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베어스-영화와 현실 양쪽에서 비극으로 치닫는 사랑

2024.01.15

권위주의 정권의 탄압과 시골의 미신이 ‘합작’해 두 연인의 사랑이 결국 비극으로 끝나는 과정을 영화는 감독 자신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덤덤하게 묘사하고 있다.

/엠엔엠인터내셔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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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르키예 국경도시의 한 골목. 물건을 배달하는 사람들이 교차해 지나가고 술집에서 아르바이트하는 여성을 남자가 찾아간다. 남자는 여권을 꺼내 든다. 어느 여행객이 잃어버린 것이다. 여행객이 분실 신고하는 데 걸리는 시간, 약 사흘의 유효기간이 있다. 남자는 여자가 먼저 떠나면 나중에 따라가겠다고 말하고, 여자는 홀로 두고 떠날 수 없다고 말한다.

영화와 현실 속 두 연인의 평행이론

이것은 실제 이야기일까. 사실 영화의 인트로 연출이 너무 티가 난다. 보통 영화에서 그러듯, 거리를 걷는 평범한 사람들도 다 단역배우다. 나는 이 대목에서 봉준호 감독 영화 <살인의 추억>(2003)에서 송강호가 “여기가 강간의 왕국이냐”며 날아차기하는 장면을 떠올린다. 송강호가 날아차기하는 논두렁길은 아마 수없는 리허설 때문인 듯 잡초가 짓이겨져 있었다.

갑자기 화면의 전환. 지금까지 관객이 보고 있던 장면은 노트북 컴퓨터의 모니터 속에서 벌어지는 일이었다. 반체제 프로파간다를 찍는다며 출국이 금지된 감독이 실시간으로 중계되는 장면을 보며 원격으로 디렉팅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화면이 끊기면서 영화는 ‘감독의 현실’ 시간으로 넘어간다. 감독이 머무는 곳이 국경 시골이라 인터넷 신호가 잘 안 잡힌다. 사다리를 놓고 지붕 위에 올라가도 더 이상 인터넷이 안 된다. 원격으로 진행되던 영화 촬영은 중단됐고, 용을 쓰던 감독은 다 포기하고 사진기를 꺼내 동네 아이들을 찍는 한편, 집주인에게는 카메라를 들려주고 동네 처녀·총각의 약혼식 장면을 찍게 한다.

이 마을은 독특한 약혼식 풍습이 있다. 결혼을 앞둔 남녀의 친인척 동네 사람들이 모두 개울가에 모여 둘러싼 가운데 남자는 남자대로, 여자는 여자대로 발을 씻는 세족식을 하는 것이다. 순박한 집주인이 찍어온 영상을 검토하는 가운데 조감독이 튀르키예와 이란 국경을 넘어 감독을 찾아왔다. 조감독은 밀수업자들 루트로 국경을 넘어 망명할 것을 제안했고, 국경 너머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온 감독의 차를 한 처녀가 가로막는다. 이 처녀는 낮에 집주인이 찍어온 영상 속 약혼녀였다. 이 마을의 또 다른 풍습은 태를 자를 때 미래의 남편 이름으로 자르는 것이다. 고잘이라는 이 여성은 야곱이라는 남자에게 시집가기로 예정돼 있었다. 그런데 고잘은 대학 중퇴생인 또래 친구 솔두스와 사랑에 빠져 있다. 고잘은 감독에게 수수께끼 같은 예언을 건넨다. “만약 당신이 내가 남자친구 솔두스와 찍은 사진을 가지고 있다면 결국 피를 보게 될 것이다.”

권위주의 정권 탄압과 국경 마을 풍습의 컬래버

이후 감독을 찾아온 마을 사람들과 촌장은 “그 사진을 내놓으라”고 감독을 설득한다. 그런 사진을 찍지 않았다고 주장하지만 아무도 믿지 않는 눈치다. 마을 사람들 사이의 소문은 걷잡을 수 없이 확산하고 분쟁이 발생한다. 감독이 자기 카메라를 가져와 한 장씩 찍은 사진을 보여줘도 믿지 않는 눈치다. 촌장은 마을 사람들을 진정시키는 방안으로 ‘진실의 방’에 가서 사람들에게 “그 사진을 찍지 않았다”고 선언하라고 제안한다.

영화 제목의 곰은 그 과정에서 언급된다. ‘진실의 방’에 가는 길에 곰이 출현한다는 명분으로 마을 사람들이 같이 간다. 실제 곰은 그러나 존재하지 않는다(no bears). 기성 권위를 지키거나 유지하기 위한 거짓말이었다. 영화의 후반부는 비극으로 치닫는다. 여권 위조로 연인을 먼저 탈출시키려 했던 영화 속 사랑도 운명을 비관한 여성이 물에 투신하면서 끝난다. 결국 마을에서 쫓겨나듯 떠나게 되는 감독이 목격하게 되는 것은 야간에 국경을 넘으려다 국경수비대에 걸려 죽는 솔두스-고잘 커플이다(영화에서는 야곱과 고잘의 세족식이 이뤄졌던 개울가 바위에 피투성이로 누워 있는 솔두스만 비춘다. 고잘의 예언대로 “피를 본 것”인데, 사진은 진짜로 없었던 걸까).

권위주의 정권의 탄압과 시골의 미신이 ‘합작’해 두 연인의 사랑을 결국 비극으로 만드는 과정을 영화는 감독 자신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덤덤하게 묘사한다. 2022년 9월 베니스영화제에서 공개돼 경쟁부문 최고영화상인 황금사자상을 노렸으나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황금사자상은 미국 다큐멘터리 <낸 골딘,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에 돌아갔다. 전형적인 아트하우스 영화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작품들, 그리고 장이머우 감독의 초기작을 좋아하는 분들께 추천한다.

제목: 노 베어스(No Bears)

제작연도: 2022

제작국: 이란

상영시간: 107분

장르: 드라마

감독: 자파르 파나히

출연: 자파르 파나히, 나세르 하셰미, 바히드 모바셰리, 바크티아르 판제이, 미나 카바니

개봉: 2024년 1월 10일

등급: 12세 이상 관람가

수입/배급: 엠엔엠인터내셔널㈜

이란 당국의 탄압에 맞선 감독의 현재진행형 ‘투쟁’

영화 주인공이자 스토리텔링 주인공은 자파르 파나히 감독 자신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주요인물 중 그나마 필모그래피가 알려진 사람은 감독이 원격으로 찍는 영화 속 연인 바크티아르 판제이와 자라 커플을 맡은 남녀 배우다.

그중 자라 역으로 나온 미나 카바니가 이란 정부의 탄압으로 특히 널리 알려져 있다. 미나 카바니는 역시 이란의 여성 감독 세피데 파르시 감독의 영화 <레드 로즈>(2014)의 여주인공이었다. 그런데 영화 내용 중 누드 신을 찍었다는 이유로 이란 정부가 ‘이란 최초의 포르노 여배우’라고 비난하면서 비자발적 망명생활을 하게 된다. 현재 프랑스 파리에 거주 중이다. 세피데 파르시 감독의 다른 영화에도 출연하고 있다.

/자파르 파나히 감독 인스타그램

/자파르 파나히 감독 인스타그램

자파르 파나히 감독의 수난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조감독으로 일하다가 <하얀 풍선>(1995)으로 칸영화제에서 장편 데뷔작상인 황금카메라상을 수상하며 입봉했다. 세 번째 작품인 <써클>(2000)로 베니스영화제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오프사이드>(2006)로는 베를린영화제 은곰상을 수상했다. 그러다 이란 민병대의 총을 맞고 숨진 여대생 네다 솔탄 추모식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경찰에 체포돼 출국금지를 당한다.

2010년에는 ‘국가안보에 대한 위협과 이슬람공화국 반대 내용 선전’을 이유로 징역 6년형과 20년 동안 영화를 만들거나 각본을 쓰지 못하고 인터뷰와 출국도 금지되는 등의 형벌을 받는다. 전 세계 영화인들의 ‘파나히 석방탄원’을 받은 이란 정부가 2개월 복역 후 자택 구금조치를 취하자 그는 실내에서 카메라를 들고 찍은 <이것은 영화가 아니다>(2010)를 케이크 속 USB에 숨겨 베를린영화제에 출품하는 등의 ‘저항’을 계속한다.

2015년 자택 구금에서는 해제되지만, 여전히 출국은 불가능한 상태에서 자동차로 이란 곳곳을 다니며 찍은 <택시>로 베를린영화제 황금곰상을 수상했다. <3개의 얼굴들>(2018)로는 칸영화제 각본상을 수상했다. 여전히 출국금지 상태로, 영화제에는 참석하지 못하고 있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노 베어스>를 찍은 직후인 2022년 7월 감독은 다시 수감됐다. 2023년 2월 1일 그가 단식투쟁을 선언하자 당국은 이틀 만에 석방했다고 한다. 감독의 인스타그램에 들어가 보니 지난해 11월에 동료들과 집에서 찍은 듯한 근황(사진·오른쪽에서 두 번째)이 마지막 게시물이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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