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스님들이 묻고 도망? ‘신라의 미소’ 출토지 무슨 일이 있었을까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2023.07.24

2008년 경북 경주공고 운동장 배수구 공사 중 출토된 명문기와. ‘흥(興)’ 자의 위 글자가 ‘왕(王)’이고, 아래 글자가 ‘륜(輪)’이라면 ‘~왕흥륜~’이 된다. 이는 “진흥왕이 신라 최초의 사찰인 흥륜사를 완성한 뒤 ‘대왕흥륜사(大王興輪寺)’라는 현판을 내렸다”는 <삼국유사> 구절을 연상시킨다. / <경주공고 유구수습조사>(학술조사보고 23책), 국립경주박물관, 2011

2008년 경북 경주공고 운동장 배수구 공사 중 출토된 명문기와. ‘흥(興)’ 자의 위 글자가 ‘왕(王)’이고, 아래 글자가 ‘륜(輪)’이라면 ‘~왕흥륜~’이 된다. 이는 “진흥왕이 신라 최초의 사찰인 흥륜사를 완성한 뒤 ‘대왕흥륜사(大王興輪寺)’라는 현판을 내렸다”는 <삼국유사> 구절을 연상시킨다. / <경주공고 유구수습조사>(학술조사보고 23책), 국립경주박물관, 2011

“절과 절들은 별처럼 벌여 있고, 탑과 탑들은 기러기 행렬인 양 늘어섰다(寺寺星張塔塔?行).”

신라 불교의 위용을 표현할 때 흔히 이 <삼국유사> ‘원종흥법 염촉멸신’조의 멋들어진 구절을 인용합니다.

그렇게 ‘별처럼, 기러기처럼’ 늘어선 사찰 가운데서도 손꼽히는 ‘빅3’가 있죠. 흥륜사(527~544)와 영묘사(535), 황룡사(553~569) 등입니다. 그중에는 황룡사가 대중적으로 가장 유명하죠. 높이 80m가 넘는 9층 목탑터가 절터와 함께 남아 있으니 보는 이마다 상상의 나래를 펼 수가 있습니다.

왕까지 출가한 흥륜사

그러나 흥륜사와 영묘사 역시 둘째, 셋째 가라면 섭섭하죠. 먼저 흥륜사는 신라에서 가장 먼저 창건된 사찰입니다.

특히 이차돈(506~527)의 순교(527)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따르면 법흥왕은 527년 첫 번째 사찰인 흥륜사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대소신료가 벌떼처럼 일어났고요. 왕의 최측근인 이차돈이 수습을 위해 순교를 자처했습니다. 이윽고 이차돈의 목을 베자 우윳빛 피가 흘렀고, 그제야 모든 반대가 사그라들었죠.

법흥왕 때 짓기 시작한 흥륜사는 544년(진흥왕 5) 최종 완성돼 낙성식을 여는데요.

신라 최초의 사찰인 흥륜사의 원위치로 새롭게 추정되고 있는 경북 경주공고 자리. 1965년 이후 사찰의 흔적이 계속 확인됐고, 급기야 2008년에는 ‘흥륜사’임을 짐작게 하는 명문기와가 나왔다. /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신라 최초의 사찰인 흥륜사의 원위치로 새롭게 추정되고 있는 경북 경주공고 자리. 1965년 이후 사찰의 흔적이 계속 확인됐고, 급기야 2008년에는 ‘흥륜사’임을 짐작게 하는 명문기와가 나왔다. /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대를 이어 절을 완성한 진흥왕은 ‘대왕 흥륜사’라는 현판을 내렸습니다. “말년에 출가한 진흥왕(혹은 법흥왕)이 법운(혹은 법공)이라는 법명으로 흥륜사의 주지가 됐다”(<삼국사기>, <삼국유사>)는 기사가 눈에 띄네요.

<삼국유사> ‘흥륜사 금당십성’조는 “흥륜사 금당에 10명의 불교 성인을 진흙으로 빚은 상을 모셨다”면서 “동벽에는 아도·염촉·혜숙·안함·의상을, 서벽에 표훈·사파·원효·혜공·자장 등을 배치했다”고 했어요.

흥륜사 하면 떠오르는 유명한 설화가 한 편 있죠. <삼국유사> ‘김현 감호’조입니다.

신라에서는 해마다 2월 서라벌의 남녀가 대거 흥륜사로 몰려와 펼치는 탑돌이 행사가 장관을 이뤘는데요.

원성왕(재위 785~798) 연간에 흥륜사 탑을 돌던 김현과 어느 처녀가 눈이 맞아 으슥한 곳에서 사랑을 나눈 뒤 부부의 연을 맺습니다. 이 처녀가 실은 호랑이였고요. 이야기는 처녀(호랑이)의 희생으로 남편인 김현을 벼슬길로 올리는 것으로 끝납니다.

1916년 경주에 대서소를 차려놓고 취미로 신라 사찰을 답사했던 모로가 히데오는 사정동 일대에서 우연히 발견된 절터 유구를 두고 ‘흥륜사터’로 특정했다. 당시 경주 주민들이 이 일대를 ‘흥륜들’이나 ‘흥륜원’이니 하고 부른다는 이유로 ‘흥륜사터’라 한 것이다. / 함순섭 국립경주박물관장 제공

1916년 경주에 대서소를 차려놓고 취미로 신라 사찰을 답사했던 모로가 히데오는 사정동 일대에서 우연히 발견된 절터 유구를 두고 ‘흥륜사터’로 특정했다. 당시 경주 주민들이 이 일대를 ‘흥륜들’이나 ‘흥륜원’이니 하고 부른다는 이유로 ‘흥륜사터’라 한 것이다. / 함순섭 국립경주박물관장 제공

선덕여왕의 ‘지기삼사’ 사찰 

선덕여왕 4년에 창건한 영묘사는 어떨까요. 선덕여왕의 ‘지기삼사(知幾三事·세 가지 신비로운 예측)’로 유명한 절이죠. 즉 ‘지기삼사’ 중 하나가 영묘사의 옥문지에 겨울인데도 개구리가 우는 것을 보고 절 인근 여근곡에 백제군이 매복한 사실을 알아내 전멸시킨 ‘신묘한 사건’이죠(<삼국유사>).

이런 설화도 있어요. 진지왕 연간(재위 576~579)에 흥륜사의 진자스님이 ‘미륵선화(화랑으로 거듭난 미륵)’을 찾아 전국을 헤맸는데요. 등잔 밑이 어두웠습니다. 진자스님이 영묘사 인근 나무 밑에서 뛰놀고 있던 소년(미시랑)을 보고 ‘미륵선화’임을 단박에 알아차렸답니다. 진자스님은 미시랑을 모시고 궁으로 돌아갔고요. 임금(진지왕)은 미시랑을 국선(화랑의 우두머리)으로 모셨습니다(<삼국유사> ‘미륵선화·미시랑·진자스님’조). 그렇다면 영묘사는 화랑들의 추모 공간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영묘사가 배출한 인물 중에는 신라 최고의 조각가인 양지스님(생몰년 미상)이 있습니다. <삼국유사>는 “양지가 영묘사 삼육삼존상 등을 제작할 때 백성이 앞다퉈 진흙을 날랐다”(‘의해·양지사석’조)고 소개했습니다.

‘신라의 미소’ 수막새는 흥륜사 제작품?

이렇게 흥륜사와 영묘사는 숱한 이야깃거리를 갖고 있는 신라의 대표적인 사찰입니다.

그러나 그나마 ‘터’는 남아 있는 황룡사와 달리 두 사찰의 원위치를 두고 혼란만 야기됐는데요.

사실 일제강점기에 흥륜사의 원위치를 멋대로 특정한 인물이 있었습니다. 경주에 대서소를 차려놓고 취미로 신라 문화재를 연구했다는 모로가 히데오(諸鹿央雄 1882~1954)였는데요. 이 자가 당시 경주 사정동 일대에서 발견된 절터의 흔적을 두고 ‘흥륜사터’로 특정했습니다. 주민들이 이 일대를 ‘흥륜들’이나 ‘흥륜원’이니 하고 부른다는 단순한 이유였죠.

이런 ‘선무당 사람 잡기’가 엄청난 나비효과를 일으켰습니다.

일본학자들은 물론이고, 해방 이후에도 진홍섭(1918~2010)·황수영(1918~2011) 등 국내 학자들까지 아무 의심 없이 ‘흥륜사터’로 해석했습니다. 심지어 모로가가 지목한 그곳을 ‘사적=흥륜사터’로 지정했습니다(1963).

그러다 보니 ‘신라의 미소’로 유명한 ‘얼굴무늬 수막새’ 출토지를 둘러싸고도 혼선이 빚어집니다.

‘얼굴무늬 수막새’는 1934년 경주에 거주하던 의사(다나카 도시노부·田中敏信)가 골동품상에서 구입한 것인데요.

그런데 조선총독부 박물관 경주분관장이던 오사카 긴타로(大坂金太郞)가 ‘수막새 출토지=사정리 흥륜사터’로 전하면서 “조사해보니 확실하다”고 못 박았습니다.

‘영묘사’ ‘~왕흥륜~’ 명문의 비밀 

하지만 심상찮은 발굴 결과가 잇따르기 시작했습니다.

1976년부터 기존의 ‘사정동=사적 흥륜사터’ 일대에서 잇달아 수상한 명문기와가 확인됐습니다.

‘영묘지사(靈廟之寺)’ 또는 ‘대영명사조와(大令妙寺造瓦)’ 등 ‘영묘사’명 기와들이 수습된 겁니다.

모로가 이후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던 ‘흥륜사터가 사실은 영묘사터’라는 거죠.

그렇다면 ‘얼굴무늬 수막새’ 또한 영묘사에서 출토된 것이라는 얘기가 되죠.

그럼 진짜 흥륜사터는 어디라는 말입니까. 사실 1965년부터 심상찮은 조짐은 있었습니다.

여기서 800m쯤 떨어진 경주공고 내에서 절터 유구와 유물들이 계속 출토되고 있었는데요. 그러던 2008년 운동장 배수구 설치를 위한 발굴조사 결과, 결정적인 명문기와편이 확인됩니다.

최근 발굴 및 연구성과에 따르면 신라 최초의 사찰은 경주공고 자리로, 영묘사는 지금까지 흥륜사로 알려졌던 자리로 수정돼야 한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최근 발굴 및 연구성과에 따르면 신라 최초의 사찰은 경주공고 자리로, 영묘사는 지금까지 흥륜사로 알려졌던 자리로 수정돼야 한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기와 뒷면에 세로로 ‘~왕(王)’ 자와 ‘흥(興)~’가 새겨져 있었는데요. ‘흥(興)’ 자의 윗부분은 ‘ㅗ’ 형태로 남아 있었습니다. 이게 ‘왕(王)’ 자의 획으로 보였습니다. 또 ‘흥’ 자의 아랫부분엔 ‘십(十)’ 자와 같은 획이 보이는데요. ‘륜(輪)’ 자의 ‘차(車)’ 변의 위쪽 획일 가능성이 큽니다. ‘흥(興)’ 자의 위 글자가 ‘왕(王)’이고, 아래 글자가 ‘륜(輪)’이라면 ‘~왕흥륜~’이 되는데요.

왜 <삼국유사>에 “진흥왕이 (왕위에 오르니)…‘대왕흥륜사(大王興輪寺)’라는 현판을 내렸다”(‘원종흥법 염촉멸신’조)는 구절이 있죠. 만약 ‘~왕흥륜~’이 맞다면 <삼국유사>의 ‘대왕흥륜사’ 구절과 부합됩니다.

그렇지 않아도 <삼국유사> ‘기이 미추왕 죽엽군’조에는 “미추왕릉이 흥륜사 동쪽에 있다”고 기록했습니다.

흥륜사가 미추왕릉의 서쪽에 있었다는 얘기죠. <신증동국여지승람> ‘고적’조는 “흥륜사가 경주부 남쪽 2리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조선시대 경주 읍성 내의 객사와 현재 경주공고의 실제거리는 1.2㎞인데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2리(약 1.3㎞)’와 비슷합니다. 그렇다면 ‘영묘사’는 어떨까요. <삼국유사> ‘흥법제상 아도기라’조는 “영묘사는 ‘사천의 꼬리 쪽(沙川尾)’에 있다”고 했습니다. ‘사천’은 오늘날의 경주 ‘남천’을 가리키는데요. 그렇다면 ‘사천미(沙川尾)’라는 표현은 ‘남천의 끝자락’이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고려시대 공양구의 정체

요즘은 ‘선무당’ 모로가가 ‘흥륜사터’로 특정해 사적지정까지 된 절터를 ‘영묘사터’로 고쳐 보는 견해가 지배적입니다. 따라서 ‘얼굴무늬 수막새의 출토지=영묘사터’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흥륜사터는 경주공고 자리에 있었다는 거고요.

며칠 전 공식명칭이 ‘사적 흥륜사터’인 지역 서쪽에서 또 한 차례 의미심장한 유구와 유물이 확인됐습니다.

그중 ‘영묘사(靈廟寺)’ 글자가 찍힌 명문기와가 출토됐습니다. 이 정도가 됐으니 이젠 ‘사적 흥륜사터’가 아니라 ‘사적 영묘사터’로 이름을 바꿀 시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이번 발굴에서 통일신라~고려시대 사찰 관련 유구와 유물이 대거 출토됐는데요.

그중 11세기 청동공양구와 의식구 등을 한가득 넣은 철솥이 특히 눈길을 끌었습니다. 솥 안에는 향로와 향완(향 그릇), 촛대 등의 청동공양구와 금강저 같은 청동의식구, 청동그릇 등 육안으로 확인되는 유물만 54점 정도 나왔습니다.

기존의 ‘사적=흥륜사터’에서 잇달아 확인되고 있는 ‘영묘사’명 기와 /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기존의 ‘사적=흥륜사터’에서 잇달아 확인되고 있는 ‘영묘사’명 기와 /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문화재청이 낸 보도자료는 이 출토물의 성격을 일단 ‘퇴장(退藏)유물’로 추정했습니다.

화재나 사고 등의 비상 상황을 맞아 급히 한곳에 모아 묻어둔 유물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몽골군의 침략이 급히 소환됐습니다. 몽골군이 13세기 경주 일대까지 들어와 황룡사와 9층 목탑을 불태웠죠. 그때 영묘사의 스님들이 이런 물품 일체를 땅에 묻고 떠난 게 아니냐는 추정이 나온 겁니다.

과연 스님들은 “나 살려라” 도망갔을까 

그러나 ‘퇴장유물’로 추정하는 것 자체가 위험하다는 견해도 만만치 않습니다.

일각에서 이런 말이 나오더라고요. <마하승기율>(스님이 지켜야 할 계율을 정한 경전)은 “도적이 물건을 요구하거나 훔치러 올 때는 감추지 말고 내주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스님들이 위기에 빠진 사찰을 두고 나 몰라라 하고 도망간다? 그것도 온갖 귀중품은 땅에 묻고? 자칫 스님들을 매도하는 해석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문화재청이 ‘퇴장유물’의 사례로 거론한 10곳의 유적을 볼까요. ‘퇴장유물’보다는 건물을 지을 때 땅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지진구’로 볼 수 있고요. 건물 기단을 쌓을 때 액막이를 위해 물품을 공양하는 ‘진단구’로도 해석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중 ‘영국사터’(서울 도봉서원) 발굴 사례가 대표적인데요. 2012년 절의 건물터 기단에서 청동유물 77점이 일괄 출토됐습니다. 특히 청동유물을 일괄 매납할 때 따로 구덩이를 판 흔적이 없었습니다. 영국사의 건물 기단을 조성할 때 일종의 진단의식을 펼친 뒤 청동 용품을 고이 모셔둔 증거일 수 있답니다.

건물의 모서리에 구덩이를 파고 솥과 같은 대형 용기 안팎에 금속유물을 넣고 묻는 경우도 있습니다.

경남 창녕 말흘리 유적을 볼까요. 2003년 건물터 모서리에서 금속유물 500여 점을 겹겹이 채운 쇠솥이 발견됐는데요.

유물은 불전 장엄구나 의식구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두 사례 외에도 ‘퇴장유물’ 보다는 ‘의례용 유물’로 파악해야 하는 유적이 많다는 견해가 주목을 끕니다.

이번에 출토된 각종 불교공양구. 향로와 향완(향 그릇), 촛대 등의 청동공양구와 금강저 같은 청동의식구, 청동소완(반찬그릇) 등이 솥 안에 가득 차 있었다. 문화재청은 전란 등 급박한 상황에서 사찰 승려들이 숨겨놓고 피란한 이른바 ‘퇴장유물’로 추정했다. / 춘추문화재연구원 제공

이번에 출토된 각종 불교공양구. 향로와 향완(향 그릇), 촛대 등의 청동공양구와 금강저 같은 청동의식구, 청동소완(반찬그릇) 등이 솥 안에 가득 차 있었다. 문화재청은 전란 등 급박한 상황에서 사찰 승려들이 숨겨놓고 피란한 이른바 ‘퇴장유물’로 추정했다. / 춘추문화재연구원 제공

이와 관련해서 인용되는 경전이 <불설다라니집경>입니다. 7세기(654) 번역된 이 경전의 12권에는 ‘제단의 건립’에 쓰이는 공양물의 목록과 납입수량이 표기돼 있습니다. 그중 병·접시·쟁반·국자·향로·금은그릇 등 금속용기 11종(879건)와 금동령대, 오색납촉, 등잔, 금·동향로보자, 거울 등 금속장엄구 9종(1131건)의 목록이 작성돼 있습니다. 이외에도 갖가지 식물과 향, 오곡, 여러 선신에게 바칠 꿀과 기름, 떡 등 음식까지 포함돼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국내유적에서 확인된 유물을 이 경전(<불설다라니집경>)이 권장하는 납입목록과 비교해볼까요.

마침 최태선 중앙승가대 교수가 정리해놓은 논문이 있네요. 말흘리의 경우는 깃대(幡)와 허리띠장식(?) 등에 해당하는 금동제품류가 충실하게 매납됐고요. 영국사터와 청주 사뇌사터의 경우도 부족한 수량이지만 목록에 있는 물품을 넣어 두었습니다. 그 외 유적의 출토유물도 기단 조성을 위한 의례용 용기 및 장엄류 등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번 영묘사터에서 확인된 고려시대의 솥에서 출토된 유물도 그렇습니다. 최태선 교수는 “이들 유물도 <불설다라니집경>에 나와 있는 ‘작단의식’(기단 조성 때 지낸 진단 의식) 때 납입한 물목에 포함돼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제가 봐도 전란을 맞아 스님들이 허겁지겁 각종 귀중품을 묻고 자리를 피했다고 섣불리 추정할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물론 이제 유물을 수습한 것에 불과합니다. 발굴 유물이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로 급히 이관됐다죠.

문화재청 보도자료가 언급했듯, 앞으로 정확한 성격 파악과 면밀한 분석이 뒤따라야 할 것 같아요.

일제강점기에 영묘사터를 흥륜사터로 잘못 특정하는 바람에 100년 넘게 정력을 소모한 전철을 다시 밟지는 말아야겠죠.

<참고자료>
최태선, ‘불설장엄도량급공양구지료도법의 보구와 고고학적 매납사례’, <불지광조>, 정인스님 정년퇴임기념논총 간행위원회, 2017
국립경주박물관, <경주공고 유구수습조사>(학술조사보고 23책), 2011
박홍국, ‘와전자료를 통한 영묘사지와 흥륜사지와 위치 비정’, <신라문화> 20호, 동국대 신라문화연구소, 2002
이근직, ‘신라 흥륜사 위치 관련 기사 검토’, <신라문화> 20호, 동국대 신라문화연구소, 2002
춘추문화연구원, ‘경주 흥륜사 서편(사정동 292-1번지 일원) 하수관로 설치공사 유적 매장문화재 발굴조사 자료, 2023
허형욱,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얼굴무늬수막새의 발견과 수증 경위’, <신라문물연구> 8, 국립경주박물관, 2015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Ikh074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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