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직장은 시민단체를 추천한다. 경험에서 우러난 말이다. 내가 몸담은 시민단체의 구성은 기괴하고 심플했다. 고문단과 이사장 그리고 유일한 실무자인 내가 있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수십 개의 머리를 가진 단 하나의 몸통이었다. 이사장이 그런 식으로 만든 시민단체 몇 개가 같은 사무실에 모여 있었는데, 그러니까 머리가 여러 개 달린 직원 몇몇이 더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말로만 듣던 총체적인 근대사 문화체험을 할 수 있었다.
우선 시도 때도 없이 열리는 회식은 절대 빠져서는 안 됐다. 술을 전혀 못 하는 나에게 “토할 때까지는 마셔라”라고 말했고, 잔을 부딪칠 때마다 이사장이 “다솔아! 여기 뼈를 묻자!” 혹은 “죽을 때까지 함께하자!” 혹은 “단체가 곧 내 삶이다!”라고 방이 떠나가라 소리쳤다. 월급은 쥐꼬리보다 짧았는데, 회식은 1차 소고기 2차 횟집 3차 노래방을 꼭 지켰다.
이사는 고주망태가 돼서 주먹으로 노래방 벽이 북이라도 되는 듯이 두드리며 박자를 맞추었고, 이사장은 잔뜩 취해서는 ‘낭만을 위하여’라는 노래를 고래고래 완창했다. 그때 반 박자쯤 늘어지게 부르는 것은 국가에서 정한 법이라도 되는 듯했다. 놀랍게도 그 목청에 노래방 기계조차 놀랐는지 점수가 무려 100점이 나왔다. 이사장은 기쁨을 숨기지 못하고, 노래방 화면에 침을 ‘카악~ 퉤’ 하고 뱉더니 그 위에 현금 1만원을 짝하고 붙였다. 나를 제외한 모두가 미친 듯이 환호했다. 분명히 보고 있지만 믿을 수 없는 장면이었다. 우리 아빠보다 나이가 많은 이사가 노래에 맞춰 미친 좀비처럼 벽을 쾅쾅 두드리다 화면에 붙은 1만원을 보고 숨이 넘어갈 것처럼 웃어댔다. 그 웃음소리가 천둥 번개 같아서 화들짝 놀랐다. 다른 직원들은 머리에 넥타이를 둘러매고 트로트를 한 곡 올리거나, 눈이 풀린 채 완전히 자신만의 세상으로 떠나 있었다. 그 모든 것을 온전한 정신으로 지켜보고 있는 사람은 나뿐이었고, 그게 가장 큰 문제였다. 회식은 새벽까지 이어졌다. 택시비는 물론 제공되지 않았다. 다음날도 정시 출근이 이어졌다. 숙취로 고생하는 직원이 있으면 “군기가 빠졌다”고 했다.
그 와중에도 온전한 정신을 지키려면 상당한 내공이 필요했다. 나도 보통내기는 아니었던 셈이다. 회식마다 온갖 너스레와 핑계, 필요하다면 애교까지 떨어가며 그들이 권하는 술을 능수능란하게 피해갔다. 콩트라도 찍는 사람마냥 가장 취한 사람처럼 굴었고, 사이다를 소주잔에 따라서 거기 있는 누구보다 크게 “크~” 소리를 내며 마셨다. 술 한잔하라는 말이 떨어지는 순간 일장 연설을 시작했다. “제가 대학교 때 알코올 분해능력 테스트를 받았거든요? 스티커 붙이고 30분 기다리는 거였는데 피부가 빨개질수록 분해능력이 없는 거랬거든요. 제가 그때 원숭이 엉덩이가 얼마나 빨간지 알았다니까~”라거나, “저는 이미 취했기 때문에 여기서 추가적인 알코올 섭취는 낭비일 뿐입니다. 제 별명이 괜히 공기 먹고 취한 여자겠습니까?”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래도 권유가 멈추지 않으면 이렇게 말했다. “우리 집이 어떤 집이냐, 옛날에 우리 집에 귀한 손님이 엄청 비싸고 좋은 술을 선물로 주시고 가셨다가 10년 뒤에 오랜만에 다시 오셨는데, 그 술이 찬장에 그대로 있었지 뭡니까! 글쎄 경악하며 아주 잘 익었다고 다 드시고 갔습니다.”
그들이 술을 권하면 권할수록 나의 응수도 뻔뻔해졌다. “아잉~ 조희집은 아빠두 할아버지두 증조할아버지두 고조할아버지두 현조부할아버지두 래조부할아버지두 술을 못 해요옹~” 혹은 “잉~ 조희집은 엄마두 할머니두 증조할머니두 고조할머니두….” 이런 식으로 응수는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이모할머니 이모할아버지까지 변주해가며 이어졌다. 내가 말하면서도 웃음이 비실비실 나왔으니 회식 자리에 있던 모두가 웃었음은 물론이다. 혼신의 사투였다. 여간해선 당해낼 수가 없다는 걸 알게 된 이사장이 언젠가는 거의 협박을 하며 술을 마시라고 혼을 낸 적도 있었다. 순식간에 싸해진 식당에서 내가 말했다. “어떻게, 제가 무릎이라도 꿇을까용?” 이사장은 식당이 떠나가라 웃었다. 창과 방패의 싸움이었다. 직원들은 “만만치 않은 상대가 등장했다”고 말했다. 처음엔 경악했고, 이후에는 경외했다. 이사장은 이상하게도 점점 더 나에게 말을 많이 걸었다. 후에 그는 오랜만에 젊은이와 진짜 대화하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앞에서는 고분고분 말하고서 밖에서 온갖 욕을 하고 다니는 직원들을 숱하게 겪은 모양이었다. 사실 그는 누군가 그 앞에서 편하게 까불어주길 기다렸는지도 모르겠다. 이사장은 기분이 꿀꿀하거나 고민이 있을 때마다 이사장실로 불러 나에게 시답잖게 말을 걸었다.
드라마와 현실을 구분할 수 없는 업무환경에서 나의 능력은 날로 늘어갔다. 무엇이든 피해갈 수 있는 ‘너스레 마스터’가 됐다. 그 외에도 숨을 쉴 때마다 온갖 내공이 쌓여가고 있었다. 업무의 양이나 종류와 상관없이 A부터 Z까지 모두 내 일이라는 엄청난 주인정신, 삶과 일, 직장과 집은 일체라는 일아일체의 정신, 수시로 쏟아지는 잡무를 받아내는 유연성, 손바닥 뒤집듯이 뒤바뀌는 우선순위에 적응하는 융통성, 웬만한 상황에서는 놀라지 않게 되는 담력, 무슨 말이든 찰떡같이 알아듣는 해석력, 내가 배운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천천히 잊어내는 망각력까지. ‘시민단체 간사’란 서비스직임을 나는 알아버리고 말았다. 이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언제든지 자신의 자존심일랑 땅으로 탁 던져버려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실제로 일을 해내는 능력보다 상부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는 것이 압도적으로 중요했다. 무슨 말을 듣더라도 놀라지 않고 웃으면서 “네”라고 말해야 했다. 출근 첫날, 아무것도 몰랐던 나는 바보같이 질문이라는 걸 날리는 실수를 했다. “저는 뭘 하면 될까요?”, “자, 네가 일할 재단을 만들어라!”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나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어 고개를 갸우뚱했다. 마치 집에 들어가고 싶으면 직접 지으라는 것 같았다. 그는 말 그대로 내가 일할 재단을 직접 창단하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나는 당황스럽게 웃으며 물었다. “네? 그건 어떻게 하는 거죠?” 상사가 말했다. “이 바보야, 그것도 모르냐? 만들라면 만들어!” 나는 웃어야 한다는 사실조차 까먹어버렸다.
<양다솔 작가>