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버스까지는 18분이 남았다. 버스 배차간격을 확인하는 일은 서울에 살게 된 이후로 없어진 습관이다. 나는 다른 버스를 고른다. 일단 타고, 도착하면 방법은 얼마든 있을 거였다. 그 동네라면 훤했으니까. 인천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는 일은 10년 만이다. 그곳으로 향하는 버스는 모두 빨간색이다. 빨간색 버스가 수시로 정류장을 드나들며 인천의 곳곳으로 사람들을 실어나르지만, 사실상 같은 버스는 30분의 한 대꼴로 온다. 서울을 나오는 날이면 버스 배차 시간부터 확인하곤 했다. 무턱대고 나왔다가는 한참을 기다리게 됐으니까.
내가 기억하는 인천의 절반은 빨간 버스다. 평생 많은 버스를 타봤지만 잠을 자기에는 빨간 버스만 한 것이 없다. 관광버스처럼 등받이 각도를 조절할 수 있는 좌석이 있고, 한 번 고속도로에 들어가면 정차하지 않고 일정한 속도로 앞을 향해 매끈하게 내달렸다. 덕분에 잠에 빠지면 깰 일이 거의 없었다. 버스를 탔지만 목적지에 도착하는 데는 실패하는 날이 많았다. 내가 줄기차게 빨간 버스를 타던 시절은 중·고등학생 때였으니, 생각해보면 한창 잠이 많던 시기였다. 한창 클 때의 아이와 빨간 버스가 만나면 무한 루프의 슬리핑 버스가 된다. 나는 서울과 인천을 가로지르며 깊은 잠에 빠졌다. 인천 끄트머리에 있던 우리 동네에서 잠깐 눈을 감았다가 뜨면 신촌이었다. 서울역의 비릿한 냄새가 코끝을 스치고, 내려야지 하고 눈을 뜨면 거짓말처럼 다시 인천에 도착해 있었다. 분명 여러 번을 내렸고, 내려서 학교에 도착했다고 생각했는데 몸은 여전히 빨간 버스 안에 있었다. 버스에서 내릴 즈음에는 키가 조금 더 자라 있었다.
학교에는 점심때가 다 돼야 도착했다. 혼비백산으로 뛰어오느라 진이 다 빠진 얼굴로 어버버하며 어떻게 늦었는지도 설명하지 못했다. 친구들과 선생님은 외계인을 보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알 수 없는 억울함에 부아가 치밀고 토가 나올 것 같았다. 빨간 버스와 함께 와서 해명을 하고 싶었다. 헐레벌떡 내리느라 버스에 두고 내린 물건들이 종일 눈에 아른거렸다. 그런 날이 줄줄이 이어지고, 학교에 가는 건지 버스에 타는 건지 알 수 없는 날들이 이어져도 인천에서 서울로 학교에 다니는 것을 문제 삼은 적은 없었다. 서울이 좋았던 건지, 버스가 좋았던 건지 알 수 없다. 나는 그저 매일 아침 빨간 버스에 올랐다.
간혹 드물게 잠들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때는 울었다. 잠 다음으로 많은 것이 생각이었으니까. 빨간 버스에서 가장 울기 좋은 자리는 맨 뒷줄 가운데 자리다. 자칫했다가는 언제든 앞으로 데굴데굴 구르기 딱 좋은 텅 빈 복도가 쭉 뻗어 있다. 버스에 타는 모든 승객이 가장 마지막으로 선택하는, 버스에서 가장 위험한 좌석. 그곳에 앉으면 천장에 난 작고 네모난 창문을 볼 수 있다. 그곳이 열려 있으면 시원한 바람이 얼굴을 향해 불어왔다. 그것은 그 시절 나에게 울 장소로는 요동 벌판 다음으로 적절했다. 그것은 무엇보다 장소에 걸맞은 의식처럼 보였다. 무릇 산 정상에 오르면 “야호!” 하고 외치듯이. 모두가 앞을 보고 있고, 모두가 앞으로 향하고 있으며, 짝수로 앉은 사람들 사이에서 유일한 나머지수가 되어 앉아 있었으니까. 구슬 똥 같은 눈물방울을 쉬지 않고 뚝뚝 흘렸다. 그때 운 것을 모아 말렸으면 소금 한 통은 거뜬할 거다. 울었던 기억은 선명한데, 이유는 모두 녹아버렸다. 삶은 그때도 마음처럼 되질 않았던 모양이다. 아무렴 버스에 타고 내리는 것도 되지 않았던 것을.
어떤 이유에선가 이곳에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거라고 믿지 않았다. 이곳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 같다고 믿고 싶었다. 마치 종료된 게임 서비스처럼, 도메인을 잃은 홈페이지처럼. 그런데 그곳에 가는 일은 우스울 정도로 금방이었다. 창문 밖으로 너무나 익숙한 풍경이 시작됐고, 한산한 오후의 경인고속도로를 시원하게 질주하던 버스는 순식간에 나를 그곳에 데려다 놓았다. 나는 앞쪽 창가 자리에 앉아 눈을 크게 뜨고 밖을 바라보았다. 나는 더 이상 내릴 곳을 지나칠 정도로 잠이 많지 않았고, 눈물을 뚝뚝 흘릴 만큼 촉촉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인천은 그대로였다. 마치 10년 전에 내 방 책상에 두고 간 지우개와 연필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것처럼. 풍경들은 즉각적으로 기억들을 불러냈다. 매일 같이 드나들던 지하철역 입구, 자전거를 세워두던 골목, 저기 저 하천에서는 놀다가 너구리를 마주친 적이 있었고, 그 옆에는 언젠가 일했던 편의점이 있었다.
그 동네에서 우리 가족도 잠깐 집이란 걸 가졌다. 단 한 동짜리 작고 낡은 아파트의 10평짜리 집이었다. 엄마는 지금까지도 종종 그때의 이야기를 한다. 우리도 집이 있었다고. 꿈이라도 꾼 듯이 말하곤 한다. 그때 그걸 안 팔았으면 지금쯤 얼마일까? 이따금 나한테 물었다. 궁금하지만, 팔을 걷어붙이고 알아볼 만큼 궁금하지는 않은, 딴소리 같고 혼잣말 같은 말이었다. 아빠는 경제위기가 닥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덜컥 집을 팔았다. 우리는 다시 월세를 살았고, 예고했던 경제위기는 오지 않았다. 그 일을 두고 아빠는 갖는 것도 뭐든지 가져본 애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 이후로 우리 가족이 뭔가를 가져본 일은 없다.
그 시절 나는 내 집이고 아니고가 어떤 차이가 있는지 몰랐다. 나에게 집은 엄마·아빠, 그리고 지붕이었을 따름이다. 다만 한껏 들뜬 엄마·아빠와 방마다 어떤 벽지로 도배를 할지 고르러 다니고, 화려하고 밝은 와인색 싱크대로 부엌을 단장하는 과정이 신났을 뿐이다. 우리는 딱 한 개만 고르지 못해 결국 방마다 다른 벽지를 발랐다. 내 방은 갖가지 꽃장식이 그려진 싱그러운 연두색이었다. 엄마가 그 집을 나오면서 그 벽지들을 하나하나 오래도록 바라보았던 것을 기억한다.
아파트는 기억 속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외벽의 흰색 페인트가 세월에 비해 바래지 않은 걸 보니 근 몇 년 사이에 페인트칠을 한 모양이다. 나는 아파트 입구 바로 옆에 있는 작은 부동산 앞을 기웃거렸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나 영진아파트 왔어. 옆에서 듣고 있던 이모가 묻는다. 어디래? 엄마가 말한다. 아, 영진아파트. 이모가 되묻는다. 그 영진아파트? 영진아파트라는 단어는 우리 가족에게 대명사다. 우리 집이라는 대명사. 나는 영진아파트 앞에 있는 영진부동산에 나붙은 영진아파트의 매매가를 그들에게 불러준다. 10년 전에 산 가격에서 딱 두 배 올랐다. 그것은 내가 자취하는 집의 전세보증금에도 못 미친다. 나는 말한다. 자, 봐봐. 이 집 갖고 있었어도 횡재수는 못 됐겠지? 엄마는 힘없이 웃는다. 어쩌다 거길 갔어? 나는 말한다. 그냥.
<양다솔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