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타인이 ‘지옥’ 되지 않으려면

강원국 작가
2023.11.13

픽사베이

픽사베이

가까이 붙어 앉은 게 화근이었다. 고등학교 다닐 적 사귀던 여학생이 있었다. 늦은 저녁 그 친구가 찾아왔다. 놀이터 벤치에 앉아 도란도란 얘기를 나눴다. 가족들과 로스구이를 먹었다는 그의 입에서 진한 파 냄새가 났다. 그날 이후 우린 멀어졌다.

너무 가까운 거리는 위험하다. 인간(人間)은 사람 인(人)과 사이 간(間)으로 이뤄져 있다. ‘사람 사이’란 뜻이다. 사이가 좋아야 관계가 좋다. 사이가 좋다는 건 적당히 거리를 뒀다는 의미다. 극장 맨 앞줄에 앉으면 영화를 관람하기 어렵다. 너무 먼 뒷자리도 그렇다. 스크린과 적당한 거리를 둬야 온전히 영화를 즐길 수 있다. 사람 관계도 매한가지다. 사이에 어울리는 거리를 둬야 온전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사이가 멀어도 안 되지만, 너무 밀착하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가깝지 않은 관계에서는 거리 두기가 저절로 이뤄진다. 상대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서로를 배려하면서 선을 지키려고 노력한다. 문제는 가까운 관계다. 연인이나 부부, 부모와 자녀 사이같이 가까운 관계에서는 선을 넘기 일쑤다. 아니 격의 없이 마음 편하게 대하는 것을 정상으로 여긴다. 그러다 보니 경계가 무너지고 선을 넘게 된다. 그 결과로 상처를 주게 된다. 마음의 상처는 대부분 이렇게 가까운 사람에게서 입게 마련이다.

가깝다고 늘 좋은 것만은 아니다. 우리는 누군가와 관계할 때 세 단계를 거친다. 첫 번째는 몇 사람 걸러 아는 사이다. 이런 관계에서는 그 사람을 잘 모르기 때문에 평판이 그의 인상을 좌우하게 된다. 두 번째는 그 사람을 잘 알게 되는 단계에서는 나쁜 사람이 거의 없다. 아는 만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 번째 단계로 나아가 더 깊이 알게 되면 그다지 좋은 사람이 별로 없다. 관계가 밀접해지면 상대에 기대하는 수준도 높아져 그걸 충족하기 어렵고 사소한 일에도 서운하고 실망할 수 있다. 너무 가까운 거리가 관계의 부담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이 가까워지기 위해 안달이다. 회사에서 임원이 되면 사장 주재 회의에 들어간다. 사장과의 거리가 가까워진다. 그때부턴 안전하지 않다. 창업한 회장이 경영하는 회사에서는 사장이 ‘파리 목숨’이다. 회장이 그의 이름을 아는 순간부터 언제 잘려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에 돌입한다. 그런데도 불을 향해 돌진하는 불나방처럼 회장에게 자기 이름을 알리려고 몸부림친다. 가까이 갈수록 영영 멀어질 수 있다는 자명한 사실을 모르는 사람처럼 말이다.

거리 두기가 필요한 이유

거리 두기가 필요한 이유는 우리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다름은 낯섦을 유발하고, 낯섦은 경계심을 불러일으킨다. 우리 각자는 낯선 이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얻기 위해 거리 두기를 원한다. 또 다른 이유는 누구나 자신을 중심으로 사고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각자의 관계 동심원을 가지고 있다.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용인하는 거리가 있다. 그 거리 안으로 허락하지 않은 사람이 침범해오면 불쾌하다.

그렇다면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둬야 할까. 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은 저서 <숨겨진 차원>에서 인간관계의 거리를 네 가지로 분류했다. 첫째, ‘밀접한 거리’다. 45㎝ 이내의 반 팔 정도 거리로, 연인이나 가족과 같이 높은 수준의 친밀도를 보이는 대상과의 거리를 뜻한다. 이 거리 안에 직장 동료나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 들어오면 거부감을 나타낸다. 둘째, 45㎝~1.2m 사이의 ‘개인적 거리’다. 보통 일반 사람들이 팔을 뻗었을 때 닿을 수 있는 길이에 해당한다. 친구나 지인과 대화를 하고 접촉하는 거리다. 셋째, 1.2~3.6m 사이의 ‘사회적 거리’로, 직장 동료와 같이 사회적 관계로 연결된 사람과의 거리다. 이 거리에서는 주로 사무적인 일을 처리한다. 넷째, 3.6~9m 사이의 ‘공적인 거리’로 타인으로부터 위협받을 경우 피할 수 있는 거리에 해당한다. 연극 무대에서 배우와 관객의 거리나 연설가와 청중 사이의 거리라고 할 수 있다.

나 역시 거리 두기의 기준이 있다. 나는 빈도와 농도를 기준으로 네 가지 유형의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첫 번째, 빈도는 잦지만 농도는 옅은 관계다. 직장생활을 할 때 일로 만난 관계다. 두 번째, 빈도는 높지 않지만 농도가 짙은 관계다. 학교와 사회에서 만난 친구들이 그렇다. 세 번째, 빈도도 낮고 농도도 옅은 관계는 거래로 만난 사람들이다. 끝으로, 빈도도 잦으면서 농도까지 진한 관계는 역시 가족이다. 여기서 농도가 거리에 해당한다. 농도가 진하면 거리가 가까운 것이다. 하지만 빈도까지 높은 관계에서는 거리를 밀착하지 않는 게 좋다. 애착이 집착으로 변질할 위험이 있다.

관계에서 상처받지 않는 방법은 세 가지다. 우선, 나만의 경계선을 가져야 한다. 나는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는다. 과도한 참견과 간섭, 지나친 요구 등 나의 독립을 위협하는 어떠한 시도도 단호히 거부한다. 마찬가지로 나는 남이 그어 놓은 경계선을 함부로 침범하지 않는다. 남을 억압하지 않기 위해 어디가 상대의 경계선인지 파악하려고 힘쓴다.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보기 위해 나 자신과의 거리도 두려고 노력한다. 나의 경계가 소중하듯, 타인의 경계 역시 존중받아야 마땅하고, 타인의 경계를 지켜줄 때 나의 경계 또한 지켜진다고 믿는다.

다음으로, 적정한 거리 두기다. 무엇보다 선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가족으로서, 친구로서, 직장동료로서 선을 넘지 않는 일이다. ‘우리끼리 왜 그래?’ ‘부모가 그런 말도 못 해?’ 이런 말을 삼가는 것이다.

거리에 따라 과도한 기대도 하지 말아야 한다. 가족관계에서나 가능한 일을 친구 관계에서 기대한다면 남는 건 상처뿐이다. 서로가 생각하는 거리감에 차이가 없는 것도 중요하다. 한쪽에서는 둘도 없는 친구로 생각하는데, 다른 쪽에서는 그저 지인 정도로 생각하거나, 한쪽에서는 연인 관계로 생각하는데 다른 쪽에선 친구 정도로 여기고 있다면 관계의 종말은 불 보듯 뻔하다. 나아가 관계에 연연하지 않으려고 한다. 내가 아무리 가까이하고 싶어도 안 되는 사람은 안 된다. 반대로 인연이 있으면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가까워진다.

시간이 흐르면 변해가는 거리

거리 두기는 시간의 경과에 따라서도 바뀌어야 한다. 연애할 때의 끈끈한 거리를 결혼해서도 기대하는 건 무모하다. 자녀가 성인이 돼서도 어릴 적 가졌던 거리를 유지하려고 하면 곤란하다. 또 거리는 상황에 따라서도 유연하게 적용해야 한다. 대학 시절 친동생처럼 아끼던 후배가 있었다. 홍보실에서 그를 출입기자로 만났을 때는 거리 조정을 해야 했다. 거리 두기에 실패하면 장 폴 사르트르의 희곡 <닫힌 방>에 나오는 말처럼 ‘타인은 지옥’이 될 수 있다.

끝으로, 선 긋기다. 거리 조정을 해봐도 개선이 어려운 관계는 단호하게 선을 긋고 끊어내야 한다. 예를 들면 강한 사람에게는 한없이 약하고 약한 사람은 잡아먹으려고 하는 사람, 자기가 기분 좋으면 한없이 좋다가 기분이 나빠지면 언제 그랬냐 싶게 돌변하는 사람, 늘 불평불만이고 부정적인 말만 입에 달고 사는 사람, 남 탓하고 핑계 대는 사람, 쉬지 않고 남의 험담하는 사람, 자기보다 잘난 사람 있다 싶으면 깎아내리기에 여념이 없는 사람. 이런 사람에게는 화낼 필요도 공들일 필요도 없다. 분명히 선을 긋고 멀리하는 게 상책이다.

자율주행 기능이 있는 자동차가 늘고 있다. 앞뒤는 물론 옆 차와의 거리가 너무 가까우면 경고음을 울리면서 접촉사고 위험을 스스로 예방한다.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도 이런 자율주행 장치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강원국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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