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내가 <아무튼, 친구>라는 책을 출간했을 때 친구들이 물었다. “내 얘기도 썼지?” 나는 웃을 뿐 대답할 수 없었다. 작가인 친구가 친구를 주제로 책을 썼으니 그중 한 편쯤은 등장했으리라 기대하는 건 흔한 일이다. 물론 원고를 쓸 때마다 애틋한 얼굴들이 눈앞을 둥둥 떠다녔다. 언제든 전화를 걸어 맛있는 걸 먹자고 말하고 싶은 이도 줄을 섰다. 그런데 그들 중 누구도 글에 쓸 수 없었다. 씀으로써 그를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게 우리의 마지막 순간이 될 수도 있었다. 친구를 너무 사랑해 마지않아서 친구에 대해 쓰는 건데, 자칫하면 친구를 잃을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결국 나는 친구에 대해 쓰지 않으면서도 친구에 대해 써야 하는, 난해한 과제에 도전해야 했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묻겠지만 실제로 그런 일은 있었고 심지어 비일비재하다. 나 혼자만의 고민도 아니다. ‘타인에 대해 쓰기’는 이 시기 출판계에서 근래 가장 예민하게 다뤄지는 문제다. 실존 인물에 대해 작가가 사전에 동의를 구하지 않고 언급하거나, 타인이 동의하지 않는 방향으로 왜곡해 전달하거나, 더러는 실제 있었던 일들을 구성원의 동의 없이 대부분 똑같이 옮겨오는 경우에 대해 논란이 있었다. 작은 논란 정도가 아니라 책의 작품성에 상관없이 당사자가 문제 제기를 하는 즉시 책의 존폐와 직결됐다. 책은 전량폐기됐고, 작가는 긴 자숙기간을 가졌으며 다시 펜을 들지 않기도 했다. 소위 ‘사실’을 다룬다고 하는 논픽션 장르뿐 아니라 소설 분야에서도 문제가 불거졌다. 타인에 대해 쓰는 일은 작가라는 직업이 탄생한 순간부터 시작된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타인에 대해 쓰는 일은 수난기에 가깝다. 몇 년 전 처음 독립출판물을 출간했을 때 내 생각은 ‘누가 읽겠어?’였다. 독립출판물은 일반적인 출판사에서 출간해 공식적으로 서점에서 팔리는 것도 아니고, 내가 사비를 들여 만든 조악한 책자였으며, 동네 서점 몇 군데에서만 조용히 판매됐기 때문이다. 나는 일기처럼 써왔던 시시콜콜한 개인사를 책으로 엮어냈고, 그 우스꽝스러운 모양새부터 여러모로 대중의 무관심 속에 잠잠히 침잠할 거라 예상했다. 그런데 나를 떠나 제 발로 나아가기 시작한 책은 내가 전혀 예상치 못한 경로를 걷기 시작했고, 끝내 독자를 만났다. 그것도 생각보다 많은 독자를. 나는 불시에 친구로부터, 심지어 친척으로부터 전화를 받았고, 그것은 결코 유쾌한 통화가 아니었다. 그들은 수화기 너머로 외쳤다. “이 이야기를 네 책에 싣는 것을 허용할 수 없다”고. 나는 화들짝 놀랐다. 그 친구는 내 책에 등장한 적도 없었다. 내 책에 실린 이야기를 함께 ‘경험’했다는 이유로 그 사건이 나의 자극적인 글감으로 전락해 홍보(?)로 이용되는 걸 용납할 수 없다고 했다. 뒤이어 그의 부모님으로부터 욕지기로 가득한 장문의 문자를 받았다. 수년간 얼굴 한번 본 적 없고 왕래도 없는 친척은 내 책에 적힌 익명을 향한 문장 세 줄이 분명히 자신을 가리키고 있다며, 언젠가 그 문장의 주인공이 자신이라는 소문이 무성해져서 자신의 인생을 망치기라도 하면 어쩔 거냐며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겠다고 말했다. 나는 즉시 문제가 된 글들을 삭제했고, 그들의 화가 풀릴 때까지 빌어야 했다. 와중에도 머릿속은 어지러웠다. 나 모르는 사이 내 책이 교보문고에라도 깔렸나? 내가 쓴 것이 역사서 혹은 교과서가 됐나? 내가 사실만을 말하겠다고 법정 앞에서 선서라도 했던가? 나는 동네의 작은 책방 몇 군데의 책장에 겨우 꽂혀 있는 나의 비루한 책이 가진 파급력과 권력에 놀랐다. 내 책이 도대체 얼마나 유명해진다고 내 친척 관계가 파헤쳐져서, 단 세 줄의 문장으로 이루어진 익명의 사람을 찾아내 사람들이 무성한 소문을 만들어낸단 말인가. 그러니까, 어쩌면 그는 내 글에서 내가 찰스 디킨스나 셰익스피어처럼 널리 이름을 떨칠 기운을 느끼기라도 한 걸까.
특별히 누군가를 모욕할 의도 없이도, 오히려 사랑하는 마음으로 쓴 글에서도 누군가는 상처를 받았다. 친구에게 바치다시피 한 글을 쓰고 나서도 절교에 가까운 통지를 받았다. 선뜻 자신에 대해서 쓰라고 마음을 내주었던 친구도 글을 보고 나면 표정이 바뀌었다. 나 또한 그 표정을 알았다. 누군가의 글에 등장하는 것은 생각보다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나 또한 주변인들의 글에 수없이 등장했다. 글 속에서 나는 아무렇게나 납작해지고 편협해졌으며, 이상한 모습으로 왜곡됐다. 나조차 깨닫지 못했던 본질이 포착되는 장면도 아주 드물게 있긴 했다. 그런데 솔직히 글의 어디에도 진짜 나는 없었다. 그들은 나를 담아내는 데 있어 보기 좋게 실패하고 있었다. 나는 글에 대한 감흥보다는 그저 동료 창작자로서 그가 세상의 그 많은 피조물 중에 하필 나를 골라서 그 지난한 쓰기의 시간을 견뎠을 것에 대해 생각할 뿐이었다.
심지어 나는 나를 담는 일에도 계속 실패한다. 나는 눈앞에 뻔히 보이는 상황 하나도 제대로 글로 옮겨오지 못한다. 그러기에 내 문장은 허술하고 힘이 없었고, 단어는 부정확했으며, 맥락은 오해의 소지가 있었다. 오른손잡이가 왼손으로 그린 그림처럼 엉망이었다. 쓰면 쓸수록 내가 실패하고 있다는 것만 제대로 알게 될 뿐이었다. 나를 쓰는 일도 그렇게 자꾸 실패하는데 남은 어련할까. 그러니 계속 쓰려는 마음은 실패를 맞이할 수밖에 없다. 실패할 수밖에 없음을 기본 전제에 두는 것이다.
같은 농담에 웃고 방금 본 것에 대해 눈부시게 아름다운 대화를 할 친구는 있지만, 당신으로 가루를 내서 부침개를 부쳐 먹겠다고 해도 화내지 않을 친구는 손에 꼽았다. 그리고 그 친구들 또한 언젠가 나를 가루로 만들어 맛있게 부쳐 먹은 인물들이었다. 그야말로 서로 부쳐 먹는, 동등한 관계였던 거다. 타인에 대해 그 당사자의 마음에 들게 쓰기가 거의 곡예에 가깝다는 걸 우리는 쓰면서 알고 있었다. 실패하지 않은 글은 세상에 나올 수 없다는 것과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타인에 대해 쓸 수밖에 없다는 것도. 삶에 있을 수 있는 스펙터클은 늘 타인에게 있었다. 네가 없다면 대체 뭐가 있을 수 있을까. 아무리 둘러보아도, 징그럽고 잔혹하고 아름답고 경이로운 타인들을 뺀다면 쓸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러니까 나는 신간 <아무튼, 친구>에서 친구를 담는 데 실패했다. 타인이란 결코 다 이해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럼에도 나는 또 당신에 대해 쓸 수밖에 없다고, 당신이 없었으면 존재하지 않았을 실패들이라고 웃음으로써 말할 뿐이다.
<양다솔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