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 희곡에서는 극의 전개가 꼬이면 갑자기 신이 등장해 갈등을 해결한다. 이를 일명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 한다.
고대 그리스와 오늘날에는 2000년이 넘는 시간차가 있다. 그러나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여전히 존재한다. 용이 이끌던 전차와 같은 데우스 마키나는 관객의 신앙심과 경외심을 북돋우기 위해 사용됐다.
21세기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빅데이터와 인공지능이다. 정부란 연출자는 이 새로운 기술을 활용해 시민이란 관객을 현혹한다. 2022년, 한반도 중부지방이 기록적인 집중호우로 피해를 입었다. 이때 정부는 빅데이터와 인공지능을 활용한 홍수예보 시스템을 대안으로 내놓았다. 2023년의 한반도 폭우에도 같은 대안이 등장했다. 비슷한 재해가 연이어 등장했고, 비슷한 대안이 거듭 제공됐다. 그 와중에 누구도 인공지능이 어디 사는 누구의 홍수 피해를 어떻게, 얼마나 줄여줄 수 있을지는 상세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21C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 빅데이터
정부는 빅데이터를 새로운 혁신 수단이라고 설명하지만 애초에 정부 데이터 자체가 빅데이터다. 구글, 메타 같은 글로벌 테크 기업이 빅데이터를 새로운 장으로 열기 전에 가장 방대한 데이터를 보유하고 가장 광범위하게 사용했던 것이 정부다. 국가의 정당성은 국민의 지지로부터 나온다. 그래서 독재자도 여론을 무시할 수 없다. 여론을 잃으면 명분을 잃는다.
하지만 국가의 실질적 힘은 공권력(군대·경찰)과 돈(조세재정)에서 나온다. 정부가 이 힘을 활용해 어떤 집단을 포용 또는 배제하려면 각 집단에 소속된 개인을 파악해야 한다. 어느 곳에 사는 누가 남자고 여자인지, 나이가 많은지 적은지, 가난한지 부유한지, 내국인인지 외국인인지 알아야 한다. 이런 배경 하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구통계, 빅데이터 수집은 국가의 중요 사업이었다. 구약성서의 민수기(Book of Numbers)는 전쟁에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을 세는 것을 기록한 책이다.
오늘날 정부 빅데이터의 새로운 점은 데이터의 통합이다. 이런 노력이 등장하는 이유는 사회 문제는 종합적이기 때문이다. 복지를 예로 들어보자. 가난은 종합적 사회 문제다. 그러나 이에 대응하는 복지 정책은 담당 부서에 따라 구분된다. 가정의 소득 수준이 낮으면 취약계층 문제다. 이 가정에 아이가 있으면 아동복지 문제다. 출산한 여성이 있다면 육아복지 문제가, 노인이 있다면 노인복지 문제가 추가된다.
그런데 정책마다 담당 부서가 다르니 한 가정이 다양한 복지 혜택을 누리려면 각각의 지원책을 하나하나 신청해야 한다. 가난한 사람은 돈만 부족한 것이 아니라 시간도 없다. 저소득층은 시간당 임금이 낮기에 새벽부터 나가 밤 늦게까지 일해야 한다. 때로는 동시에 여러 일을 해야 한다. 이런 일상에서 복잡한 서류를 모두 파악하고 실수 없이 준비해서 제출하기란 어렵고 힘겹다.
한국 정부는 복지 서비스 신청과 이용의 불편을 줄이기 위해 10년 넘게 노력해왔다. 이 노력의 목표 중 하나는 시민들이 한 곳에서 다양한 정책을 한 번에 지원하도록 돕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사전에 복지 데이터가 통합돼야 한다. 한국 정부의 복지 빅데이터 통합 사업은 2010년 ‘행복e음’을 통해 처음 시작됐다. 이후 비슷한 빅데이터 사업이 확장됐다. 복지 빅데이터 구축과 활용은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한국 정부의 통일된 어젠다다.
미국에서도 이런 통합 복지 정책 신청 사이트가 유행이다. 2023년 코드 포 아메리카는 빌 앤 멀린다 게이츠 재단의 후원을 받아 미국의 복지 서비스 신청 절차에 대한 새로운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의 50개 주 중 한국의 ‘복지로’처럼 한 사이트에서 다양한 복지 정책을 신청하는 디지털 서비스를 제공하는 주정부가 이제 34개 주에 이른다.
지난 6개월간 미국의 어느 주정부와 같이 일하며 이런 통합 복지 정책 신청 사이트의 문제점을 깊이 살펴볼 기회를 얻었다. 정부 공무원과 정기적으로 회의했고, 관련 빅데이터를 바닥까지 들여다보았고, 신청인과의 면담 과정에도 참여했다. 그 과정에서 느낀 점은 이상과 현실의 괴리였다. 한 곳에서 모든 정책을 신청할 수 있으니 분명 신청 방법은 쉬워졌다. 하지만 신청 절차는 여전히 복잡하고, 관련 규정은 난해하다. 복지 급여는 그냥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조건을 만족해야 한다. 이중 중요한 조건이 가족 인원수다. 정부는 소득 수준이 같은 가정이 둘 있다면 그들 중 구성원이 더 많은 가정이 지원을 더 필요로 한다고 판단한다.
복지 정책 신청 웹사이트들의 문제점
문제는 가족 인원수를 세는 기준이 정책에 따라 다르다는 점이다. 의료비 지원 정책에서는 세금을 내는 가족의 수를 따진다. 식품비 지원 정책에서는 한 집에서 밥을 같이 먹는 가족의 수를 따진다. 이런 미묘한 기준의 차이에서 오는 혼동이 많아졌다. 나아가, 이 모든 과정이 디지털로 진행되는 것도 문제다. 직접 관공서를 방문해 서류를 작성하면 모르는 부분을 담당자에게 물어볼 수 있다. 웹사이트에서 급여 신청을 하다가 헷갈리는 내용이 있으면 물어볼 곳이 없다. 정보를 잘못 기입해 신청이 거절당하거나 심사가 지연될 경우, 결국 신청인의 책임이다.
빅데이터에 기반을 둔 통합 복지 신청 사이트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다. 어떻게 만드느냐가 문제다. 사람이 중심인지 기술이 중심인지가 문제다. 빅데이터, 인공지능 같은 첨단 기술은 신이 내린 해결책이 아니다. 신청인의 불편과 담당자의 고충을 모두 듣고 그들이 필요한 서비스를 만들 때, 시민의 불편을 덜어주는 공공 서비스가 탄생한다.
코드 포 아메리카는 2020년부터 미네소타주와 함께 통합 복지 신청 사이트를 만들었다. 제작 과정의 핵심은 ‘유연한 경청’이다. 미네소타주의 4개 카운티에서 독신 가정만을 대상으로 신청 사이트를 만들었다. 여기에 점차 기능을 추가하고 대상자를 넓혔다. 이 과정에서 신청인과 담당자의 피드백을 모두 받아 기능과 서비스를 개선하는 데 활용했다. 그 결과, 2020년부터 2022년 6월까지 인구 570만인 미네소타에서 복지 급여를 받은 주민의 숫자가 40만명을 넘었다.
시민이 정부에 원하는 것은 빅데이터가 아니다. 좋은 서비스다. 좋은 서비스는 정부가 시민의 목소리를 들을 때, 그들의 필요를 그 어떤 첨단 기술보다 우선할 때 나온다. 정부 서비스를 좋은 서비스로 만들기 위해 존재하는 영국 디지털 서비스청의 정부 서비스 설계 제1원칙은 ‘이용자의 필요에서 출발하라(start with users needs)’이다.
<김재연 코드 포 아메리카 데이터 과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