고 있다. 우아한 이진체계는 유전자 발현 패턴을 분석하고 표적 뉴런에서 유전자 기능을 조작함으로써 수면, 학습, 중독과 같은 고차원 뇌 기능의 신경적 기초를 조사해 인간과 같은 복잡한 뇌 기능의 분석까지 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우아한 이진체계가 등장하자, 초파리 행동유전학은 두 번째 르네상스를 맞이한다. 그 영광이 그러나 영원한 승리를 보장하지는 않았다.
줄기세포, 암, 마이크로바이옴, 초파리의 내장과 인간
초파리의 유전학적 도구는 눈부시게 발전했지만, 여전히 초파리에서 발견된 사실이 얼마나 인간에 유용한지에 대한 의문이 존재했다. 제약회사들은 생쥐 유전학 분야에 대부분의 연구비를 투자했고, 정부 역시 그런 유행을 좇았다. 20세기 초반 자본주의의 메카 뉴욕에서 시작된 초파리 유전학의 운명은 사실상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초파리 유전학이 인간의 건강과 질병에 대한 유용함을 증명하지 못한다면, 초파리 유전학의 미래는 결코 보장받을 수 없는 것이었다. 모건 이후 두 세대 동안 초파리 고전 유전학이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기를 제외하면, 초파리 유전학의 역사는 그 쓸모를 입증하기 위한 투쟁기라고 봐도 과언은 아니다.
연구비 경쟁이 심각해지는 20세기 후반부터, 초파리 유전학자 중 상당수가 인간 질병 연구 분야로 뛰어든다. 이 시기 인간 유전병을 유발한다고 알려진 대다수의 인간 돌연변이 유전자가 초파리에서 시험됐고, 그중 일부는 초파리 유전학의 도움으로 질병의 기제를 분자 수준에서 알아낼 수 있었다. 헌팅턴 무도병, 알츠하이머, 루게릭병 등을 비롯한 퇴행성 신경질환 연구는 초파리 행동유전학의 아류로 시작해 주류로 성장했으며, 당시 미국에서 주목받던 삶의 질 연구와 맞물려 다시 한 번 초파리 유전학의 유행을 이어가게 한다.
그렇다고 초파리 유전학에 대한 인간 및 생쥐 유전학자 그룹의 무시가 사라졌느냐면 그건 아니다. 영장류 유전학자들이 생쥐를 무시하듯, 생쥐 유전학자들은 초파리를 무시한다. 그리고 그 천대의 이면엔 생쥐가 인간과 유전적으로 더 가깝다는 암시가 존재한다. 퇴행성 신경질환 연구에 획기적 전환을 가져왔지만, 초파리 유전학에 대한 정부의 지원은 결코 증가하지 않았다. 2010년대의 초파리 유전학은 또다시 위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바로 이 시기에 오바마 정부가 2013년 ‘브레인 이니셔티브’를 통해 인간유전체 연구에 맞먹는 수준의 뇌지도 구축 프로젝트를 발표했고, 게리 루빈은 하워드휴스의학연구소의 도움으로 자넬리아연구소를 열어 초파리의 뇌신경지도 작성에 착수한다. 2016년이 되면 오바마 정부의 마지막 과학프로젝트로 불리는 인간 마이크로바이옴(체내 미생물 생태계) 프로젝트가 시작된다. ‘국가 마이크로바이옴 이니셔티브’는 농업, 환경 복원, 인간 건강 등 다양한 분야에서 마이크로바이옴 연구를 발전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다.
초파리의 내장과 과학의 쓸모에 관해
초파리 유전학자들이 평소엔 잘 들여다보지 않던 초파리 성체의 내장을 들여다보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였다. 게다가 초파리 내장엔 마이크로바이옴뿐 아니라 성체줄기세포가 유일하게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져 있었다. 다시금 인간의 건강 및 질병과 연결고리를 찾은 초파리 유전학자들은 홀린 듯 초파리 뇌에서 내장으로 연구 분야를 옮겨가기 시작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20세기 후반 이후의 초파리 유전학은 어떻게든 그 유용함을 증명해 살아남겠다는 생존의 분투기였다. 4조6000억원의 연구개발 예산이 삭감된 지금, 한국 과학자들 역시 그 쓸모를 증명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김우재 낯선 과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