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정치철학자인 알렉시스 드 토크빌은 1831년 프랑스 정부의 후원을 받아 미국에서 약 1년간 체류한다. 프랑스 정부는 토크빌을 파견해 미국의 형사교정 제도를 연구하고자 했다. 토크빌의 생각은 프랑스 정부의 계획과 달랐다. 18세기 말 프랑스 시민혁명은 왕정을 전복했고, 이 시기에 성장한 토크빌은 민주주의라는 새로운 제도의 미래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프로젝트의 스케일을 키워 미국의 형사교정 제도가 아닌 민주주의에 대한 대작을 썼다.
그가 쓴 <미국의 민주주의>는 미국의 국립도서관격인 의회도서관(Library of Congress)에 소장돼 오늘날에도 미국 민주주의에 대한 가장 권위 있는 책으로 남아 있다. 이 책에서 토크빌이 강조한 미국 민주주의의 핵심이자 성공 비결은 바로 시민사회다.
튼튼한 민주주의는 튼튼한 시민사회를 필요로 한다. 튼튼한 시민사회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힘을 모을 수 있는 단체들, 이른바 자발적 결사체가 많고 활발하다. 바로 이곳에서 시민들이 민주주의의 구성원으로 참여하기 위해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습득한다. 그래서 토크빌은 시민사회를 ‘민주주의를 위한 학교’라 불렀다.
나는 일명 프래카데믹(실무자를 뜻하는 ‘프랙티셔너’와 연구자를 뜻하는 ‘아카데믹’의 합성어)이다. 기술을 통해 정부 서비스를 더 쉽고 편리하게 만드는 시빅 테크 영역의 대표 단체에서 데이터 과학자로 일한다. 또 다른 나의 정체성은 학계에 속해 있는 연구자다. 민주주의와 시민사회에 관해 국제적으로 가장 앞선 연구를 하는 존스홉킨스대학 SNF 아고라연구소의 연구위원이다.
민주주의 쇠퇴의 원인은
지난 3년간 SNF 아고라연구소에서 토크빌이 미국 민주주의와 관련해 남긴 아이디어를 빅데이터로 테스트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한하리 존스홉킨스대학 정치학과 교수, 시민단체 무브온(MoveOn)에서 데이터 사이언스 디렉터로 일했던 밀란 드 브리스와 공동 개발한 ‘현대의 아고라 지도 만들기(Mapping the Modern Agora)’는 오늘날 민주주의의 위기가 수요뿐 아니라 공급의 문제임을 보여준다.
20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전 세계의 많은 사회과학자가 민주주의의 확산에 대해 연구했다. 제국주의 식민지에서 해방된 많은 국가가 근대화 과정을 통해 민주주의로 진입했기 때문이다. 한국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21세기의 가장 뜨거운 이슈는 민주주의의 후퇴(democratic backsliding)다. 민주주의가 붕괴할 징조가 보인다. 2018년 하버드대의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은 <민주주의는 어떻게 무너지는가(How Democracies Die)>를 출판했다. 장구한 민주주의 역사를 자랑하는 미국에서 2021년 폭도들이 의회를 점거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바이든 당선 이후 선거 결과에 불복한 트럼프 지지자들이 폭력이라는 극단적 수단을 택한 것이다.
학계와 언론은 민주주의가 쇠퇴하고 권위주의가 부활하는 원인으로 양극화, 가짜뉴스를 꼽는다. 유권자가 분열된 틈으로 극단적 성향의 정치인이 등장한다. 이들이 무분별하게 시사 정보를 수용하기에 무능력하고 무책임한 정치인이 정권을 장악할 수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위기가 오로지 유권자의 책임일까? 학생의 학습 결과가 기대 이하라면 그 책임은 학생뿐 아니라 교사, 가정, 주변환경에도 있다. 토크빌은 건강한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민주주의를 위한 학교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 학교는 어디에 얼마나 있으며, 누구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나?
사회 참여를 위한 정보 찾으려면
정보가 풍요로운 시대지만 소비가 아닌 사회 참여를 위한 정보는 찾기 어렵다. 네이버 지도로 동네 맛집은 쉽게 찾을 수 있지만, 특정 정책 결정 과정에 참여하는 데 도움을 주는 단체를 찾기는 어렵다. 우리 지역에 있는 환경단체를 찾아 관련 정책이 어떻게 결정되는지 알고 싶다. 이 문제에 적극적으로 의사를 표현하는 정당과 정치인을 지지하고 싶다. 하지만 이러한 정보를 찾는 데 특화된 디지털 서비스는 없다.
답은 데이터에 있다. 재단, 학교, 병원, 노조, 정치단체, 시민단체를 비롯한 다양한 비영리단체들은 매년 미국의 국세청격인 IRS에 세금 신고를 한다. 정부와 기업이 아닌 모든 단체는 거의 모두 비영리단체다. 자본금만 31조원이 넘는 ‘빌 앤드 멀린다 게이츠’ 재단도, 굴지의 의료기관인 존스홉킨스 병원도 비영리단체다. IRS는 이 정보를 외부에 공개한다. 우리 팀은 여기서 180만개가 넘는 세금 보고서를 수집했다. 60만개의 관련 웹사이트, 소셜미디어 피드도 모았다. 우리 팀의 데이터베이스는 미국 시민사회에 관한 가장 방대한 데이터다. 이 빅데이터는 미국의 지역별로 어떤 비영리단체가 존재하는지, 이들의 설립 목적이 무엇인지, 이들이 지역 구성원들에게 어떤 참여의 기회를 제공하는지 보여준다.
옆의 지도는 이 빅데이터로 만든 캘리포니아주의 시민사회 지도다. 왼쪽 위 지역에는 시민단체가, 그 아래 지역에는 교육단체가, 오른쪽 위 지역에는 종교단체가, 그 아래쪽에는 의료단체가 많다. 시민단체는 도심에 몰려 있고, 종교단체는 이보다 넓게 퍼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개천에서 용이 나기 힘들다’라는 말처럼 지역별로 기회의 격차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지역별로 민주주의와 시민사회에 참여하는 기회의 격차가 얼마나, 어떻게 존재하는지에 대한 체계적 데이터는 그동안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 팀이 작성한 학술논문은 미국의 이러한 지역별 시민사회 참여 기회의 차이가 지역별 코로나19 팬데믹 대응 능력과 얼마나, 어떻게 연관이 있는지 다뤘다. 이 논문은 ‘네이처’ 자매지인 ‘네이처 휴먼 비헤이비어’에 최근 게재 승인됐다. 우리 팀은 학술 연구에서 그치지 않고 학계와 현장의 간격을 좁히고자 한다. 이 빅데이터에 기반해 정부, 정당, 재단, 시민단체들이 어떻게 하면 전략적으로 시민 참여를 도울 수 있을지 자문한다.
민주주의를 살리는 빅데이터는 존재한다. 민주주의의 뿌리는 시민이다. 더 많은 시민이 더 쉽고 편하게 민주주의에 참여할 때 민주주의가 튼튼해진다. 데이터에 답이 있다. 세금 보고서 같은 정부 데이터를 시민을 위해 활용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시민사회의 오늘을 진단하고 민주주의의 내일을 전망할 수 있다.
<김재연 코드 포 아메리카 데이터 과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