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목욕 일지

양다솔 작가
2023.07.17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온탕에 발을 담그고 있는데 탕 저편에 있던 아주머니가 손을 번쩍 들며 외친다. “유진씨! 나 얼음 맥주 하나만!” 그러자 저 멀리 탕 입구로 들어오던 한 사람이 “얼음 맥주요?”라고 소리쳐 되묻는다. 아줌마는 다시 “나 오늘 다리가 아파서!”라고 외친다. 그들의 목소리가 목욕탕의 천장을 따라 둥글게 메아리친다. 다른 누군가가 탕으로 들어온다. 아줌마는 어김없이 소리친다. “수진씨 어디 갔다가 이제 와, 나 얼음 맥주 부탁하려고 기다렸는데.” 수진씨로 추정되는 분은 하하 웃으며 온탕에 입수해 가장자리에 자리를 잡더니 아줌마와 대화를 이어간다. 동시에 휴대전화를 꺼내 게임을 하기 시작한다. 개인적으로 목욕탕 안에 휴대전화를 갖고 들어오지 않는 것이 상식이라고 생각하지만, 이 목욕탕에서는 휴대전화를 가져온 사람을 수없이 보았기 때문에 가만히 있기로 한다. 이것은 목욕탕의 규칙보다 아줌마들의 기가 더 드센 경우로, 잘못 개입했다가는 힘 싸움에 휘말려 화를 입을 수 있다.

하지만 만약 이 상황에 우리 엄마가 있었다면 예외다. 얼마 전에 엄마와 이 목욕탕에 함께 왔을 때 엄마는 휴대전화를 들고 있는 중년 여자를 보자마자 이렇게 말했다. “여탕에 휴대폰을 들고 들어오면 안 되지요. 당장 들고 나가주세요.” 그 결연한 말투에 내 몸까지 꼿꼿해지는 것 같았다. 마치 선생님과 유치원생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누구나 혼내주는 사람이 필요한 법이다. 생각해보면 그것은 매우 귀한 일이다. 휴대전화를 들고 있던 여자는 얼떨떨해하며 무슨 말인가 대꾸를 하려다가 이내 쭈뼛거리며 탕을 빠져나갔다. 웬만한 아줌마들은 척 봐도 우리 엄마와 대적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바로 알았다. 그것은 동물의 직감 같은 거였다. 나는 엄마만큼 멋지지 못했다. 또 목욕탕에서 손이 빈다는 것의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는 것은 나도 마찬가지여서 나는 온탕에서 무려 책을 읽고 있었다.

목욕탕에서 책을 읽는 사람을 나는 본 적이 없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이유로 나는 시선을 한몸에 받는다. 같은 이유로 나는 앞서 언급한 아줌마의 뜨거운 시선을 받고 있었다. 책은 다시 한 번 나를 구원했다. 지루함과 아줌마로부터. 나는 말 없이 시선을 고정하며 더욱 책 속으로 빠져들었다. 내 손에 책이 들려 있지 않았더라면 내가 얼음 맥주를 사왔어야 했을지도 몰랐다.

생각보다 목욕탕은 책을 읽기에 적격인 곳으로, 나는 가끔 오롯이 책을 읽기 위해 목욕탕을 방문하게 되기도 했다. 목욕탕에서 보기 좋은 책의 기준은 두 가지다. 재밌는데 집중이 조금 어려울 것, 최대한 물에 덜 민감할 것. 그래서 조금 두께가 있으면서도 만듦새가 튼튼한 양장본이 적합하다. 가만히 있어도 술술 읽히는 글보다는 언뜻 몰입하기 어려운 내용이 탕 안에서의 시간을 더욱 즐겁게 만들어준다. 일반적인 목욕탕에서는 보통 두 개의 수건을 제공한다. 과감하게 그중 하나를 젖은 머리를 감싸는 것에 쓰는 것이 좋다. 머리카락에서 떨어지는 물방울도 막고, 책장을 넘기는 집게손가락이 젖었을 때 물기를 닦을 수도 있다. 책갈피는 탕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빼서 책 표지 쪽에 끼워 보관한다. 물론 그럼에도 목욕탕에 가져오는 빈도에 맞춰 책은 점차 구불구불해지지만, 그것은 그 책을 애정했다는 표식으로 삼는다.

다음 페이지를 넘기고 있는데, 드디어 얼음 맥주를 든 유진씨가 나타난다. 아줌마 얼굴에 화색이 돈다. “일어나 움직이기도 힘드네. 이게 나이를 먹는다는 건가 봐.” 그 목소리가 너무 커서 나도 모르게 시선을 돌리게 됐다. 마치 폭탄이 터진 곳으로 시선이 가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아까부터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그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말을 걸었다. “어머, 미안해요. 내가 집중을 흐렸나.” 나는 당황스러운 기색을 숨기며 빠르게 답했다. “아닙니다.” “아유, 이래도 집중되겠어요? 대단하네.” 나는 몇 번 짧게 네, 라고 대답하고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 목욕탕에서 다솔씨가 돼서는 안 됐다. 나는 책을 덮고 마지막으로 읽었던 문장을 곱씹으며 냉탕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어떤 아주머니가 혼자 고개를 박고 열심히 수영을 하고 있었다. 연신 물장구를 치고, 허리를 마구 꿈틀거려서 냉탕 안은 쉴 새 없이 물기둥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거의 물방울 페스티벌이 열리고 있었다. 그곳에 몸을 담그면 즉시 그 엄청난 물살에 휩쓸리게 될 것이 뻔했다.

개인적으로 냉탕에서 수영하는 모든 분을 싫어한다. 온도에 차이는 없어도 움직임이 만드는 그 파장이 냉탕을 더욱 차갑게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시끄럽고, 물이 튀는 것도 물론 달갑지 않다. 그러나 역시 냉탕에서 혹은 심지어 온탕에서도 수영하는 아주머니는 정말 자주 찾아볼 수 있기 때문에, 하물며 목욕탕 바닥을 통째로 점거하고 대자로 누워서 오이 팩을 하는 아주머니들도 흔하게 찾아볼 수 있기 때문에 나는 내 세대가 마지막으로 목격하는 전유물이라고 생각하며 그것을 경험하기로 했다. 나중에 내 손자에게 그때도 목욕탕이 있다면 옛날에 여기서 수영하는 아주머니도 있었다, 여기서 다 드러내고 누워 팩하는 할머니도 있었다, 말해줄 요량이었다. 더군다나 아주머니는 아침 수영을 열심히 다니고 있을 수도 있고 오늘 아침에 배웠던 동작을 복습하고 싶어 열심인 것일 수도 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문제이기도 했다. 어쨌든 나는 온몸이 팔팔 끓고 있었기 때문에 냉탕에 들어가야 했고, 탕은 기분 좋게 시원했으므로 벌써 다른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런데 코를 박고 열심히 출렁임을 만들던 아주머니가 이상한 낌새를 챈 듯이 동작을 멈췄다. 탕 안에 다른 사람, 그러니까 내가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 것이다.

그는 명백히 ‘아까까지는 없었는데?’ 하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혹여 그가 창피함을 느낄까 봐 시선을 얌전히 바닥에 떨구었다. 그때였다. 그가 대뜸 뭐라고 소리쳤다. 처음엔 나에게 하는 말이라고 생각지 않아서 그냥 두었는데, 곧이어 그가 다시 한 번 소리쳤다. 눈이 잘 보이지 않는 나는 갖은 인상을 쓰며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검지로 스스로를 가리키며 외치고 있었다. “나, 방 빼?” 몇 초간 정적이 흘렀다. 곧이어 나는 손사래를 치며 연신 아니라고 말했다. 그는 말했다. “나, 방 뺄 게. 편하게 있어.” 그러고는 역시 거센 물살을 일으키며 유유히 탕을 떠났다. 그가 떠남과 동시에 탕이 고요해졌다. 역시 목욕탕은 심심할 일이 없는 곳이다.

<양다솔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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