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석부’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출석부를 본 경찰과 검찰도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모른 체했다. 그들이 원한 건 진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임무는 오직 ‘간첩교사’를 만들어내는 일이었을 뿐. 그렇게, 강성호에게 32년간의 악몽이 시작됐다.
1989년 5월 24일, 스물일곱 살 햇병아리 일본어 교사 강성호는 그날도 교실에서 수업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를 찾는 사람이 있으니 “교무실로 와보라”는 전갈이 왔다. 교무실에는 덩치 좋은 남자 2명이 교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의 정체는 대공과 형사들이었다.
그들은 강성호에게 경찰서로 같이 가자고 말했다. 놀란 강성호를 “학생 일 때문에 그렇다. 잠깐이면 된다”고 안심시켰다. 강성호가 수업 중이라 못 간다고 하자, 교장 허락도 다 받아뒀다고 못을 박았다. 강성호는 꿈에도 몰랐다. 그를 고발한 장본인이 바로 교장이라는 사실을.
교문 앞에는 검은 지프 한 대가 서 있었다. 선생님이 수상한(?) 차에 타는 모습을 학생들은 웅성대며 지켜봤다. 차에 오르자마자 강성호의 손목에는 수갑이 채워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선생님, 선생님” 하던 경찰들의 입에서는 “이 새끼” 하는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들의 눈에 강성호는 더 이상 교사가 아니었다. 국가보안법 피의자, ‘빨갱이’가 됐다.
그에게 씌워진 혐의는 수업시간에 북한 찬양 발언을 했다는 것. 특히 ‘6·25 때 남한이 먼저 북한을 침략했다’, 즉 북침설을 주장했다는 것이었다. 다음 날 신문에는 ‘좌경 의식화 교사’라는 수식과 함께 강성호의 얼굴이 실렸고, 교육청은 즉각 그에 대한 징계에 나섰다.
경찰은 북한 찬양 발언을 들었다는 일부 학생의 증언을 증거로 내세웠다. 1심 법원은 그해 10월, 강성호에게 징역 1년을 선고했다. 1990년 1월 2심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 자격정지 1년을 받고 석방됐지만, 같은 해 6월 대법원은 최종 유죄 판결을 확정했다.
이런 일은 그에게만 일어난 게 아니었다. 강성호 사건은 ‘거대한 탄압’의 신호탄이었다.
1980년 중반부터 본격화된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결성 움직임은 1989년 현실화를 눈앞에 두게 됐다. 노태우 정권은 이들을 ‘의식화 교사’로 규정하고, 엄정 대응을 천명했다.
노태우 대통령은 1989년 1월 12일 “일부 급진 성향의 교사들은 초·중·고교 학생들의 의식화까지 기도하고 있다”면서 “이들에 대해서는 철저한 조치와 함께 특별지도대책을 강구하라”고 지시했다. 그해 4월 25일에도 중·고교생에 대한 ‘의식화 활동’이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긴박한 실상”이라며, 사례가 발견되는 경우 교단에서 물러나게 하라고 지시했다.
지시는 곧 구체화됐다. 5월 14일 문교부는 노조 결성 주도 교사에 대해 형사처벌 방침과 함께 중징계 계획을 발표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정권에게는 ‘전교조 교사=좌경 의식화 교사’라는 등식을 증명하기 위한 결정적인 ‘한 방’이 필요했다. 사학재단의 비리를 폭로하고, 교사협의회에 가입하는 등 전교조 결성 운동에 참여해온 강성호가 그 표적이 된 것이다.
정권의 바람과 달리, 1989년 5월 28일 전교조 결성대회는 강행됐다. 간부들에 대한 사전구속영장 발부, 직위해제 등 징계 조치, 결성대회 불허 방침에도 불구하고 대회 개최를 막을 수는 없었다. 5월 27일부터 28일 사이 연행된 교사의 숫자는 1082명에 달했다. 이후 6월 내내 개최된 전교조 지부 및 지회 결성식에서도 대규모 연행 사태가 속출했다.
교육 당국은 “전교조에 가입한 교사는 모두 중징계에 처하되, 탈퇴 교사는 일체 불문에 부치라”고 지시하며 징계와 회유에 나섰다. 1989년 7월 당시에만 전교조 활동과 관련해 처벌·징계 등을 받은 교사가 구속 41명, 중징계(파면·해임) 267명 등 모두 941명에 달했다.
최종적으로 전교조 결성과 관련해 해직된 교사의 규모는 무려 1500여명에 이른다.
이 시기 전교조를 와해시키기 위한 ‘작업’에는 국가기관이 총동원됐다. 청와대가 그 정점에 서고, 안기부가 주도하며 감사원, 경제기획원, 내무부, 치안본부, 법무부(대검찰청), 문공부, 총무부, 서울시 등 전 국가기관이 동원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 과정에서 광범위한 민간인 사찰도 이뤄졌다.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보안사의 ‘진드기 공작’. 지난해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는 보안사 내부문건인 ‘진드기 공작철’을 입수해 전교조 창립 직후인 1989년 6월부터 이듬해까지 전개된 민간인 사찰의 실상을 확인했다.
보안사는 전교조 관련자는 물론, 그 가족과 거주지 이웃 주민 등에 대한 미행, 내사, 가택수색, 접촉 등을 시간별로 상세히 기록했다. 민간인에 대한 정보수집이 금지된 보안사가 1990년대까지 민간인 사찰을 지속해왔음을 보여주는 진드기 공작은 그 자체로 중대한 불법행위다.
지난해 12월 진실화해위원회는 1989년 전교조 출범 전후로 교사들에게 가해진 사찰, 탈퇴공작, 사법 처리, 해직 등의 탄압은 “현저히 부당한 공권력의 행사로 인해 발생한 중대한 인권침해 사건”임을 확인했다. 33년이 지나 국가 조사기구로부터 나온 ‘결론’이었다.
강성호에게도 뒤늦은 진실이 찾아왔다. 2021년 9월 재심 재판부는 그에게 국가보안법 ‘무죄’를 선고했다. 수업시간에 ‘6·25 북침설’을 들었다고 증언한 학생은 그날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출석부에 분명 ‘결석’이라 적혀 있었지만, 경찰도 검찰도 눈을 감았다. 그렇게 강성호는 ‘빨갱이 교사’로 만들어졌고, 누명을 벗기까지 인생의 절반이 필요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지난해 12월 “노동의 자유, 사생활의 자유, 직업의 자유, 행복추구권 등 중대한 인권을 침해하였으므로 (…) 공식적으로 사과해야 한다”고 정부에 권고했다. 돌아온 것은 사과가 아니었다. 지난 5월 23일 국가정보원과 경찰은 전교조 강원지부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압수수색했다. 언론은 기다렸다는 듯 ‘전교조에도 간첩이 있다’는 보도를 쏟아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묘한 기시감. 1989년 강성호의 ‘그날’과 닮았다.
강성호가 진실을 밝히고 재심 무죄 판결을 받기까지 32년이 걸렸다. 1989년 그와 비슷하게 연행되고 해직된 교사들이 ‘국가폭력 피해자’로 확인받는 데까지는 33년이 걸렸다. 앞으로 또 그만큼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오늘날의 이 장면 역시 한 편의 촌극으로 기억될 수 있을까. ‘지연된 정의’로 훼손된 피해자들의 인생을 그때는 또 무엇으로 돌이킬 수 있을까.
<최규화 전 진실화해위원회 언론홍보팀 주무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