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한·중 우호 상징서 빨갱이 논쟁까지…정율성이 변했나요

정율성은 1938년 옌안 시절 항일군정대 여학생 대장이던 딩쉐쑹에게 매혹됐다. 들꽃을 꺾어 몰래 주고, <안나 카레니나>, <동백꽃 처녀> 등의 소설책을 건네며 연애편지를 살짝 꽂아넣곤 했다. 두 사람은 1941년 결혼했다. / 정율성 선생기념사업회·광주문화재재단 제공

정율성은 1938년 옌안 시절 항일군정대 여학생 대장이던 딩쉐쑹에게 매혹됐다. 들꽃을 꺾어 몰래 주고, <안나 카레니나>, <동백꽃 처녀> 등의 소설책을 건네며 연애편지를 살짝 꽂아넣곤 했다. 두 사람은 1941년 결혼했다. / 정율성 선생기념사업회·광주문화재재단 제공

‘정율성(1914 혹은 1918~1976)’이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원래 이름은 ‘부은’이었는데요. ‘선율로 성취하겠다’는 뜻을 담아 ‘율성(律成)’으로 바꾸었답니다. 음악가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이름이죠.

그런데 이 ‘정율성’이 요즘 ‘색깔론’의 중심인물이 됐습니다. 국가보훈부가 광주광역시가 추진 중인 ‘정율성 역사공원 조성 사업’에 제동을 건 겁니다.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은 “정율성이 6·25전쟁 당시 북한군과 중공군의 사기를 북돋운 ‘팔로군행진곡’과 ‘조선인민군행진곡’ 등 군가를 작곡한 인물”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광주시는 즉각 반대했고요. 강기정 광주시장은 “정율성을 한·중 우호 교류의 상징으로 평가하는 시각이 많았던 까닭에 기념사업이 별다른 논쟁 없이 20년 가까이 진행됐다”고 반박했습니다. 강 시장은 또 “노태우 정권부터 시작됐고, 이명박·박근혜 등 보수정권까지 국비를 대준 사업에 제동을 거는 이유가 뭐냐”고 되물었습니다.

‘간담상조’의 상징 인물

정율성 논란을 보면서 2014년 7월을 떠올렸습니다. 당시 한국을 방문한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서울대 강연에서 한·중 친선의 역사를 언급하면서 허균(1569~1618)의 시를 인용했습니다. “허균의 시에 ‘속마음을 매번 밝게 비추고(肝膽每相照), 티없이 깨끗한 마음을 시린 달이 내려 비춘다(氷壺映寒月)’는 내용이 있습니다.”

시 주석은 “간담상조, 즉 ‘속마음을 터놓는 사이’가 바로 중국과 한국의 친선과 우의를 상징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이 시는 허균이 정유재란 즈음(1597~1598) 조선을 방문했다가 돌아간 명 사신 오명제에게 보낸 ‘송별시’의 한 구절입니다.

중국의 3대 음악가로 꼽히는 정율성. 광주광역시 출신인 그는 중국의 대표군가인 ‘중국인민해방군 군가’(팔로군행진곡)를 작곡했다. / 정찬구 정율성 선생기념사업회 이사장·광주문화재재단 제공

중국의 3대 음악가로 꼽히는 정율성. 광주광역시 출신인 그는 중국의 대표군가인 ‘중국인민해방군 군가’(팔로군행진곡)를 작곡했다. / 정찬구 정율성 선생기념사업회 이사장·광주문화재재단 제공

오명제는 조선 체류 중 이덕형(1561~1613), 윤근수(1537~1616), 허균 등과 교유하며 신라~조선에 이르는 100여명의 문집을 수집해 중국에 소개했어요. 시 주석이 언급한 한·중 우호 인물 중에 최치원(857~?)과 김구(1876~1949)가 포함됐고요.

이순신(1545~1598)과 함께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명 장수 등자룡(1531~1598)도 언급했습니다. 명나라 수군도독인 진린(1543~1607) 역시 이순신 장군의 전우였죠. 장군이 적탄을 맞고 쓰러지자 진린은 세 번이나 넘어지면서 울부짖었답니다.

“함께 싸울 이가 없구나! 나는 노야(老爺·이순신을 지칭)가 살아와서 구원할 것으로 여겼는데… 어찌하여 죽었는가?”

신중국 건국의 100대 인물

시 주석이 언급한 또 한 인물이 바로 정율성입니다. 그럴 만합니다. 국내에서는 생소할지 몰라도 현대 중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니까요.

정율성은 2009년 중국의 건국 60주년 행사에서 ‘신중국 건국에 공헌한 영웅 100인’으로 선정됐답니다. 시 주석은 정율성을 거명하면서 “중국인민해방군가를 작곡한 한국인 출신”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정율성은 ‘의용군행진곡’(중국 국가)의 녜얼(1912~1935), ‘황하대합창’의 시싱하이(洗星海·1905~1945)와 함께 중국의 현대 3대 작곡가로 꼽힙니다

정율성은 시 주석의 언급대로 ‘한국인’이며, 광주광역시 출신입니다. 1933년 5월 중국 난징(南京)으로 떠납니다.

셋째 형(정의은)과 함께 중국에 도착한 정율성은 가명(유대진)으로 의열단이 설립한 조선혁명간부학교 2기생으로 입교한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이 학교 2기생 명단에 ‘유대진=가명 정부은’이라는 이름이 들어 있었다는 겁니다.

정율성의 부인 딩쉐쑹(丁雪松·1918 ~2011)은 “남편이 의열단 소속으로 난징의 전화국에 침투해 전화를 도청하며 일본군 정보를 수집하는 비밀공작 활동을 했다”(<작곡가 정율성>)고 했는데요. 하지만 정율성이 의열단원으로서 뚜렷한 임무를 받아 활동했다는 공식 기록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어떤 연구자는 정율성이 아예 조선혁명간부학교에 입교하거나 의열단에 가입하지 않았다는 견해를 밝히기도 합니다. 정율성이 “항일 구국운동에 종사하고 음악을 배우기 위해 난징에 왔다”고 밝혔다는 겁니다.

정율성은 어려서부터 둘째 형이 남겨놓은 만돌린을 켜면서 온종일 노래를 불렀다는데요. 부친(정해업)은 어린 정율성에게 “항일 전쟁에서 군대가 진군할 때 사기를 돋우는 우렁찬 군가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는군요.

동방의 ‘카루소’

정율성은 난징 시절 인생의 큰 전환점을 맞이합니다. 구소련 출신인 크리노와(Krenowa) 상하이 국립음악전과학교 교수로부터 성악을 배운 겁니다. 정율성은 1936년 5월 음악가로 첫발을 내디뎠는데요. 항일 청년들이 참여한 ‘오월문예사’ 창립 대회에서 만돌린을 직접 연주하며 자작곡 ‘오월의 노래’를 발표했습니다.

1942년 5월 옌안 문예 좌담회를 마친 뒤 기념촬영을 한 모습. 정율성은 그곳에서 ‘팔로군행진곡’과 ‘옌안송’, ‘엔수이야오’ 등 항일운동을 대표하는 곡을 발표했다. / 바이두 사진을 토대로 이종한의 <정율성 평전>에서 정율성의 얼굴 표시

1942년 5월 옌안 문예 좌담회를 마친 뒤 기념촬영을 한 모습. 정율성은 그곳에서 ‘팔로군행진곡’과 ‘옌안송’, ‘엔수이야오’ 등 항일운동을 대표하는 곡을 발표했다. / 바이두 사진을 토대로 이종한의 <정율성 평전>에서 정율성의 얼굴 표시

1937년 일제가 중일전쟁을 일으키자 정율성은 홍군(중국공산당군)의 근거지인 옌안(延安)행을 결행합니다. 1938년 4월 혁명의 열기로 가득 찬 옌안의 모습을 노래로 표현했는데요. 그것이 ‘옌안송(延安頌·연안송)’입니다. 이 곡은 한국 민요 ‘낙화암’ 음조를 기초로 한 중국 최초의 서정송가로 꼽힙니다.

“산봉우리에 노을 불타고 강 물결 위에 달빛 흐르네… 아! 연안 장엄하고 웅위한 도시 항전의 노래 곳곳에 울린다.”

이 노래는 심지어 국민당 통치구역에까지 요원의 불길처럼 전파됐고요. 노래를 듣고 옌안으로 발길을 돌리는 젊은이가 많았답니다. 가수 멍위(孟于·1922~)는 “여고생 때인 1938년 이 노래를 칭다오(청도)에서 들었는데…. 나도 모르게 가슴이 뛰었다. 혁명을 하려면 옌안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고했습니다. 탈영하던 병사의 마음을 바꾼 것도 바로 ‘옌안송’이었답니다.

‘중국인민해방군가’를 작곡한 한국인

정율성을 논할 때 ‘팔로군행진곡’(1939)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시진핑 주석의 언급대로 ‘중국 인민해방군가’로 지정된 곡입니다. 중국공산당군은 원래 ‘홍군’이었죠. 그러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로 2차 국공합작이 이뤄진 후 ‘국민혁명군 제8로군’으로 개편됐습니다. ‘팔로군’은 이때부터 중국공산당군을 지칭하는 보통명사가 됐어요. 이 무렵 정율성은 ‘팔로군행진곡’을 작곡합니다.

“전진! 전진!전진! 우리 대오 태양 따라 나간다. 조국의 대지 밟으며, 민족의 희망을 안은…우리는 인민의 군대. 두려워 않고, 굴복 않고, 용감히 싸우네….”

1945년 9월 옌안 나지핑(羅家坪). 1945년 9월 정율성과 항일운동 단체인 조선독립동맹의용대, 조선군정간부 300~400명이 북한으로 떠나갈 때의 모습 / 정율성 선생기념사업회·광주문화재재단 제공

1945년 9월 옌안 나지핑(羅家坪). 1945년 9월 정율성과 항일운동 단체인 조선독립동맹의용대, 조선군정간부 300~400명이 북한으로 떠나갈 때의 모습 / 정율성 선생기념사업회·광주문화재재단 제공

재미있는 착안점이 있습니다. 처음 시인 궁무(公木·1910~1998)의 작사 중에는 ‘전진(向前)! 전진(向前)! 전진(向前)!’ 부분이 없었다는 겁니다. 이때 정율성이 “노래 시작 부분이 어딘가 기백이 부족하다”면서 고쳤더니 노래가 살아났답니다.

‘팔로군행진곡’은 1949년 신중국 건국 후 ‘인민해방군 군가’로 사용됐고요. 1988년 7월 25일 덩샤오핑(鄧小平·1904~1997) 군사위원회 주석의 서명으로 ‘중국인민해방군 군가’로 공식 지정됐는데요.

이 곡은 1990년 베이징(北京) 아시안게임 때 개막식 첫 프로그램으로 연주되기도 했고요. 2015년 박근혜 전 대통령이 참석한 중국 전승절 70주년 열병식 행사에서도 울려퍼졌습니다. 정율성은 “‘팔로군행진곡’은 항일의 주역인 팔로군을 생각할 때 감정이 끓어올라 쓰게 된 것”이라 했습니다. 기본적으로 항일의 정신을 담은 군가라는 얘기죠.

혁명열사릉에 묻힌 정율성

정율성의 부인은 신중국 출범 후 중국 최초의 여자대사(덴마크·네덜란드)를 지낸 딩쉐쑹입니다. 정율성은 1938년 옌안 시절 항일군정대 여학생 대장이던 딩쉐쑹에게 매혹됐답니다. 들꽃을 꺾어 몰래 주고 <안나 카레니나>, <동백꽃 처녀> 등의 소설책을 건네며 연애편지를 살짝 꽂아넣곤 했다죠. 두 사람은 1941년 결혼했습니다.

‘중국인민해방군 군가’를 작곡한 정율성(왼쪽)은 중국 국가인 ‘의용군행진곡’을 지은 녜얼(가운데), ‘황하대합창’의 시싱하이(洗星海)와 함께 중국의 현대 3대 작곡가로 꼽힌다. / 정율성 선생기념사업회·광주문화재재단 제공·바이두 캡처

‘중국인민해방군 군가’를 작곡한 정율성(왼쪽)은 중국 국가인 ‘의용군행진곡’을 지은 녜얼(가운데), ‘황하대합창’의 시싱하이(洗星海)와 함께 중국의 현대 3대 작곡가로 꼽힌다. / 정율성 선생기념사업회·광주문화재재단 제공·바이두 캡처

1950년 중국 국적을 취득한 정율성은 문화대혁명 기간(1966~1976) 중 간첩죄명으로 감금되는 등의 위기를 맞게 됩니다. 1976년 4인방이 몰락한 뒤 왕성한 작품활동을 벌이다가 그래 12월 뇌일혈로 쓰러져 세상을 떠납니다.

정율성은 바바오산(八寶山) 혁명 열사릉에 묻혔는데요. 그의 비문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새겨져 있습니다.

“정율성 동지는 중국 인민 혁명사업에 평생을 바친 혁명가다. 인민은 영생불멸한다. 그의 노래도 영생불멸할 것이다.”

정율성은 ‘팔로군행진곡(중국인민해방군 군가)’과 ‘옌안송(연안송)’, ‘옌수이야오(연수요)’만 작곡한 게 아닙니다. 장르를 불문하고 360여 곡을 창작한 중국의 대표음악가입니다. 그중 항일의식을 고취하는 곡이 다수를 차지합니다.

‘조선인민군행진곡’ 작곡자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문제란 말입니까. 정율성에게는 아마 영원히 지울 수 없을 듯한 흠결이 있습니다. 북한군의 이른바 ‘조선인민군행진곡’을 지은 작곡가라는 족쇄입니다.

정율성은 해방(1945) 이후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부인 및 딸과 함께 북한에 가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광주에 조성된 정율성로와 동상. 257m 길이의 ‘정율성로’는 2008년 주민 의견수렴을 거쳐 제출된 안을 ‘도로명주소위원회’에서 법적 절차를 거쳐 결정됐다. 정율성 동상은 중국 광저우(廣州) 하이슈구(海殊區) 청년연합회가 기증해 한·중 우호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 연합뉴스

광주에 조성된 정율성로와 동상. 257m 길이의 ‘정율성로’는 2008년 주민 의견수렴을 거쳐 제출된 안을 ‘도로명주소위원회’에서 법적 절차를 거쳐 결정됐다. 정율성 동상은 중국 광저우(廣州) 하이슈구(海殊區) 청년연합회가 기증해 한·중 우호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 연합뉴스

그해 12월 평양에 도착한 정율성은 황해도당위위원회 선전부장으로 일했습니다.

정율성은 이때부터 ‘해방행진곡’, ‘조선인민군행진곡’, ‘조중우의’ 등의 노래를 만들었습니다.

정율성은 이후 북한과 중국을 오가다가 1952년 4월 중국으로 돌아옵니다. 그가 작곡한 ‘조선인민군행진곡’의 가사를 봅시다. “우린 강철 같은 조선인민군… 불의의 원쑤들을 다 물리치고 조국의 완전독립 쟁취하리라… 승리의 민주대열 조선의 인민군, 나가자 용감하게 싸워 이기네.”

월북 시인 박세영(1902~1989)의 가사에 붙인 곡입니다. 어찌 보면 정율성은 중국군과 북한군의 대표 군가를 창작한 전무후무한 인물이 되는 셈입니다. 그런 이력의 인물이니 어떻게 됐겠습니까. 전쟁을 겪은 세대가 시퍼렇게 살아 있는 상황에서 ‘원쑤’와 ‘용감히 싸우는 인민군’이라는 내용의 군가를 창작한 인물을 선뜻 용인할 수 없었겠죠. 지금도 마찬가지일 거고요.

정율성 격하 운동의 허와 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한 번쯤 생각해봐야 할 것이 있어요. 그동안 정부가 정율성 관련 행사에 국비를 대주면서 지원한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정율성이 음악으로 항일운동에 투신한 것도 맞고요. 집안 전체가 독립운동에 나선 것도 사실입니다.

여기에 외교 관계에서 한·중 간 우호의 상징 인물로 부각됐기 때문이죠. 그랬으니 진보는 물론이고 보수 정권 시절에도 정율성 관련 행사에 국비를 대주며 지원했겠죠.

혹여 “정율성이 ‘조선인민군행진곡’을 작곡했다는 사실을 그동안은 몰랐다”는 말은 하지 맙시다. 정부가 얼마나 무능하면 그런 초보적인 팩트도 체크하지 못했단 말입니까. 그건 아니겠죠.

그런 흠결을 알고 있었지만 ‘한·중 관계의 아이콘’으로 등장시키려고 정율성의 존재를 부각시켰겠죠.

반면 요즘 전개되고 있는 ‘정율성 격하 운동’은 어떨까요. 악화된 한·중 관계를 반영하는 사안이 아닐까요. 왜 국가보훈부가 앞장서서 편을 가르고 갈등을 유발하는지 모르겠다는 여론도 만만치 않아요. 규정과 법대로 제동을 거는 것이라고 하는데요. 아니 국익이 왔다 갔다 하는 외교 문제에 무슨 법이 소용됩니까.

다른 견해가 있고 주장이 있다면 차분하게 그야말로 국민적 공감을 얻는 과정을 거친 후에 재평가하면 되는 거죠. 20년 이상 추진해온, 그것도 지자체 사업을 두고 감 놔라, 배 놔라 한다는 것은 좀…. 그것도 일방의 주장만 듣고요. 외교란 살아 있는 생물 같다는데 한·중 관계 좋아져 정율성이 다시 부각되면 어쩌려고요.

물론 간과해서는 안 될 부분이 있기는 합니다. 지난 7월 24일 국가보훈부가 백선엽의 국립현충원 홈페이지 안장자 정보 비고란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의 문구를 삭제했다고 해서 비판을 받았는데요.

정율성 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율성이 한·중 우호의 상징 인물인 것과는 별도로 그가 6·25전쟁 때 인민군의 사기를 북돋우는 ‘인민군행진곡’을 만들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애써 축소하거나 외면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참에 분명히 공과 과를 더불어 기록해야 합니다. 균형 잡힌 시각이 필요하죠.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Ikh074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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