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흘렀지만, 그 빛은 사라지지 않았다. 73년 만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비록 그 옛날의 반짝임은 사라졌지만, 흙도 아니고 ‘뼈’도 아닌 빛깔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은반지. 어느 집 여인이었을까. 상류층 집안 아니었을까. 어쩌다 이곳까지 와서 땅속에 묻혔을까. 은반지가 끼워져 있던 손가락은 이미 뼈까지 썩어 사라졌다. 남아 있는 은반지의 주인은, 사라진 손가락의 주인은 누구였을까. 대답할 리 없는 질문을 마음으로 던져본다.
충남 서산시 갈산동 176-4번지, 봉화산 교통호 현장.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는 지난 5월 10일부터 약 20일간 이곳에서 유해발굴 조사를 진행했다.
1950년 한국전쟁 중 인민군 점령기에 인민군이 전투를 대비해 파놓은 교통호. 하지만 군·경이 서산 지역을 수복한 뒤, ‘부역혐의자’로 지목된 민간인들이 이곳에서 학살됐다.
“모퉁이에 호(교통호)를 파논 데가 있어요. 신작로서 끌고 올라가 하나 갖다 놓고 ‘팡’ 하고 총 쏘고 또 하나 놓고 ‘팡’ 하고 총 쏘고 몇 번을 그랬어요. 경찰들이 쐈지요. (중략) 처음에 ‘뜨르르르’ 갈기고, 도망간 사람이 있으니께 나중에 하나씩 세밀하게 죽이더구만요.”(참고인 이○○ 진실화해위원회 진술, 이하 <서산 8228; 태안 부역혐의 희생 사건 조사보고서> 2008. 인용)
현장에서 발굴된 유해의 모습은 당시의 ‘생지옥’을 떠올리게 했다. 폭과 깊이가 1m도 안 되는 좁은 교통호를 따라 유해가 빽빽하게 발견됐다. 오랜 시간이 흘러 작은 뼈들은 썩어 없어졌지만, 굵은 다리뼈뿐만 아니라 척추뼈와 갈비뼈까지 남아 있는 상태였다.
희생자들은 주로 옆으로 눕거나 고꾸라져 있었다. 학살 당시 희생자들을 고개 숙이게 한 뒤, 총으로 머리 뒤를 쐈으리라 추정된다. 일부 구역에서는 유해 다리 사이에 다른 유해가 또 발견돼 과거 시신이 위아래로 겹겹이 쌓여 있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이번에 발굴된 유해는 약 60구. 유해뿐만 아니라 총살의 흔적인 탄피와 단추, 고무줄 그리고 ‘은반지’도 발견됐다. 이것들은 죽은 자와 죽인 자를 밝히는 중요한 증거다.
“(경찰이) ‘고개 다 땅에 대라’고 하더만. (중략) 요기다가(손가락으로 뒤통수를 가리키며) 그러니까 짹소리 못하지. ‘퍽’ 하면 그만이여. 한 명씩, 한 명씩 해야지. M1…. 아이! (머리가) 없어요. 그 양반 나중에 시체 찾아가라고 해서 도장집 보고 찾았어. (머리가) 아주 쫙 뻐그러졌어. 아주 윷가락처럼. 피 한 모금도 없어.”(당시 면 치안대원 최○○ 진실화해위원회 진술)
이들을 끔찍한 죽음으로 몰고 간 ‘부역혐의’란 대체 뭐였을까. 말 그대로 하면 인민군이 지역을 점령했을 때 인민군과 내통해 도운 혐의라는 뜻. 그런데 그 실체가 참 허망했다.
인민군에게 밥 한번 해줬다고, 사랑방 한번 내줬다고 부역혐의자가 되기도 했다. 이웃사람 부탁으로 뭔지 모를 서류에 도장 한번 찍어줬다가 좌익 명단에 이름이 오르기도 하고, 그냥 어느 집안과 사이가 나빠서 일가가 모두 ‘빨갱이’로 몰리기도 했다.
“흑백을 분류하려니까(실제 부역행위자와 아닌 자를 구분한다는 뜻-필자 주) 함장이 오더니 ‘지금 무엇을 하는 거지?’ 내가 ‘흑백을 대별하려고 합니다’ 하니까. ‘흑백? 흑백 같은 소리 하고 앉아 있네. 전부 일어서’ 하면서 다 끌고 나가는 겨. (…) 조금 지나니까 ‘탕탕’ 소리가 나더라고.”(당시 면 치안대장 최○○ 진실화해위원회 진술)
부역혐의자에 대한 학살은 어느 날 갑자기 터져나온 사건이 아니었다. 하나의 죽음이 또 하나의 죽음을 낳고, 그 죽음이 결국 참혹한 학살로 이어지는 ‘증오의 고리’가 존재했다.
전쟁 초기인 1950년 7월 12일, 서산 지역 경찰들은 인민군에 밀려 후퇴하면서 보도연맹원들을 집단 살해했다. 그들이 향후 인민군에 협조할 가능성이 있다고 본 것이다. 7월 18일 인민군이 서산을 점령하자, 이번에는 좌익세력에 의한 학살이 일어났다. 하지만 전세가 또 뒤집어져 10월 8일 군·경이 서산을 수복하자, 부역혐의자에 대한 학살이 일어난 것이다.
전쟁 발발 직후의 보도연맹 학살과 인민군 점령기 좌익세력에 의한 학살을 거치면서 주민들 사이에 갈등과 반목은 크게 쌓여갔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다시 저쪽에서 이쪽으로 학살이 반복되면서 ‘보복성’이 더 강해졌다. 이런 성격은 수복 이후 경찰의 부역자 처리 과정에 그대로 반영됐고, 부역과 관계없는 불특정 다수의 민간인이 희생되는 원인이 됐다.
“좌익들 잡아다가 면사무소 창고에 가득가득 잡아다 놓았지. (중략) (경찰) 지서 직원이나 근흥면 유지들을 앞에 놓고서 내가 ‘이 사람은 어떻게 할 거냐? 이렇게(손가락으로 총을 쏘는 모양을 하면서) 할 것이냐, 아니면 석방을 할 것이냐?’라고 하면 (지서 경찰과 유지들이) ‘이렇게 하자’라고 (후략).”(참고인 최○○ 진실화해위원회 진술)
‘빨갱이’라 믿으면 ‘빨갱이’가 됐다. ‘손가락총’ 한 번으로 살고 죽는 것이 갈라졌다.
학살 현장은 이번에 유해발굴이 이뤄진 봉화산 교통호 등 최소 30여 곳. 2008년 진실화해위원회는 희생자 977명과 희생추정자를 포함한 1865명의 신원을 확인했다. 기록에 누락된 다수 희생자가 있기 때문에 실제 희생자는 2000명을 웃돌 것으로 진실화해위원회는 추정했다.
73년 만에 지상으로 나온 은반지의 주인 역시 그중 하나일 것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질문할지도 모르겠다. 주인이 누군지도 모르는 그깟 반지 하나 꺼낸 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왜 거기에 아까운 국민의 세금을 써야 하냐고.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대신해준 이가 있다.
“발밑에 그분들(희생자들)을 두고, 대한민국이 선진국이 됐다고 자랑하고 있잖아요. 그분들을 밟고 선 대한민국이 과연 자랑스럽나요? 저는 별로 자랑스럽지 않아요. 그런 비극들을 억지로 지워버리고 없는 척했기 때문에 70년이 지난 지금까지 소위 ‘빨갱이’ 담론이 망령처럼 우리를 괴롭히고 있잖아요.”(진실화해위원회 소식지 ‘진실화해’ 4호, 2021. 12)
다큐멘터리 영화 <206: 사라지지 않는>(2023. 6. 21 개봉)을 만든 허철녕 감독의 말이다. 시민들의 힘으로 이끌어온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의 발걸음을 기록한 영화다.
세월이 흘렀지만, 반지의 은빛은 사라지지 않았다. 땅속에 잠들어 있던 진실 역시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그들을 ‘지워버리고 없는 척’하고 싶었던 부끄러운 우리가 있을 뿐.
<최규화 전 진실화해위원회 언론홍보팀 주무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